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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찬양들이 들으면서 준비한 말씀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겠지만 준비한 말씀과 많이 어울리는데 스페인을 다 가보셨죠? 거기에 바르셀로나에 가면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이 있어요.
가보셨습니까? 혹시 없어요 네 그 말 자체 사그라다 파밀리아 말이라는 자체는 이제 거룩한 아니면 성스러운 가족이라는 뜻이라고 제가 알고 있는데 이것이 시작된 지 건축이 시작된 거는 1882년 3월 19일이라고 해요. 다음 해에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가 테이크 오버 하고 그다음에 계속 건축이 진행 중인데 아직도 진행 지붕에 있는 건물입니다. 예정대로 내년에 2026년에 완공이 되면 143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가장 오래 걸려서 만든 건물이 돼요. 이거는 교회적으로만 아니고 세계적으로 그리고 비즈니스 이런 모든 차원에서 국가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이 제단이 있어요. 여러분이 보실 때 보면 여기가 제단이라고 하면 이 제단에 오른편으로 보면 높은 곳에 요셉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도 높은 곳에 보면 요셉의 안에 마리아의 장이 또 올려 있어요. 그리고 이 제단 위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형상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렇게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님 이 세 사람으로 된 가족을 두고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곧 거룩한 가족이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십자가에 달리신 사람 예수를 높은 곳에서 비추는 빛이 있고 그리고 가까이에서 그를 덮고 두르고 있는 칠각형의 천 개가 저렇게 있습니다. 각각 빛이신 영원한 아버지와 그의 영이신 성령을 나타내는 것이죠. 이것도 본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로 의도된 것인지는 제가 몰라요.
그런데 저에게는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단순히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된 거룩한 가죽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두 개의 두 종류의 가족이 있었어요. 예수님에게는 하나는 사람으로서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하는 가족이고,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알고 계셨던 것이고, 또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내용이 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어릴 적에 엄마 아빠를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가요. 근데 거기서 왕전을 마치고 돌아올 때 엄마 아빠는 떠났지만, 아기 예수는 어린아이 예수는 성전에 남은 겁니다. 부모는 그것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고 해요. 그때는 아이를 모르고도 하룻길을 갈 수 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하룻길을 가요. 그리고 아이가 없는 것을 안 다음에 아이를 찾아서 거슬러 올라와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데 3일이 지난 다음에 아이 예수를 찾았다고 하죠.
성전에서 성전에 선생님들과 랍비들과 대화하고 있는 아이가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죠. 마리아가 말하기를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보라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고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이렇게 묻죠. 그때 어린아이 예수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리아와 요셉은 그 뜻을 몰랐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는데 우리는 잘 알지요. 예수님에게는 요셉 외에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또 계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누가복음 마태복음에 기록돼 있는데, 예수님께서 장성하신 다음에 복음을 전파하지 한 번은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어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찾아와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죠.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동생들일까?
그리고 손을 내밀어서 앉아 있는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자매라,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어머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에요. 예수님에게는 이 혈과 육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 가족, 더 큰 가족이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에 따라서 행하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를 믿는 자들을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실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순종을 하셨어요.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을 성경에서는 양자 됨 이라고 해요. 영어로 어덕션이라고 하죠. 양자 데이라고 하는데 ji 패커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그 목사님은 이 양자 됨을 포함한 세 단어를 가지고 복음을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대속을 통한 양자 됨, 대속을 통한 입양 한국말로도 세 단어가 되겠죠. 영어로 하면 어댑션 트루 프로피시에이션 네 어려운 말인데 그냥 성경에 있는 용어로 하면 대속을 통한 입양 이렇게 복음을 요약을 해요.
그런데 제가 볼 때 이것은 아까 본 사그라다 파밀리아 그 성당 중심에 있는 형상들로 표현을 하고자 하고 있던 그 의미와 아주 딱 잘 맞는 말이에요. 요 세 단어가 어떻게 그럴까요? 이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가족이 있고 또 다른 편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 형상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왜 다른 것도 아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그 모습을 형상화해야 했을까 그 설계자의 마음에는 분명 아까 말씀드린 대속을 통한 입양이 들어 있을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 믿음으로 그 안에 서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제요 자매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 옆에 서 있으면 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여러분도 저도 우리 모두도 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 하나님의 아들의 형제요 자매라 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엄청난 게 큰 의미를 삼은 말이죠. 여러분에게 마음속에 깊이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게 너무나 큰 거라서 아까 말씀드린 제 패커 파이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해요. 양자 됨은 복음이 제공하는 최고의 특권이다. 가장 높은 특권입니다.
