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 칸 사무치던 젊은 날 설움…삼국지로 번 돈 부악문원 짓다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22. 부악문원을 만든 까닭은
1982년 월간 ‘소설문학’에 발표한 단편 ‘과객(過客)’은 진작에 사라져 버린 우리의 손님맞이 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소설에서 나는, 보학(譜學) 지식과 토호(土豪)들의 신상 정보를 꿰찼다고는 하지만 남의 집 문턱을 함부로 넘던 가인(歌人) 묵객(墨客)을 생면부지인데도 집주인들이 쉽사리 내치지 못했던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혜택받은 토호나 부자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불우한 계층인 과객에게 보상 의무를 느꼈거나 과객이 선사한 묵화나 판소리 한 토막에 대한 답례, 아니면 실질적으로 입을 수 있는 불리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거나.
과객은 지역 간 장벽을 뛰어넘는 정보 전달자 및 여론 조성자였다. 그들에게 나쁜 평판을 얻는 경우 혼인 길이 막히거나 출세에 장애가 되는 수도 있었다.
소설에서 시대착오적인 과객을 처음에는 “고급 거지”라고 면박 줬던 집주인 김상조는 차츰 과객 이갑선의 과객론에 끌려, 아내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술상을 차려오도록 한다. 근대 형법이 한결같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생활의 평온, 그에 따른 폐쇄적인 삶의 방식이 반드시 옳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내 나름의 문제 제기였다.
사재 털어 IMF 한복판에 부악문원 설립
소설가 이문열씨가 후진 양성을 위해 1998년 설립한 부악문원의 수업 장면. 맨 왼쪽이 이문열씨. 사진 엄창석
1998년 사재를 털어, 그것도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한복판에 차린 부악문원은 겉으로는 현대판 서당의 모습이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과객이나 식객을 받는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역시 제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문객(門客)으로 불러도 될 텐데, 부악문원을 만들기 한참 전부터 이천 내 집에는 숙식을 해결하며 등단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은 있었다. 그게 결국 부악문원으로 이어졌다. ‘교육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부악문원 원생과 나 사이에는 사생(師生)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지만 부악문원의 모태가 된 문학 지망생 그룹은 처음부터 제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