|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4편 1절-2절.
44편. 고라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1절-2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고라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고라자손은 레위족의 한 분파로서 성가대원 역할을 담당했다(대상1:35). 그리고 ‘마스길’이란 ‘교훈의 시’라는 뜻이다.
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라고 했으니 ‘무엇을 즐겨 듣느냐? 무엇을 즐겨 말을 해 주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거다. 그래서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누가 누구에게 무슨 일을 했다는 거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신 일을? 우리에게 하신 일을. 그 일을 누가 우리에게 일렀느냐? 열조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이 열조들은 우리에게 주께서 행하신 일을 전했다는 거다.
사람마다 신기한 일을 보거나, 듣거나, 또는 신기한 일을 당하면 그것이 마음 속에 담아지기 마련인데,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듣되 무엇을 듣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산 경험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다. 왜냐? 이런 것을 들으면 듣는 자기에게 믿음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식도 생기고 지혜도 생긴다.
신앙심이 좋은 부모나 또는 신앙심이 좋은 스승이나 어른들에게서 살아온 경험이나 성경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면 참 복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먹고 마시고 희희낙락 노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상생활의 대화에서 뭘 즐겨 듣느냐?’에 따라 미련하게 되기도 하고, 지혜자가 되기도 하는 건데,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을 즐겨 듣느냐? 그리고 말을 할 때는 무엇을 즐겨 말을 하느냐? 맨날 남의 말만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심리가 대부분 보면 자기가 얻어맞아 죽을 뻔했다는 말은 별로 없고 다른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팼다는 얘기는 잘 한다.
어릴 때부터 늘 안 좋은 얘기를 듣고 안 좋은 것을 보고 자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생각을 고치기란 참 어렵다. 오죽하면 옛날 격언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을 모른 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니 인간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니 인간에게 참된 유익을 주는 걸 모른다. 자기 주관대로만 해 달라고 한다. 이렇게만 살아온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독자이니 만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고칠 게 많다. 자기에게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면 빨리 고쳐라. 빨리 고치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빠르다. 놀러 가고, 먹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것은 빨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고자 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면 빨리 생각을 바꿔라. 자기가 테레비를 보는 시간이 많으냐, 성경을 보는 시간이 많으냐? 이게 바로 자기다. 이걸 생각해 봐라. 테레비를 많이 보면 테레비에서 본 영상이 자기 머릿속에 늘 남아있다. 이러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적인 면에서 유익이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다. 이게 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판성이 누적이 되는 거다. 이렇게 살면 가정이나 개인에게 힘든 상황이 오면 이겨내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원망불평이 남에게 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원망불평을 들으려고 하느냐? 그러니 그게 지옥이 되는 거다.
눈 밝을 때, 시간이 많을 때 성경을 많이 읽어라.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거고, 또 지역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거다. 성경이 봐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지루해지고, 그만 교회에 가기도 싫어지고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어디로 떨어지겠느냐? 세상으로 떨어져 버린다. 세상으로 떨어지면 돈이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죽자 사자 일을 해야 하고, 이러면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되고, 모처럼 쉬는 날에도 교회에 안 와지는 거다.
누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느냐? 아무도 못 진다. 부모형제가 지느냐? 아무도 못 진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다. 그런데 스스로 시험에 들고,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살고, 스스로 마음을 못 잡아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게 가난해서, 잘 살지를 못해서 그런 거냐? 아니다. 항상 말하지만 사람이 바로 안 돼서 그렇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자기 마음에 생각에 달려있다. 행불행도 자기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자기의 행복을 물질성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하면 물질을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나가게 된다. 사는 게 이 위주가 된다. 이처럼 물질욕심을 지니고 살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겠느냐? 참 불행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해 주고 도와주며 살면 누구의 걱정이 없어지느냐? 자기의 걱정이 없어진다. 그러니 얼마나 편하냐? 그리고 자기가 자기 걱정을 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해결이 되는 거냐? 걱정을 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걱정을 하기 전에 먼저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의 마음이 진리에 붙들리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을 붙든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가진 사람을 붙드시는 것이지 독한 마음이나 세상 쓰레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붙드시겠느냐? 마음이 진리에 붙들린 상태에서 신앙의 스승이나 어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듣게 되면 큰 깨달음을 얻게 되니 큰 믿음이 생기게 된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먼 산 쳐다보듯이 그저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면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져야 지혜지식적인 면에서나 도덕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자꾸 커지는 거고, 이게 믿음이 있는 거고, 믿음이 큰 거다. 이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많이 봐라.
