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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5대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거처 했던 곳으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용흥궁이라고하였다.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연경당,낙선재와 같은 산림집 형식으로 지어져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안에는 철종이 살았던집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1동 외전1동 별전1동등이 있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습니다.
위 건물은 별전인 사랑채로 정면6칸 측면2칸(95m제곱)인 ''ㄱ''자형으로 팔작지붕 입니다. 홑처마로 주심포이며 누마루가 있어 사랑채로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누마루는 대청마루 보다 좀 높게 한다고 합니다.
哲宗朝潛邸舊基(철종조잠저구기)라고 비석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잠저란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로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의미 하는데 이는 주역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답니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잠저로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창의궁등이 있습니다.
비석집인 비각입니다. 정면 측면 1칸이지만 팔작지붕이라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별채와 구분된 담과 솟을 작은 일각문을 통과하여 비각 가는 길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로 가는 길목 같이 느껴 집니다.
내전으로 안채입니다. 정면7칸 측면5칸(90m제곱)으로 맛배지붕형 입니다.
역시 ''ㄱ''자형 구조로 좌측에 건너방이 있고 2칸의 대청 그리고 동쪽(우측)에 2칸규모의 안방이 있으며 안방앞에 2칸규모의 부엌이 나와 있어 있습니다.
그런데 용흥궁 건물들은 철종이 살던 집이 아니고 왕으로 즉위 후에 새로 지은 잠저로서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철종이 살던 초가와는 규모면에서나 건물 수에서도 다르다고 봅니다. 살펴보면 생활에 필요한 툇마루가 없으며 안채에 불발기창은 사람이 살집이 아니므로 일반집에 비해 크고 부엌위에 고미다락도 없습니다. 또한 우물은 있는데 배수로가 없어 보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 거주 목적이 이니라 상징적 의미의 건축물이라도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정감가는 아담한 옛 한옥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불발기창은 두꺼운 한지(매장지)로 도배한 분합문 중앙부분 에 사각형, 원형, 팔각형등의 울거미를 짜 넣고 이곳만 창호지를 발라 빛이 잘 투과 하도록 한 문입니다. 윗 그림 안채 를 자세히 보면 대청에서 안방면에 세개의 불발기창이 있는게 보입니다. 그런데 분합문의 가운데 부분을 보면 일반적인 불발기창보다 배는 크게 사각형 부분이 있어 좀 균형이 안 맞은 듯 합니다.
우물인데 깊이가 궁금하지만 지나 갑니다.
용흥궁 문에서 바로 사랑채로 오르는 골목과 돌계단위 일각문이 보입니다.
안채에서도 옆 우물을 지나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위 일각문이 있습니다.
용흥궁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 오는 중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문은 행랑채와 같은 높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 오거나 사랑채로 바로 가는 길이 문과 담으로 구분 되어 있어 양반 가옥의 기본 배치 모양을 보는 듯 합니다.
안채 앞에 광 그리고 하인방(?) 건물이 있습니다. 행랑채가 아닐까 합니다.
용흥궁 소슬대문입니다.
용흥궁 현판 글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합니다. 소슬대문은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지어 초헌 출입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대문이외에 따로 안채나 행랑채에 출입 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하인이나 그 밖에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채 뒷편에 후문이 있는데 원래 있던 문인지 알 수 없지만 관광객이 주차장에서 궁안으로 출입하기는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문으로 들어 오면 사랑채 보이며 건물 동쪽에 창문이 많아 아침 햇살이 유난히 많이 들어 올 듯 합니다.
용흥궁 대문 옆으로 생묘비와 불망비가 있습니다.
삼면이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고 골목길이라 궁같은 느낌은 별로 없지만 철종 가족이 유배되어 살던 집터라 또 짧은 생애를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으로 보게 되는 듯 합니다.
