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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의 다양한 모습과 폭넓은 주제
이승하
아주 짧은 시를 써 깊은 인상을 남긴 시인들이 있다. 이미지즘의 선구자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딱 2행이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In A Station of the Metro」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로 번역이 되는데, 지하철 정거장에서 본 한 순간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그린 이 시는 ‘이미지즘’을 설명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파운드는 원래 이 시를 30행으로 썼다고 한다.
나는 3년 전에 파리의 지하철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부인의 얼굴 등을 보면서 그 인상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나 그 신선한 감정을 나타낼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중략) 나는 30행의 시 한 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 버렸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의 시로 고쳤고, 1년 후에 2행의 짧은 시로 만들었다.
아마도 원래의 30행 혹은 그 이후에 줄인 15행으로 이 시가 완성되었다면 사람들의 뇌리에 그렇게 선명하게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옷은 잘 차려입었지만 무표정하기만 한 지하철 정거장의 사람들이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을 연상케 한다니, 그 섬뜩한 표현이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시인은 어찌하여 산 사람의 얼굴에서 유령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지하세계였기 때문이다. 햇빛이 아닌 백열등 불빛에 비친 얼굴들이라 ‘군중 속의 고독’을 읽어냈던 것이 아닐까. 프랑스의 장 콕토도 뭇 독자의 뇌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시를 썼다.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산비둘기」 전문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
-「귀」 전문
아, 참 길구나!
-「뱀」 전문
암송을 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대로 암기가 되는 시다. 단순하고(「산비둘기」), 소박하고(「귀」), 명료하다(「뱀」). 장 콕토는 다방면에 제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감독도 했었는데 이렇게 짧게 쓴 시 몇 편이 그의 다른 유명한 시와 영화를 압도할 만큼 ‘유명’하다. 짧기 때문에 한 번 보면 그대로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오이겐 곰링거나 카를 리아 같은 시인의 시 중에도 짧고 재미있는 것들이 있는데 아래의 시는 다분히 기하학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있어 눈길을 더욱 강하게 끌어들인다.
침묵하기침묵하기침묵하기
침묵하기침묵하기침묵하기
침묵하기 침묵하기
침묵하기침묵하기침묵하기
침묵하기침묵하기침묵하기
-오이겐 곰링거, 「침묵하기」 전문
앞의 시는 한가운데에 없는 글씨가 이 시의 핵심이다. 침묵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란 경구를 생각해본다면 이 시는 더욱 잘 이해될 것이다. 대체로 언어는 과장되거나 진실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는 침묵의 가치를 “침묵하기”(schweigen)라는 말을 교묘하게 배열하여 설파하고 있다. 카를 리아도 거짓된 말, 화려한 말, 길게 늘어놓는 말을 하지 말자고 이런 시를 썼다.
자음과 모음이 없으면 음절이 없고/ 어절이 없고
어절이 없으면 문장도 없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하면/ 입이 마른다
-「금언」 전문
자기변명을 하다가 보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속담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이 짧은 시가 시 자체가 금언이요 에피그램이다.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
-카를 리아, 「섹스 광고」 전문
“말해요나에게어떤포즈를당신이진짜원하는지”라는 구절 중에 어떤 글자만을 필기체로 하고 다른 글자는 고딕체로 하여 나열한 카를 이라의 이 시는 가느다란 명조체에 오히려 무게를 두어 읽게 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현대 소비 사회에서 수많은 광고가 여성의 몸을 이용해 광고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을 보고 이 시를 통해 비판해본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 리아의 현실비판의식, 사회풍자정신이 잘 나타난 시로 이런 것이 있다.
그는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는 위로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숨쉬기에 필요한 공기는
올라갈수록 희박해진다/ 그러다가 어느새
퍽 하고/ 그의 두개골이 파열된다
-「출세의 길」 전문
사람이 자신의 실력과 분수를 모르고 위만 보고 올라가려고 하다가는 큰코다치게 된다는 이야기를 이 시를 통해 해주고 있는데, ‘ / ’를 사용함으로써 집중도를 높이는 특이한 시 창작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우화나 동화가 그렇듯이 과장법을 동원해 출세욕 혹은 명예욕을 경계하라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한 번 보면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시가 형식으로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따를 것이 있을까.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시대에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전 시대의 단까[短歌]나 렌까[連歌]가 줄고 줄어 5ㆍ7ㆍ5조가 되었다. 18세기 때의 요사 부손(與謝蕪村)이나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9세기 때의 마사이코 시키(正岡子規)가 하이쿠의 전통을 튼튼히 이어, 지금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일본의 하이쿠를 모르는 시인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閑さや岩にしみ入蟬の聲
古池や蝰飛こむ水のをと
마츠오 바쇼의 이 두 편 하이쿠는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나 “오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텀벙”으로 번역이 되는데,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모든 하이쿠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두 편의 하이쿠가 독특한 발상, 유머러스한 표현, 동양적인 미 등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나 우리 정서로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두 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만 모아도 두툼한 책이 한 권 만들어질 것이다.
