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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샤베아브#스페인추방
스페인 유대인들의 비극적 역사
이베리아 반도에 유대인이 정착한 것은 매우 오래된 역사입니다. 15세기 스페인 유대인 지도자였던 돈 이삭 아바르바넬(Don Isaac Abarbanel)은 바빌로니아 정복자 느부갓네살이 제1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을 스페인으로 노예로 끌고 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스페인 유대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소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인들이 예루샬라임의 제2성전을 파괴하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유럽으로 데려갔을 때, 그중 일부는 스페인에 정착했습니다. 이 초기 유대인 정착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박해
서기 409년, 반달족(Vandals)이 몰락하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를 점령했고, 3년 후 서고트족(Visigoths)이 이 반도를 정복했습니다. 이 게르만족 기독교도들 치하에서 유대인 박해법이 제정되었습니다.
587년 레카르드(Recared)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제3차 톨레도 공의회(Council of Toledo)에서 자신의 왕국이 공식적으로 가톨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후, 유대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국가의 종교적 통합에 동참하지 않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고, 이러한 차별은 유대인들을 반복적으로 박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기 612년, 서고트 왕 시세부트(Sisebut)는 끔찍한 선언을 통해 모든 유대인에게 그 해 안에 세례를 받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채찍질, 신체 훼손, 추방, 재산 몰수"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했고, 남은 많은 유대인들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비밀리에 유대교를 계속 믿었습니다. 7세기에 유대인을 겨냥한 여러 추가 칙령이 발표된 것을 보면, 개종한 유대인들이 모두 개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칙령들은 일관성 있게 시행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슬림(Muslim) 통치와 스페인의 황금기
서기 711년, 무어인(Moors)으로 알려진 무슬림 병사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로 건너왔습니다.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iyad) 장군은 거의 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해협을 건너 자발 타리크(Jabal Tariq, 타릭 산)라고 불리는 곳에 상륙했는데, 오늘날 지브롤터(Gibraltar)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어인들은 기독교 서고트족 병사들과 교전하여 결국 그들의 군주인 로데릭(Roderick) 왕을 죽였고, 이로써 스페인에서 무슬림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그토록 심하게 박해했기에, 유대인들은 8세기에 무슬림 정복자들을 환영했습니다. 톨레도(Toledo)의 유대인들이 도시의 "문을 열고" 무슬림 정복자들을 환영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놀랍게도, 정복당한 코르도바, 말라가, 그라나다, 세비야, 톨레도 도시들은 무어인 침략자들이 무장시킨 유대인 주민들의 지배하에 한동안 놓이기도 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스페인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새로운 땅에 정부나 사회 기반 시설을 효과적으로 구축할 역량은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아랍 지도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복종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에게 통치, 투자, 정책 결정의 지도적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최고위 관리 중 일부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무슬림 통치하에서 스페인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었고, 유대인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온 유대인들이 스페인으로 이주했습니다. 스페인은 세계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스페인의 황금기로 알려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성공 외에도 경제적으로도 번영했습니다. 전 세계 유대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무역을 통해 스페인을 발전시키는 데 자연스럽게 선택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무슬림 세계와 기독교 세계는 전쟁 중이었고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극동, 중동,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무역을 촉진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뛰어난 의사들이었으며, 스페인의 비유대인과 유대인, 그리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의료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의사로는 마이모니데스, 나흐마니데스, 헤로나의 랍비 니심, 그리고 랍비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있습니다. 스페인 유대인들은 또한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유대인들이 토라 연구에 뛰어났다는 점이며, 당시 뛰어난 토라 지도자들 중 다수가 스페인에 거주했다는 점입니다.
스페인에서 살면서 토라를 가르쳤고 오늘날까지 연구되고 있는 위대한 학자들로는 랍비 이츠하크 알파시, 리 미가쉬, 람밤, 람반, 라쉬바, 리트바, 랍비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 랍비 바키아 이븐 파쿠다, 랍비 예후다 할레비가 있습니다.