철종은 조선제25대 임금으로 이름은 이변, 초명은 이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입니다. 1831년 출생하여 19세에 왕위에 오르고 재위 14년 1863년에 왕위를 계승 받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33년간의 짧은 생을 마친 왕입니다. 능은 고양시에 있으며 능호는 예릉(睿陵)입니다.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왕능 입니다. 고종과 순종은 황제였으므로 왕능법식이 아닌 황제의 법식을 따랐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무인 문인석등 석물이 능에 비해 커 보입니다. 이는 조대비(趙大妃.신정왕후.헌종의 어머니)가 중종의 초장지에 매몰되었던 조선 중기에 특징인 큰 석물을 재사용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것은 철종이 자식도 없고 왕세도 약했었기에 홀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직혈통도 아닌점도 작용했으리라 추측도 해봅니다
강화도에서 평범한 농부로 살던 이원범이 24대 임금(철종)이 된 연유는 8세에 왕위에 오른 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에 급사하자 당시 세도정치가 심했던 터라 23대 순조비 순원왕후가 주도하여 왕족 6촌이내에는 후계자 없어 영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이인)의 서자 전계대원군(이광)의 아들 형제들 중에서 세째인 이원범을 덕완군으로 봉하고 바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왕 헌종보다 한 항렬 높지만 왕으로 옹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헌종과 철종의 가계도를 보면
* 먼저 헌종을 보면 21대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 사도세자(추존왕 장조)가 ,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혜빈홍씨) 사이에 22대정조가,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 23대순조가, 순조와 순원왕후김씨 사이에 효명세자(추존 익종)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조씨 사이에 24대헌종이 태어나 대를 잇는데 헌종에서 대가 끊기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 - 22대정조 - 23대순조 - 효명세자(익종) - 24대헌종으로 이어지고,
* 철종을 보면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사이에 은언군과 은신군이 경빈박씨 사이에는 은전군이,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 풍계군 전계대원군등 7명을 두고 전계대원군은 회평군 영평군 그리고 용성대부인염씨 사이에 철종(이원범)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사도세자 - 은언군 - 전계대원군 - 25대철종으로 이어 짐니다. 그리고 은언군 전계대원군 철종은 모두 서자입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강화도령이라고 하칭한 이유중에 하나가 되기도 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원범(철종)이 임금에 오르게 된 사유중 큰 사연은 17대 효종대부터 보면 17대효종의 외아들 18대현종 현종의 외아들19대숙종은 경종과 20대영조를 두는데 영조는 첫째가 일찍 사망하여 사도세자뿐이고 사도세자는 아들 다섯명(외소세손,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을 두었으나 둘의 대는 끊기고 은언군은 아들 7명이었지만 헌종 승하 당시에는 이중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형제만이 효종의 정통 혈손이었습니다.
철종은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나 강화에 살게된 사연은 철종의 조부 은언군(이광)은 아들(상계군)의 정조에 양자 입양등 홍국영의 역모 연루와 정조 사후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봉등의 사유로 신유박해 당시 부인과 며느리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 되어 사사(자살 독살설이있음)되었다고 하며, 부 전계대원군은 철종이 10살때 사망하고, 철종의 큰형은 민진용이 큰형 회평군(이명. 전계대원군과 최씨사이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고 연좌제로 작은형 영평군(이욱)과 함께 교동도로 유배 되었다 다시강화도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철종 14살때 였다고 합니다.
이후 초가집에서 왕족으로 예우등은 박탈되어 평범한 농부로 지내던중 19살이 되는 해에 이원범을 왕으로 모시는 봉령단이 왔을때 조부나 큰형이 역모로 죽었으므로 자기를 잡으러 온 명으로 알고 산속으로 3일 동안 숨어 있었으며 두째 형(이욱)은 도망하다 다리가 절골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강화도에 있을때 혼인을 약속한 양순(분이)라는 처녀가 있었다고 하는데 왕이 된 후에도 많이 그리워 하며 신분의 차이로 만날 수도 혼인 할 수도 없어 괴로워 하며 병도 들었다는 애뜻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1960년대 초에 KBS라디오 일일 방송극 강화도령에 분이와 사랑 이야기등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 되어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흑백TV도 없던 시절입니다.
이원범이 왕으로 된 후에도 순원왕후는 친정 조카벌 되는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妃)로 책봉하고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계속하며 수렴청정하였다고 합니다. 철종이 철종3년(1852년)에 친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극심하고 삼정이 문란하고 하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41개조를 제정 반포 하는등 개혁을 시도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탐관오리등의 부패와 세도정치의 폐혜등으로 농민항쟁이 발생되고 철종13년(1862년)진주민란등 민란이 끊임 없이 일어남니다. 이때 동학이 창시 되었다고 합니다.
철종14년(1863년)12월 파란만장한 왕위의 생활과 33년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데 철인왕후(김문근의 딸)와 귀인박씨 조씨 숙의방씨 범씨 궁인이씨 김씨 박씨등 8명의 부인을 두고 자녀 5남 1녀를 낳았지만 아들은 다 요절하고 영혜옹주만 생존하여24대 헌종과 마찬가지로 후사 없이 대가 끊기게 됩니다.
이렇게 왕위 계승자가 또 없게 되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에게 16대 인조의 세째아들 인평대군(17대효종의 동생)의 6대손인 남연군이 양자로 입적 되어 있는 그 남연군의 네째아들인 흥선대원군의 차남(명복)을 신정왕후(익종의 비)가 익종의 아들로 입후하여 26대 임금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계보도 기준으로 보면 16대인조 - (인평대군-복령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순-남연군(은신군에 입적)-흥선대원군 ) - 26대고종 - 27대순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요약하면 16대인조의 두째아들 17대효종 계보는 헌종과 철종에서 후사 없어 끝이 나서,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 계보 8대손이 26대 왕(고종)으로 계승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