종합대학에 거의 빠지지 않고 있는 일어일문학과에는 일본 시를 전공하는 교수가 있고, 그 교수는 대체로 하이쿠를 연구하여 논문을 쓰고 저서를 출간한다. 즉, 이 땅에는 하이쿠 연구가가 대단히 많다. 중앙대 도서관에도 하이쿠를 연구한 국내 학자의 책이 열 권이 넘게 비치되어 있다. 그중 이어령의 『하이쿠의 시학』은 원래 일본어로 집필되어 일본에서 간행되었던 책이다. 이 책에는 시쿠라이 요시미츠(櫻井能充, 1769~1852)의 하이쿠 작품이 한 편 예시되어 있다.
椿落ち鷄鳴き椿又落つる
이것을 “동백꽃 지고 닭이 울고 동백꽃 또다시 지고”라고 번역한 이어령은 이 작품에 대해 장문의 평설을 쓴다.
닭이 우는 소리와 동백꽃이 지는 것과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그러나 닭도 동백꽃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인 봄날의 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화창한 봄날의 햇살이 조용한 뜰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모든 것이 꾸벅꾸벅 조는 듯이 보인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간혹 동백꽃이 떨어지는 그 정지된 시간과 공간에 한순간 잔물결이 인다. 그리고는 다시 정지된 공간, 흡사 끊겨 정지된 영화의 화면 같은 공간으로 돌아간다.
화창한 봄날의 뜰은 고요하기만 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따금 침묵을 깨고 닭이 홰를 치며 운다. 침묵에 감싸여 있던 청각공간을 흔들어 놓은 것은 그 닭 울음소리뿐이지만 그 소리도 멎고 나면 본래의 저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동백꽃은 벚꽃처럼 서둘러 바삐 지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뜸을 들이여 지는 꽃이다. 닭 울음소리도 마찬가지다. 닭은 종달새나 참새처럼 줄곧 지저귀는 것이 아니라 잊을 만하면 목을 빼고 운다. 동백꽃이 지는 템포와 닭이 우는 그 간헐적인 리듬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연결로 바이시츠는 동백꽃이 지는 시각공간과 닭이 우는 청각공간을 하나로 결부시켜 일체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백꽃은 닭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져 가고 있는 것이다.
꽃과 소리와의 결합은 하이쿠가 지닌 뛰어난 시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은 삶의 기쁨이며 또한 덧없이 사라져 가는 슬픔이기도 하다. 특히 지는 꽃은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서로 뒤얽힌 모순을 자아낸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란 생명의 세계에 속해 있다. 정숙, 소리가 없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린다. 시간의 변화를 알리는 종소리는 더욱 그러하다. 「동백꽃 지고」란 하이쿠에서 닭의 울음소리도 크게 본다면 종소리와 같은 것이다. 시간을 알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어 길게 빼면서 우는 점 등이 그렇다.
시각공간과 청각공간이 일체가 되어 인과를 잉태하고 있는 하이쿠의 시적 공간에서 꽃이 진다는 것과 종이 울린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된다. 지는 꽃에 조용히 귀기울이면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온다. 반대로 종소리의 그 울림을 지긋이 보고 있노라면 공기 속에서 향기를 흩뿌리면서 꽃이 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조의 초장 정도 분량밖에 안 되는 시쿠라이 요시미츠의 「바이시츠(梅室)」를 읽고 감동하여 거의 1백 배는 되는 길이의 평을 쓰는 이어령 씨는 대단한 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이 이렇게 고평을 들을 만큼 대단한 작품일까? 하이쿠에 대한 애정의 반의 반만이라도 시조에 기울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조 등장 이전에도 우리 시가 형식은 아주 다양했다.
이 땅에서 시가 처음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노래였다. 한자의 ‘歌’는 노래라는 뜻인데, 고대가요 「황조가」와 「공무도하가」, 「구지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가 아니라 ‘노래’였다. 곡조는 사라지고, 한역된 가사와 그 가요에 얽힌 유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유래는 설화거나 신화 혹은 전설이다.