실제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상황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유대인의 상당 부분이 "스페인인"을 뜻하는 세파르디(Sephardi)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주요 그룹은 나중에 "독일인"을 뜻하는 아슈케나지(Ashkenazi)로 알려지게 됩니다.
11세기 유대교 학자인 랍비 바키아 이븐 파쿠다(Bachya ibn Pakuda)의 주요 저서인 《코보스 하-레바보스( Chovos ha-Levavos, 마음의 의무)》 서문에서 세파르디는 무슬림 지역에서 온 유대인이고 아슈케나지는 기독교 지역에서 온 유대인으로 정의합니다. 수많은 무슬림 지역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가장 중요하고 선도적인 유대인 공동체로서 두드러졌기 때문에 구별 대상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유대인들 덕분에 무어인들은 스페인 정복 후 한 세기 만에 코르도바(Cordoba)를 중심으로 유럽의 어떤 문명도 능가하는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8세기 말, 코르도바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문화가 풍부한, 발전된 지역이었으며, 수 세기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스페인의 유대인 지도자들
912년경, 압둘 라흐만(Abd-ar-Rahman) 3세는 랍비 하스다이 벤 이삭 이븐 샤프루트(Chasdai ben Isaac ibn Shaprut)를 궁정 의사이자 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스다이 랍비는 뛰어난 외교술과 탁월한 의학적 지식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정부에서의 역할 외에도, 하스다이 랍비는 스페인에 토라 교육원을 설립하고 지원한 토라 학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메나헴 벤 사루크 랍비, 두나쉬 벤 라브라트 랍비, 그리고 다른 유대 학자들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랍비 슈무엘 하나기드(Shmuel HaNagid)는 위대한 랍비 하녹(Chanoch)의 제자였으며, 하녹은 랍비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 생전에 전설적인 "네 명의 포로" 중 한 명으로 코르도바에 어린 시절 데려왔습니다. 랍비 슈무엘은 아랍어, 문법, 문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유창한 이해력으로 결국 재상(zizier)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정부 업무에도 관여했지만, 번영하는 공동체의 랍비, 그라나다 예시바의 원장, 그리고 유대 학자들의 후원자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랍비 슈무엘 하나기드는 1055년 그라나다에서 사망했으며,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의 아들 요셉 하나기드(Yosef Hanagid.)가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황금기의 종말
무슬림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성공과 번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와 스페인 왕국들의 지배권을 놓고 기독교인들과 싸우면서 스페인의 황금기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에서 이슬람 통치가 지속되었지만, 반도는 각각 통치자를 둔 수많은 작은 무슬림 왕국들로 분열되었고, 이 작은 왕국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무슬림들이 더 이상 단결하지 못하게 되자, 기독교 군대가 반도에 거점을 확보했고, 결국 무어인의 패권은 붕괴되었습니다.
무슬림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유대인에게 관대하고 존중하던 지역에서도 반유대주의가 동시에 고조되었습니다. 1066년, 슈무엘 하나기드(Shmuel Hanagid) 랍비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1년 후, 무슬림 폭도들이 그라나다 왕궁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인 재상 요셉 하나기드(Yosef Hanagid) 랍비를 살해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도시 유대인 대부분을 학살했습니다. 그라나다 학살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단 하루 만에 1,500가구 이상의 유대인 가족이 살해당했습니다.