심지어 칭의 칭의보다도 더 높은 것입니다. 양자 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자녀이자 우리를 자신의 가족과 교제 안으로 받아들이시며 우리를 그의 자녀와 자녀이자 상속자로 세우십니다 하는 말이에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당연히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훨씬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의 언어로 하자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 창세 전에 이미 선택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리고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그 아들들이 되도록 그의 자녀들이 되도록 예정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금 말한 복 축복 선택 예정 이거는 이스라엘 안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났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하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이죠.
여러분도 그렇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해 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함께 찬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만 아니라 언제든지 모였을 때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찬송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우리가 조금 더 배워볼 수 있는데 지난주에 설교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가르쳐주신 우리에게 하도록 가르쳐주신 이름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에 빗대서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고 했죠. 만약에 하나님이 아버지 같다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사람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주장도 그렇게 틀린 것이 아니게 될 것이에요. 성경의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아버지 같은 측면이 있지만 또 적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 같은 측면을 보여주세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 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머니에 비유해서 말씀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에 따라서 하나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름이 아니고 은유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부르시고 우리에게 따르도록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여러 은유들을 가능하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오늘 찬양한 것처럼 하늘보다 높으신 그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때로는 아버지처럼 근엄하게, 어머니처럼 자유롭게 또 때로는 목자처럼 안전하게, 때로는 요세와 반석처럼 견고하게, 때로는 소멸하는 불처럼 무섭게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죠. 이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그다음에 이어질 아들과 양자 됨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들도 그래요. 하나님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그 나사렛 예수는 딸이 아닌 아들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은 여자 아닌 남자로서 아들이 아닙니다.
지혜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용어 중에 하나인데 이 지혜를 가리키는 언어는 문법적으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에요. 육신이 되신 말씀도 우리가 인간의 언어에 따라서 인간의 성을 따라서 이해하면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읽고 듣고 믿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 아들과 딸을 모두 품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시는 것이 맞다 좋다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아까 말한 이 양자 됨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어요. 양자 됨 영어로 어댑션인데 어댑션에는 없는 의미가 이 양자 됨면는 있어요. 왜냐하면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이 들어가 있는 거죠.
양자 됨이라는 건 가족이 아닌 사람을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가족이 아닌 남자 아이를 가족의 아들로 양자로 삼는 거 말하는 거죠. 영어로 말하면 그냥 가족이 아닌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알듯이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포함되지 그러므로 본문에서 오늘과 같은 본문에서 아들이라 적혀 있는 것을 우리는 자녀 출든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들이든 딸이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내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우리가 남자 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여자가 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에 있는 것이니라 믿으시나요?
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들이든 딸이든 잘났든 못났든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그의 자연으로 삼아주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랑의 하나님을 전할 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전할 때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필요해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했죠.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랑을 주시고 받으실 수 있고, 또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아버지에게 사랑을 주실 수 있고, 성령께서 사랑을 교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양자 대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있어요. 4 5절을 보시면 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말이 있죠.
이것을 연결해서 말하면 뭐가 되냐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가 우리를 그의 아들들 곧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것이고, 사랑 안에서 하신 것이고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하신 것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 안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 이미 충만하게 갖고 계신 것을 오늘 이미 갖고 계신 것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그 완전하고 그 영원한 사랑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 죽을 운명인 사람, 연약한 사람, 때로는 죄에 빠지는 부족한 우리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려고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하는 것이에요.
아버지께서 아들의 일을 높여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 그들을 기뻐하시며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아들을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반복하자면 사랑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 주는 사랑이 있고, 남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어린아이 것이며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는 사랑이에요. 두 번째는 건강하고 안전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청년들 같은 경우 연애를 할 때 이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에서 보이는 그 사랑을 볼 때 참고할 수 있는 기준이 돼요.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죠.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도 거기에 맞는 사랑이어야 한다. 반복하지 세상에 사랑이 없어서 세상에 싸움이 많은 거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세상에 잘못된 사랑이 많기 때문에 싸움이 끊지 않는다라고도 얘기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받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고 그것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내가 가진 인생의 모든 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 것만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필요한 곳으로 아낌없이 흘려보내야 된다.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전해야 한다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랑을 더 넓게 하는 성령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화해하고 또 한마음으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서로를 도와줘야 돼요.
어떻게 도와줍니까? 에베소서의 뒷부분에서 전해주는 것처럼 서로 친절하게 되고 서로 불쌍하게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서로 용서해야 돼요. 이해해야 되고 받아줘야 되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바라 끝까지 이것을 우리가 해 나갈 때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가족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우리 안에서도 만들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렇게 그 길을 만들어 주셨고,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우리가 기억을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오늘 말씀에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정말로 한 가족이라는 것을 모이는 한 한 가족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