본문의 성도는 구전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께서 열조들에게 행하신 일을 듣고 이것을 믿음으로 즉시 받아들였고, 열조들이 고난을 당할 때 기도를 하니 하나님께 응답해 주셨듯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로 아뢰었다. 그러니까 과거 열조들의 신앙은 언제나 살아있는 산 역사인 거다.
오늘날 자기가 자기만큼 된 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자라나오면서 주위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들은 게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재의 자기가 된 거다. 뭘 어떻게 들어왔던 들어온 것으로 오늘날 자기로 형성이 된 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보게 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성경을 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모든 면에서 일등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쳐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은 어릴 때부터 목동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했다. 이런 걸 생각을 해 봐라. 성경을 통해서 실지로 일어난 이런 역사들이 현재 자기에게도 이뤄지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 나가도 복, 먹어도 복 안 먹어도 복, 누워도 복 일어서도 복이다. 뭘 하든지 복이다. 이게 믿어지느냐? 성경은 참말이다. 복 중에 제일 큰 복은 사람 되는 복이다. 그 외에 먹고 마시는 것은 복의 사람 뒤로 따라가는 거다.
이런 복의 사람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 라고 했는데,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고 세상에서 머리가 되게 하려고 한다. 이건 아니다. 이건 세상의 이용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성도를 위해서, 진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역사해 나갈 때 이런 자들은 이 일에 전부 이용물이다. 세상에서 머리가 되겠다고 하는 소원 목적적으로 나가는 사람은 전부가 이용물이다. 안 당하려야 안 당할 수 없는 거다. 아예 법칙이 그렇게 되어있다.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그러면 성경을 읽으면서 선지 사도들이나 믿음의 선조들이 고난을 당한 것과, 그 때 기도를 하니 들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그 분들과 똑같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원 목적적인 기도를 해 봐라.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느냐?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만 달랑 해 놓고 아무렇게나 살겠느냐? 평상시 기도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살면 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느냐?
2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이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세를 붙들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해서 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나게 하고,[성도가 가나안(천국)에 들어가려면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세상의 삶)을 꼭 거쳐야 한다.]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우상을 섬기는 일곱 족속을 몰아내야(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낼 수 있는 실력을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갖추는 거다.) 그곳에 살 수 있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영적 이스라엘인데, 이방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의사적으로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일으킨 교만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브람함의 믿음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영적 이스라엘이 된 거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을 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옮긴 육적 이스라엘 조상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만이 그 조상들이 이방의 압제에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를 해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응답을 받았듯이 지금의 우리도 진리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때 현재적 자기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고차원적인 신령한 세계로 올라갈 수 있는 거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믿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은 ‘광야교회’로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40년 동안 광야를 거치면서 신앙의 실력을 쌓았듯이 우리가 광야교회인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말씀의 인도를 따라 소원 목적을 천국에 두고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이 인도를 받고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거다.
예수님을 안 믿는 이방우상을 섬기는 종교인들이 큰 나무 밑에서나 큰 바위 밑에서 촛불을 켜놓고 그 앞에서 손을 비비고, 꽹과리를 치고, 북을 치고 하는 게 자기들의 세상적인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거냐, 들어주지 말라고 하는 거냐? 들어달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 현재 오늘날 신약시대의 예수 믿는 우리는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거냐? 자기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거냐. 그냥 심심해서 하는 거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해서 기도를 하는 거다.