1090년, 모로코에서 온 무슬림 종파인 알모라비드(Almoravids) 왕조의 침략으로 무슬림 지배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알모라비드 왕조 치하에서도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1148년, 더욱 극렬한 알모하드(Almohads) 왕조가 스페인을 침략하자 유대인들은 강제로 피난을 가거나, 살해당하거나, 이슬람교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알모하드 왕조는 스페인 내 유대인 재산을 몰수하고, 유명한 유대인 교육 기관을 폐쇄하고, 전국의 유대교 회당을 파괴했습니다. 알모하드 왕조를 피해 피난한 유대인 중에는 람밤(마이모니데스)과 그의 가족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초기 기독교 통치 - 관용적이었지만 지속 기간이 짧았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기독교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톨레도 정복자 알폰소(Alfonso) 6세(1085)는 유대인들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과 동등한 대우를 제공하고 귀족에게 부여된 권리를 부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부유하고 근면한 유대인들을 무어인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부여한 권리와 알모하드 왕조에 대한 적대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왕의 군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4만 명의 유대인이 복무했는데, 이들은 검고 노란 터번을 두른 것으로 다른 전투원들과 구별되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왕의 편애가 너무나 명백해지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VII)는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13세기 초, 유대인들의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1212년 가톨릭 신자들이 톨레도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을 일으켰고, 이는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어 유대인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유대인에 대해 점점 더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1250년 4월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 IV)가 발표한 교황칙서는 스페인 내 유대인들이 특별 허가 없이 새로운 회당을 짓는 것을 금지했고, 유대교로의 개종을 불법화했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다양한 형태의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유대인 게토(Juderia)에서 따로 살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바르셀로나 분쟁-1263
아라곤(Aragon)의 제임스 왕(King James)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 군주는 유대인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개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1263년, 제임스 왕은 도미니코회(council of Dominican)와 유대교 성직자들로 구성된 특별 회의를 소집하여 세 가지 핵심 신학적 쟁점, 즉 메시아가 이미 나타났는지, 메시아가 신인지 인간인지, 그리고 어떤 종교가 진정한 신앙인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뛰어난 학자이자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람반(나흐마니데스,Nachmanides)은 유대인들을 대표했고, 배교한 유대인인 파블로 크리스티아니(Pablo Christiani)는 교회를 대표해야 했습니다. 람반은 이 논쟁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논쟁 후 제임스 왕은 람반에게 금화 300개를 주며, 그토록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훌륭하게 변호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람반은 더 이상 스페인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여 1270년에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악화된 상황 - 학살과 강제 개종
1369년 헨리 2세(Henry II)가 왕위에 오르면서 유대인들에게는 고통과 박해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헨리 2세는 유대인들을 정치적, 재정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약화시키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궁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공직에 취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노새를 타는 것을 금지하고,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뚜렷한 배지를 착용하도록 했으며, 무기를 소지하거나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1379년 요한 1세(John I)의 통치 하에서, 정부가 유대교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교회에 반하는 기도문을 바꿔야 했고, 비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1390년 요한 1세가 사망한 후, 스페인 전역에 혼란이 확산되어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수많은 공격이 발생했습니다. 폭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유대교 회당은 파괴되었으며, 수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습니다. 6월 6일, 폭도들은 세비야(Seville)의 유대교 회당을 공격하여 4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죽음을 면할 유일한 방법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입법 측면에서는 유대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예속시키기 위해 반유대주의 법률이 통과되었고, 이는 유대인들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법률에 따라 유대인들은 의료 행위, 빵, 포도주, 밀가루, 고기 판매, 수공예품 판매, 어떤 형태의 무역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 공직 취임이나 환전상 활동도 금지되었고, 무기 소지, 기독교인 하인 고용, 선물 제공, 기독교인 방문도 금지되었습니다. 수염을 깎거나 머리를 자르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나라를 떠나 곤경을 끝내는 것조차 절대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법률들은 유대인들을 굴욕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스페인 왕국 전체가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규칙들은 의도치 않게 거의 모든 상업과 산업을 마비시켰고, 국가의 재정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토르토사(Tortosa)의 대논쟁: 끝이 보인다
1413년, 극렬한 반유대주의 설교자 빈센트 페레르(Vincent Ferrer), 스페인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 XIII), 그리고 유대계 배교자 예호슈아 할로르키(Yehoshua HaLorki)는 스페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개종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교황이 주재하는 가운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대규모 토론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기독교 대표단이 승리하여 패배한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로 하였습니다.
