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아이디어는 무의식 속에 번뜩인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보면 직감의 번뜩임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의식 속에 나타나는 일이 많은 듯하다.
무의식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을 만들지 죽을힘을 다해 머리를 짜내고 정열을 쏟으며 자신을 철저하게 궁지로 몰아넣는 가운테 잠재의식 속에서 항상 그것에 대해 몰두하다 보면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다.
그런 경우에 정해진 패턴은 없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번뜩임이 떠오르느냐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전부 다르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산책>의 정감 있는 멜로디가 떠오른 것은 목욕탕의 욕조 안이었다.
때로는 샤워할 때 별안간 떠오르는 일도 있다.
그리고 밥 먹을 때, 침대에 들어가서 자려고 할 때, 화 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수영장에서 헤엄칠 때, 친구와 술을 마실 때,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을 때..
아이디어는 골뜰히 생각할 때보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 속에 파묻혀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할 때보다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휠씬 더 좋다.
머릿속으로 어떤 곡을 만들겠다고 계획하는 단계는 어디까지나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작곡의 본질은 무의식의 세계로 파고들어 혼돈 속에서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즉 좋은 곡을 만들겠다는 의식이 강할 때는 아직 머리로 생각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그때그때마다 적어 두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구체적인 곡으로 마무리한다.
그런 와중에 "아니야, 이건 이번 작품에 맞지 않겠군"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마무리하는 도중에 "이거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확신이 생기면 내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고 가슴은 연신 쿵쾅거린다.
이것은 매우 좋은 징조인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BROTHER>의 음악을 만들 때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세계관을 느끼기 위해 나는 로스앤젤레스의 촬영 현장에 직접 가서 어떤 음악을 만들지를 생각했다.
당시 작곡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전기기타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녹음을 할 때를 대비해 일류 기타리스트의 일정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곡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갑자기 "이건 아니야. 기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영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결국 완성된 작품은 재즈 음악과 이국적인 리듬감이 가미된 곡으로, 트럼펫보다 약간 음색이 부드러운 플루 겔혼과 오케스트라의 협연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미지를 그리던 단계에서는 "이렇게 하면 분명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라는 범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밑 바탕에는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섭외하면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즈니스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내가 실제로 만들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오른쪽 입구로 들어가느냐 왼쪽 입구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만큼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180도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영화를 위해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는 똑같다.
다만 도달점을 향해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경치가 달랐던 것이다.
만들고 싶은 작품의 모습이 처음부터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도중에 다른 길로 바뀌는 경우가 더 많다.
<BROTHER>의 음악을 담당했을 때는 내 직감이 "이쪽이 아니다! 저쪽으로 가자!"라고 외쳤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머릿속의 생각을 뛰어넘는 작품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 번뜩임을 제대로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은 반드시 성공한다.
한 인간의 개성에는 수많은 요소가 뒤얽혀 있다.
감각적인 부분 도 있고, 이론적인 부분도 있다.
세속적인 부분도 있고, 지성적인 부분도 있다.
나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도 있고, 치를 떨 만큼 싫어하는 부분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만의 독특한 '맛'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나의 약점임을 깨닫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도 있다.
창작의 묘미는 이렇게 다양한 면을 겸비한 자신을 총동원하면서도 본인의 의식을 한 꺼풀 벗겨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자신의 한계에 도달해야 한다.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새롭고 매력적인 작품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만 승부하면 평범한 작품밖에 만들어 낼 수 없지 않을까?
미로 속에서 소리를 발견하는 기쁨!
음악가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으랴.
작곡할 때 내가 만든 음악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앞에서 말한 전기기타에서 플루겔혼으로 바뀐 것이 좋은 사례이다.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앞이 탁 트인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오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좋 아!"라고 생각한 후 "뛰어넘었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납득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작곡에 들어간 순간부터 이런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까지가 가장 괴롭다.
그동안은 계속 자문자답의 연속이다.
"이것으로 될까?"
"그래, 괜찮아. 이상한 데는 어디에도 없잖아?"
"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게 없어.."
"이론적으로도 잘못된 것은 없어. 이걸로 충분해. 멜로디도 괜찮잖아?"
여기까지는 아직 납득이 되지 않은 단계이다.
이론적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해도 소용없다.
영화음악을 20곡 모두 만들어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괴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들어 보거나 술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는 등 이를 악물고 발버둥을 쳐본다.
하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는 방법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최근에 얻은 결론은 계속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나 자신을 극한상황에 이를 때까지 몰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머릿속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정열과 시간을 쏟는다.
갑자기 떠오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매번 괴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한 번 문이 활짝 열리면 그다음은 순조롭다.
아무리 만들어야 할 곡의 수가 많아도,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정신을 집중하고 앞으로 돌진할 수 있다.
한 번 문이 열리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
그때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는 일도 있지만, 여분의 소리를 잘라내고 산뜻하게 만든다든지 한 부분을 고친다든지 해서 조금만 바꾸면 되는 일도 있다.
그렇게 조금만 수정해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탈바꿈한 다.
그제야 겨우 내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내 음악의 첫 번째 청중은 나 자신이다.
따라서 내가 흥분할 수 없는 작품은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없다.
내가 좋아하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최초이며 최고의 청중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만족할 만한 곡이 만들어지면 혼자 들뜨고 흥분하여 "이봐. 이것 좀 들어봐!"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불러 직접 들려준다.
사람들을 불러 들려주지 않는 작품은 나 자신이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는 작품이며, 나 자신이 마음속 깊이 납득하지 못한 작품이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본인이 좋아하면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법이리라.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 중에서
히사이시 조가 말하는 창조성의 비밀
히사이시 조 지음, 이선희 옮김
첫댓글 본인이 좋아하면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고싶은법이지요.
20대때 친구셋이 소백산을 오르는데 친구둘은 포기하고 저만 정상에 오른적이있어요.살포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르는데 정상에서의 풍경은 말로 표현 못할정도로 너무 예뻐서 혼자 보고있자니 너무 아쉽고 안타깝고 친구들이 이 광경을 못봤다는게 어찌나 속상하던지요..ㅎㅎ 세월이 지나도 그때의 그 감정은 잊을수가 없네요~~
추억부자!시네요.
좋은 기억은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구구절절 맞는말들 소름돋는 공감 의 글 늘~감사합니다 ~^^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공감능력이 커질수록,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최초이며 최고의 청중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120% 동의합니다. 독서가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기에 책 읽고 후기를 자꾸 적고, 홍보하는데..생각보다 강한 전염력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아쉬움도 한 가득입니다.
카페지기를 응원합니다.
샘터시리즈 뒷부분 것이 오늘 도착했는데 뭐부터 읽지?... 심장이 간질간질되며 흥분되어 미칠지경입니다. ㅎㅎㅎㅎㅎ
좋은 가르침 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이 도착하니,
저는 손가락이 간질 거렸습니다.
기사협회에 글 올릴 의무감에.
아직 심장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제 심장도, 또 기사협회원들
심장이 간질간질 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