그런데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다 들어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알고 그 약속을 잡고 기도를 해야 들어주신다. 예를 들어서 ‘나도 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를 다윗 왕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왕이 되게 해 주시는 거냐? 왕이 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잘 보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야 한다. 말씀을 사모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간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단순히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왕이 되고 싶어 하니 내가 너를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고서 왕으로 세운 거냐? 설령 이렇게 해서 왕이 된들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할 수 있겠느냐?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어릴 때 누구를 때려잡았느냐? 골리앗이다. 그러니 그 용기를 생각해 봐라. 그 어린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찌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이런 신앙정신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 왕으로 다윗을 기쁘게 세우신 거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주의 손’이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역역사를 말한다. 이 구원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상징하고 계시해 주는 것인데,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은 세상을 만들기 전에, 인간을 만들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설정이 된 거다. 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영능의 실력대로 영원 궁극적 세계에서 영원히 누리도록 설정이 됐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된 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바로 인간 자기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누구는 미워했고, 누구는 사랑했다’ 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사람 누구를 사랑했다. 사람 누구를 미워했다’ 하는 걸 우리로 알라는 거냐? 이 말은 ‘하나님께서 천사 중에 누구는 사랑했고, 누구는 사랑을 안 했다’ 이게 아니라 인간을 보고 하는 말이니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볼 때는 사람인 나와 관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누구는 사랑했고, 누구는 미워했다’ 라는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보는 제 삼자적 입장에서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했을까?’ 하는 것을 살펴보고 ‘나도 그 사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짓을 해야 되겠구나’ 라고 깨달아야 한다. 왜냐? 모든 성경은 나와 관계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해 주셨다’ 할 때는 이 말씀은 인간 나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자기편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이걸 깨달아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사랑받을 짓을 하면 사랑을 받느냐? 확실하냐?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고,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가나안 지방의 열방들, 즉 이방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 때 믿음의 조상들은 애굽에 430년을 살고 있으면서 애굽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하기 전까지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핍박을 받고 있었고, 가나안 땅의 이방백성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니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이방족속들을 내쫓고 그 땅에 살게 된 거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려갈 때는 70명이었으나 애굽에서 430년을 지나면서 출애굽을 할 때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이었으니까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다 합치면 250만 명은 될 거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갈수록 진리의 믿음의 자녀가 자꾸 불어나야 한다. 육신의 자녀 속에 믿음이 계속 내려가야 한다. 생명의 신앙계대가 자꾸 내려가야 한다. ‘안 낳자’ 주의로 내려가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식을 많이 낳되 하나님 틀에 넣어서 길러야지 인간의 틀에 넣어서 기르면 못써져 버린다.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란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걸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받으신다. 현재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은 이걸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만드는 교육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교육방법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학원에 많이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학원에 가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정신력을 넣어줘야 한다.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얼마나 좋으냐? 이게 아닌 정신부터가 세상으로 되어있고 줏대가 없으면 이 아이는 세상을 살면서 고통 가운데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대로 믿는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정신이 들어가게 해 봐라. 그러면 모르긴 해도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제일 귀중한 선생이 신앙의 정신세계를 가르치는 거다.
말세가 되어질수록 일반세상도 그렇고, 신앙세계도 그렇고 모세처럼 사람들의 정신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 일반세상은 정신세계는 관심이 없고 어쨌든 돈만 많이 벌어서 잘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정신세계는 누가 이끌어 가느냐? 교회가 이끌어 가는 거다. 사람 만드는 것은 교회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마저도 맨 ‘하나님, 뭘 달라. 뭘 달라’ 하고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니 이게 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70명으로 애굽에 들어갔으나 애굽에서 430년을 지나면서 장정만 해도 60만 명이니 전부 합치면 250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래서 애굽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심한 노동으로 여자들의 몸이 더욱 튼튼해져서인지 아이를 낳을 때도 순풍 순풍 잘 낳았다. 이에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심한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여자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라고 하는 등 갖은 핍박을 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세워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해서 애굽의 바로 왕이 두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거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올라가는 거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내야 하고 그들의 이방우상을 몰아내야 하기 때문에 이 실력을 닦을 수 있도록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며 신앙의 훈련 연단을 받게 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광야를 거치면서 신앙의 훈련 연단을 받으며, 그 와중에 새생명은 자꾸 태어난다. 이걸 영적으로 말하면 성도가 광야교회인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새 것으로 계속 채워나가는 것을 말한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훈련과 연단으로 쌓아진 신앙실력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우상을 섬기는 그 땅의 족속들을 다 몰아내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신앙을 가진 믿음의 조상들을 그 땅에 심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믿음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환난 핍박을 받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것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기로 되어있는 거다. 이 세상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니 이런 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영원히 허락이 되는 게 아니다. 이걸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 빼앗아 버리고, 쫓아버리고, 죽여 버리고, 멸망시켜 버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을 하면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만일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의롭게 살았다면 왜 그 땅에서 쫓아냈겠느냐? 이런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니까 장차 이 땅을 왜 불에 태워버리는 거냐? 악인들이 땅을 못 쓰게 만든 것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쫓아버리고, 죽여 버리고, 멸망시켜 버리고 그곳에 당신의 백성을 심는 거다.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믿음의 조상들이 기도한 내용도 생각해 보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도 살펴보면서 이들의 신앙 믿음의 마음을 받아서, 그 믿음의 영을 받아서, 그 정신 사상을 받아서 현재 자기도 그 정신으로 기도를 하라.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 생활을 하면서 훈련 연단을 받을 때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기도를 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지를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를 하셨던 그 역사를 지금의 자기도 보고 가야 한다.
그냥 교회에 다니다가 얻어맞고, 얻어맞으면서도 왜 얻어맞는지도 모른 채 맨 고만고만하게 살다 가면 안 된다. 자기를 성경의 주인공처럼 생각을 하라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주인공이 돼야 한다. 그래야 신앙 양심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