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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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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한국 |
분야 | 소설 |
해설자 | 진영복(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
알게 모르게 일제 강점기는 수탈, 억압, 부자유라는 개념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이 충분하게 표현되고 이에 저항하는 도시락 폭탄 투척과 같은 장렬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이 시기 소설에서 드러나기를 독자들은 머릿속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투영된 소설을 읽고 난 후 일상의 생활로 돌아오면 독자들은 소설의 세계와 아무런 접점 없이 깨끗하게 분리되고 만다. 지금의 일상적 감각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수탈과 억압이 드러난 작품들을 현재와 단절된 특수한 시대의 것으로 치부하고 재미없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은 이중으로 소외된다. 민족과 독립을 강조한 작품이 중심을 이루어 그 외의 작품이 소외되고, 이렇게 선정된 작품마저 지금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이다.
지금의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게 하려면 일제강점기가 예외적인 세계가 아님을 입증하고 그 시기의 일상과 생활 속에 드러난 삶의 혜안과 감각을 보여주는 비평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식민지의 억압성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일관되게 그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 세계는 거대 담론의 영역에서 밝히고 있는 ‘언표’로서가 아니라 갈등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미묘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생활 세계는 명쾌한 논리로 추상화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며 갈등하고 반복하다가도 망각되고 다시 각인되는 일종의 퇴적층과 같은 것이다. 이 와중에서 어느 순간 확연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회귀성, 직선으로만 나아가려는 ‘의도’나 ‘의지’가 아니라 실패와 욕망과 분열과 상극이 혼효되어 켜켜이 쌓여 미세한 경계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생활 세계다.
따라서 생활 세계는 자기 의지나 의도를 명백하게 밝힌 논리적 명시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 미세한 의도, 분열되는 지점, 이질적인 것들이 융합되어 의외의 문제를 드러내는 곳이다. 이곳은 전체성를 대표하는 어떤 전형으로 파악될 수 없고, 하나의 경험이나 사건으로 개별화하여 나타나는 구체성 속에 많은 함의를 지니고 있는 특수한 영역이다. 특히 소설은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기억과 정보가 아니라 생활 세계를 통해 독자와 작가가 대화하는 매체다. 소설은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혹은 그 안에 투영된 시대적 상황과 무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대하는 실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진오의 일제 말 소설들은 지금의 독자와 소통하며 공유하는 힘을 보여주면서도, 문화와 자유를 옹호하고 민족의 앞길을 헤아려보는 섬세한 흔들림과 생활 세계를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유진오는 “오늘날의 정세에서 섣불리 미숙한 철학을 내두르니보다는 편편한 시정의 사실 속으로 자신을 침체시키는 것이 훨씬 위대에의 첩경”(<조선 문학에 주어진 새 길>, <동아일보>, 1939. 1. 13)이라며, “이상형의 세계를 탈출하여 넓은 속물의 세계로 산보를 나서는” 시정 편력을 자신의 창작 방법으로 삼는다고 선언한다. 시정 편력이라는 생활 세계로 침잠한 유진오의 소설은 식민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생활 감각과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경>(1942. 10)은 주인공이 학생들의 취직자리 알선을 위해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출장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훌륭한 근대도시가 된 신경과 새 만주에 대한 호기심도 있는 터여서 행한 출장이다. 신경의 웅대한 근대도시 속에 우뚝 선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을 바라보며, 동양이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한다.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국=괴뢰국’이라는 후세의 평가와 달리, 이 소설에서 유진오는 만주국을 새로운 기회의 공간으로 판단한다. 그 이유는 “개인 및 그것을 기초로 한 국가에서 세계국가로 비약하기 전에 현 국가를 초월하는 그러나 지역적인 단체 개념이 탄생”(유진오, <문화의 위기와 그 초극>, <조선일보>, 1939. 5. 10∼5. 13)해야 한다는 시대인식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아(東亞)의 지역을 블록화하는 동아협동체를 먼저 수립하고 지역 블록화의 단계를 넘어 궁극적으로 세계국가를 만들어 전쟁과 분열, 수탈과 착취가 없는 이상세계를 이루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 동아협동체를 통해 서구의 개인주의가 갖고 있는 탐욕, 또 이 탐욕이 국가로 결집하여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서구의 제국주의로부터 동아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담론은 계급적인 차별과 전쟁으로 점철되는 근대적 모순을 초극하고자 한다는 탈근대적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어 당시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상당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동아 해방과 평등한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이 담론이 만주국의 생활 세계 속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갈 때 뜻하지 않은 모순과 괴리를 보여주는 지점이 만주국에서 피식민지인인 조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만주국 내에서 조선인은 소위 2등 국민, 일본인 다음의 계급으로 차별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만주국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보다 좋은 대접을 받는 모순적인 위치에 서 있다.