고대가요의 등장 이후 향가, 고려가요, 가사, 경기체가, 악장, 시절가조(시조), 무가, 민요, 잡가, 판소리, 서도소리……. 우리 문학사를 수놓은 운문문학에는 반드시 歌, 謠, 曲, 樂, 소리 중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 가운데 악장, 무가, 판소리 같은 것은 무진장 길었지만 나머지는 짧았다. 다시 말해 2000년이 넘는 우리 시의 전통은 대체로 그리 길지 않는 노래의 가사였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 서구의 자유시가 유입된 이후, 한국 현대시는 100년의 역사를 지니면서 시가 점점 길어지고 난해해지고 음악성을 잃게 되었다. 이 땅의 시인 중에 전통지향적인 시를 쓴 시인 중에 짧고 우수한 작품을 남긴 이가 많고 서구지향적인 시를 쓴 시인 중에 긴 시를 남긴 이가 많다. 전자의 대표적인 이로 김소월과 서정주를 꼽을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김기림과 임화를 꼽을 수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전문
김소월을 흔히 ‘민요조 서정시를 쓴 시인’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금잔디」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후일」 같은 시는 민요의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아주 짧다. 대표작인 「진달래꽃」과 「산유화」도 결코 길지 않다. 짧기에 외우기 쉽고, 외워짐으로써 애송이 되고, 애송됨으로써 독자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김춘수의 시 「꽃」의 결구)가 되는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는 3ㆍ4조의 민요 가락이다. 그래서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월의 시 가운데 「개여울」 「님의 노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 잊어」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먼 후일」 등 노래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4행으로 된 「귀뚜라미」 「낙천」, 5행으로 된 「깊고 깊은 언약」 「님과 벗」, 6행으로 된 「꿈 1」 「그리워」, 7행으로 된 「가는 길」 등도 짧은 시에 속한다. 4행짜리 시를 보자.
山바람 소리.
찬비 뜯는 소리.
그대가 世上 苦樂 말하는 날 밤에,
순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
-「귀뚜라미」 전문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樂天」 전문
앞의 시는 분위기가 스산하다. 산에 바람이 불고 찬비가 내리고 그대는 내 앞에서 세상 고락을 말하는데 순막(巡幕)집 불도 꺼지고 귀뚜라미가 우니 을씨년스러움의 정도가 여간 심하지 않다. 뒤의 시는 제목이 낙천적(樂天的)의 ‘樂天’인데도 그다지 낙천적이지 않다. 마음을 다잡아도 “꽃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라고 함은 시인의 비극적 세계인식의 결과이므로 제목은 일종의 역설이다. 아무튼 이 시는 한 편의 경구처럼 일목요연하다.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밤
쌓았다 헐었다
긴 萬里城!
-「萬里城」 전문
만리장성이 얼마나 긴가. 성을 쌓는 데 걸린 시간은 또 얼마인가.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고사를 설명한 필요도 없이, 이 시는 이성에 대한 연정을 나타낸 것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그리움과 아쉬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밤을 새우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정을 그린 이 시도 짧기 때문에 명징하다. 김기림은 「기상도」 같은 장시를 쓴 시인이기는 하지만 이런 짧은 시도 썼다.
심장을 잃어버린 토끼는
지금은 어디 가서 마른 풀을 베고 낮잠을 잘까?
-「능금」
이 시의 제목은 능금나무의 열매나 사과의 경상도 사투리가 아닐 것이다. 한자어 능금(綾衾)은 무늬가 있는 비단 이불을 가리키므로 완전히 반대되는 뜻, 즉 역설적인 제목이다. 설화에 나오는 토끼는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북이와 용왕을 속여 목숨을 건지지만 ‘심장을 잃어버린 토끼’ 이야기는 따로 있나 보다. 아무튼 토끼가 심장을 잃었다면 죽은 것인데, 낮잠을 잘 수는 없으므로 이 시는 설화를 찾아내야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서정주의 작품도 그리 길지 않다. 그중에도 「문둥이」 「동천」 「선운사 동구」 같은 시가 특히 짧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문둥이」 전문
한센병 환자에게 아기의 간이 특효약이라는 소문이 한때 돌았었다. 한센병 환자가 정말 아기를 죽여 간을 깨내 먹을까, 라는 상상만으로도 그 환자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그들의 병증이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끔찍한가를 짐작케 한다. 환자들은 이 소문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는 한센병 환자의 고독과 고통, 설움과 절망감을 노래한 것이다. “애기 하나 먹고”는 소문이 불러일으킨 소외감의 은유적 표현이다. 달밤에 남의 눈을 피해 보리밭에 나와 울고 있는 한센병 환자가 그 소문을 믿은 나머지 오히려 죄책감 없이 갓 죽은 아기의 간을 꺼내 먹은 일은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계속)
[출처] 짧은 시의 다양한 모습과 폭넓은 주제(1)|작성자 이승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