나흐마니데스(Nachmanides)가 스페인 유대인들을 성공적으로 변호했던 논쟁과는 달리, 토르토사 논쟁은 기독교인들에게 뚜렷한 편향을 보였습니다. 기독교 측이 항상 최종 결정권을 가졌고, 재판관 역할을 맡은 왕은 유대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솔직한 토론을 꺼렸습니다.
토론은 1년 넘게 이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들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대표들에게 주장을 자제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토론을 계속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네딕토(Benedict)는 토론이 끝난 후 승리를 선언했고, 탈무드는 압수되어 불태워졌습니다.
이 논쟁은 유대인들이 살던 스페인에 큰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15세기 중반, 많은 스페인 유대인들은 유대인 공동체가 더 이상 스페인에서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안을 찾던 유대인들은 1473년,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한 안식처로 지브롤터(Gibraltar)를 왕에게 매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Ferdinand and Isabella)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지지했던 군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유대인 역사에서는 그들이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추방한 통치자로 기억됩니다.
1469년 아라곤(Aragon)의 페르난도 5세(Ferdinand V)와 카스티야(Castile)의 이사벨 1세( Isabella I)의 결혼은 스페인을 통일하고 여러 지방으로 이루어진 연합체에서 강력한 왕국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왕실 결혼은 부유하고 학식이 풍부한 유대인 지도자 아브라함 시니어(Abraham Senior)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스페인에서 추방당하는 대신 149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사벨라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교황과 협력하여 1478년 기독교 세계의 이단을 색출하고 퇴치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립했습니다. 종교재판소 설립을 위한 왕실 칙령에는 종교재판소가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비밀리에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고 유대교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기독교에 위배되는 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집단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므로, 이 칙령의 주요 대상은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했습니다.
종교재판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로 정식 개종하지는 않고, 비밀리에 유대교를 실천하는 유대인들을 적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개종한 유대인들을 "옛(진정한) 기독교인("Old (authentic) Christians)과 구별하기 위해 "새 기독교인("New Christians)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경멸적으로 "개종자"를 뜻하는 콘베르소스(conversos) 또는 더 나쁘게는 "더러운 돼지"를 뜻하는 마라노스(Marranos)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483년,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Tomas de Torquemada)가 대심문관(Grand Inquisitor)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종교재판소는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토르케마다는 종교재판 절차를 수립하여 새로운 지역에 법원을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유대인의 유대교 관습 준수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도록 장려했습니다.
토요일에 굴뚝 연기가 나지 않았다는 점(가족이 은밀하게 샤밧을 지키고 있을 수 있다는 신호), 유월절 전에 채소를 많이 샀다는 점, 또는 콘베르소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다는 점 등이 증거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법원은 신체적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추방(The Expulsion)
1492년은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이었던 그라나다( Granada)가 함락된 해였고,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스페인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해였습니다. 추방을 명령한 악명 높은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은 1492년 1월에 발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군주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 아니라, 한 번도 개종한 적이 없는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추방령에 명시된 주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콘베르소들을 재 유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무슬림과의 전쟁 이후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자금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자금을 확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이 남겨둔 재물과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중세 유럽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유럽 국가들이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빚을 갚고, 강제로 쫓겨난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돈 이삭 아바르바넬(Don Isaac Abarbanel)이 이끄는 유대인들은 칙령을 철회하려 했습니다. 아바르바넬은 위대한 토라 학자이자 저명한 랍비였으며, 스페인의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이었던 그는 추방령을 철회하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군주들에게 유예 조건으로 30만 두캇(ducats)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군주들에게 칙령을 철회하도록 하는 데 거의 성공했지만, 대심문관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Tomas de Torquemada)가 그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전설에 따르면, 이사벨라 여왕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토르케마다가 랍비 아바르바넬이 자신의 변론을 하고 있던 방에 들어왔습니다. 격분한 그는 여왕 앞에게 십자가를 던졌고 "유다가 그의 주인(예슈아)을 은화 30개에 팔았는데, 이제 와서 그를 다시 팔겠다는 거냐!"