한 가지는 조선 사람을 만주 사람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오, 한 가지는 내지인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중략)어떤 중역은 조선 사람은 책임감이 없고 웃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건방지게 군다고 한 시간이나 통론하였다. 그 반대로 어떤 관리는 같은 일본 사람을 가지고 내지인이네 조선 사람이네 구별할 것이 무엇 있느냐,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우리 조국(肇國)의 정신 아래는 동아 십억의 민중이 한집안 식구요, 나아가서는 왼 세게가 다 한이웃인 것이니, 허물며 조선과 내지 사이랴.
위 인용문에서 중요 회사간부와 고급 관리들이 조선 사람을 상반된 시각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철폐를 소망하면서 조선인을 만주(중국)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중일전쟁 이후 격화되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이에 따라 중국 민중을 압박한다는 문제의식 없이, 조선인을 만주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민족 차별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 차별을 수용하는 태도다. 이처럼 동아협동체론은 동아의 신질서, 서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민족 차별적인 본성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동아협동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동아협동체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하나의 외부 환경으로 관조적으로 파악한다. “살어 있다는 오즉 그 간단한 사실에 대해, 철이 그처럼 행복과 감사를 느낀 것은 처음 일이었다”며 허무에의 의지를 극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결말은 불리한 정세와 환경으로 인해 실현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이상을 괄호 친 채 생활 세계의 비루함을 견디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만주는 생활 세계의 외연적인 확장일 뿐이며, 조선인과 만주인의 차별 역시 비루한 생활 세계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창랑정기>(1938. 4. 19∼5. 4)는 당인리 부근 한강가에 세워진 창랑정이라는 정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조판서 벼슬까지 지내던 화자의 증조부 서강 대신이 세상에 거리를 두며 이 정자를 사서 말년을 보냈다. 어린 화자는 서강 대신의 위엄과 기개 그리고 그 정자의 규모에 놀란다. 어린 화자는 그곳의 뜰에서 칼집이 다 썩었으면서도 날은 형형한 칼을 발견한다. 이 칼이 세상의 변동과 정세에 따라 그 쓰임새를 감추고 땅속에 묻혔듯이 창랑정의 날 선 칼날과 같았던 그 기개와 예리한 위엄이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고, 화자는 전한다. 창랑정이 몰락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서강 대신은 조정에서 ‘양이(洋夷)’ 배척을 주장하던 그 뜻 그대로 손자에게 신교육을 시키기를 거부했다. 서강 대신을 비롯한 어른들이 돌아가시자 그 손자는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기생 오입을 시작했고 결국 창랑정을 팔고 낙향했던 것이다. 화자가 창랑정의 추억을 찾아 그 집을 찾아 나섰으나 “창랑정이 있던 듯이 생각되는 곧에는 낮모르는 큰 공장이 있어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근대화라는 거대한 흐름은 창랑정 아래 검은 강물처럼 한 개인의 기개나 위엄 같은 것을 소리도 없이 삼켜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에 착목하지 않은 채 근대와 전통이라는 보편적인 문명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서강 대신이 반일의 기치에서 세상과 등을 진 것이 아니라 ‘양이’의 신념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은 반서구화 혹은 반근대화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뭇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기”가 요란히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하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문제적이다.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일전쟁의 의미 맥락은 생략한 채, ‘대륙의 하늘을 뭇찌르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 대 비문명의 대비 속에 팽창하는 근대화의 과정으로 대륙과 만주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봄>(1940. 1)은 어린 아들이 성홍열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입원한 상황에서 그 병세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포착했다. 또한 벚꽃의 흥성스런 화사함과 병원 안의 병자의 고립감의 대비를 통해 생명력과 죽음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생명력과 죽음은 서로를 수용할 수 없는 양극단에 있지만, 삶의 과정에서 이 둘은 서로 나선처럼 꼬여 있다. 그러기에 화사한 생명력은 언제나 견딤과 극복을 거쳐왔거나 우연하게 죽음을 맞닥뜨리지 않은 행운의 증표다. 비일상적으로 격리된 근대적 병원이라는 공간은 생명과 죽음의 중간지대로 병이 완치되면 생활 세계로 나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소멸의 세계로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소설 속의 공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밤 벚꽃놀이가 한창인 창경원과 생활 세계에서 일탈되어 생사의 고투를 벌이고 있는 경성제국대학 병원, 두 공간 모두 일상세계로부터의 격리된 일회성의 근대적 공간이지만, 한쪽은 환락과 유희로 삶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부풀리는 곳이고 한쪽은 생명의 에너지를 회복하고 확충하기 위해 애쓰는 곳이다. 벚꽃의 흰색과 병원의 흰색은 서로 같지만, 벚꽃의 흰빛은 몽환적으로 에너지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오르는 벡터(힘의 방향)를 지녔다. 그러나 병원의 흰빛은 생명 연장에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불필요한 모든 것을 차단하여 하향하려는 생명의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묶어두는 일종의 괄호 같은 정지와 버팀목의 이미지다. 그런데 창경원의 봄바람은 그 발현 양상은 다르지만 간호사에게도, 회복하기 어려운 병을 앓아 의식이 없는 환자를 둔 사내와 ‘쓰키소이’에게도 그 발현 양상은 다르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명의 에너지는 봄바람과 함께 임과 사랑을 그리워하는 원초적인 곳으로 응집한다. 병원의 흰 공간 속으로 벚꽃의 흰빛이 틈입해서 “일상 물큰 하고 코를 찌르던 소독약 내도 무엇도” 맡을 수 없는 것이다.
<가을>(1939. 5)은 일상 세계를 산책하면서 사색하는 새로운 유형의 산책자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어젯밤부터 오늘 밤의 귀가까지 만 하루 동안 주인공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하루라는 시간 체계는 전근대적 일상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일상의 확실한 분절적 매듭이 되었다. 또한 회상과 기억을 통한 서술 방법은 하루라는 시간 체계 속에서 삶의 중요한 반성을 하고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산책자 ‘기호’는 어젯밤에 경석이라는 친구 송별회에서 동경 유학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지금 삼십대 청년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무슨 무슨 운동을 한다고 하다가 고생도 여러 번 해”본 친구들이다. 이들은 이제 광산의 브로커로, 돈 안 되는 잡지사 운영으로, 신문기자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중 경석이란 친구는 이러한 생활 세계를 비루하게 여기고 경성을 떠나 유랑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호는 여러 해째 소모병(消耗病)과 싸우고 있는데, 이 병은 신진대사에 필요한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어 면역력 체계가 극히 허약해지는 물리적인 특징을 지녔다. 이 병은 자신의 이상에 맞지 않는 식민지 자본주의적 생활 세계에 대한 ‘면역력 결핍’으로 빚어지는 무력함을 상징한다. 기호는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꿈 많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게 되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 답답한 마음에 산책에 나선다. 우리의 전통은 쓰레기통 속같이 더럽고 지저분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창경원 처마의 선에서 ‘조선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화가 친구 집에서 유성기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일본식 축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만주에서 수상스러운 장사를 해 큰돈을 잡은 친구와 원치 않은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 다양한 생활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한 후, 귀가를 위해 탄 인력거는 옛날에 자기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던 수남 아범이 끄는 것이었다. 그의 삶을 보면서 “사람의 일생이란 이렇게도 허잘 것이 없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을 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옛날의 그의 꿈은 정말로 젊은이의 아름다운 무지개에 지나지 않었던가” 하는 의문에 휩싸인다. 그러나 자신을 기억하고 알아주는, 사소하다고 할 관계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을 깨닫는다.
이처럼 이 소설은 시대의 압박으로 생활 세계에서 그 꿈을 확산시키지 못한 채 실존의 기억과 가치관 속으로 그 꿈을 유폐시키는 생활 부적응의 문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화자는 꿈을 꾸었던 젊은 시절을 회의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자신이 믿는 가치를 되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 유랑을 떠나는 친구처럼 빈궁과 낭비로 삶을 메마르게 하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생활 세계의 황폐함을 보고 젊은 시절 추구했던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식민지 생활 세계를 살아가는 지식인 유진오의 시대와 정세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보았다. 생활 세계는 정신과 이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신체와 감각의 세계를 포괄하며, 순간의 일회성과 직선지향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뒤섞여 흐르는 와류 같은 것이다. 유진오 소설은 지향하는 이상과 가치의 세계를 생활 세계 속에 접합하고 실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분열과 균열의 틈새를 보이지만, 이 틈새 속에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문화와 자유의 가치를 견지하는 굳건한 생명력이 섬세한 흔들림으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