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과 함께 아바르바넬의 변론은 기각되었고, 칙령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돈 이삭 아바르바넬은 군주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군주들은 그에게 개종하지 않고 스페인에 남을 수 있는 특별 면제를 제안했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미니안(minyan)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아홉 명의 유대인을 더 데려와 함께 머물 수 있다는 조건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스페인 유대인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스페인 유대인 공동체가 종식되고 유배 생활을 시작한 날짜는 1492년 8월 2일이었습니다. 원래 날짜는 7월 31일이었지만, 토르케마다(Torquemada)는 며칠을 연장하여 의도치 않게 아브월 9일인 티샤 베아브에 해당하는 날짜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날은 예루샬라임의 제 1성전과 제 2성전이 파괴된 날이었고, 유대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유배 생활이 수백 년 전의 유배 생활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떠날 때, 아바르바넬은 티샤 베아브일지라도 유대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개종에 동의하며 스페인에 남기로 했습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의 수는 대략적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역사가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를 제시합니다. 역사가 후안 데 마리아나(Juan de Mariana)는 80만 명, 돈 이삭 아바르바넬(Don Isaac Abarbanel)은 30만 명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 대부분은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5년 후, 포르투갈은 자국 내 유대인들에게 개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고, 탈출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터키로 향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Bayezid II)는 그들을 환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바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보물을 모두 가져가서 나에게 보냈으니까요."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신대륙으로 가기를 선택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92년 8월 3일, 추방 다음 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의 유명한 탐험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폐하께서 모든 유대인을 왕국과 영토에서 몰아내라는 칙령을 내리신 바로 그 달, 그들은 나에게 충분한 병력을 거느리고 인도 대륙 탐험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사적 탐구를 통해, 우리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추방 사이에 더 깊은 연관성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가 끝나갈 무렵, 하나님은 박해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장소, 즉 신대륙(미국)을 건설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수백 년 후인 1834년, 종교재판이 폐지되어 유대인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방령은 1968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습니다. 즉, 1868년부터 1968년까지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개인으로 거주할 수는 있었지만, 공동체로서 유대교를 실천할 수는 없었습니다.
홀로코스트 기간의 스페인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스페인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나치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대인 추방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25,600명의 유대인이 나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로 스페인을 이용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스페인 외교관들은 상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발칸 반도에 있는 약 4,000명의 세파르디 유대인을 보호했습니다. 또한 1944년에는 헝가리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2,750명의 난민을 수용하여 부다페스트 유대인 구출에 기여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은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유대인을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스페인에 프랑코 자신을 포함해 "유대인" 혈통의 많은 사람이 있었고, 나치가 그들을 포고령에 포함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 반유대주의
스페인에는 반유대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 가입 조건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반명예훼손연맹(Anti-Defamation League)과 퓨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들은 여전히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더 많은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품고 있습니다.
스페인 문화권 안에서도 수 세기 전부터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가 엿보입니다. 예를 들어, 레온(León)에서는 레모네이드에 '마타르 후디오스 (matar judíos, 유대인을 죽이다)'라는 붉은 와인을 섞어 마십니다. "건배" 대신 "우리는 유대인을 죽일 것이다"라는 지역 속담도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은 카스트리오 마타후디오스 (Castrillo Matajudios, 카스트리오, 유대인을 죽이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마침내 2014년에 이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날의 스페인과 남겨진 교훈
현재 스페인에는 약 4만 5천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리고 스페인 남부에 거주합니다.
스페인 의회는 2015년 6월 11일, 종교재판 기간 동안 추방된 세파르디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시민권을 회복하는 조치를 승인했습니다. 이 법은 1492년 추방된 이들의 친척들이 이중 국적을 신청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현재까지 3만 6천 명의 유대인이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스페인의 비극적인 역사는 유대인의 고향이 결코 망명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실제로 스페인의 황금기는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조금은 빛바랜 시대였습니다. 황금기 시대에 살았던 랍비 예후다 할레비는 "몸은 서쪽에 있지만 마음은 동쪽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By Rabbi Menachem Levin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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