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지증왕의 거대한 그것]
[순장 폐지]
[지증왕의 개혁]
[우산국 정복]
[법흥왕의 중앙집권개혁]
[이차돈의 순교]
[금관가야 정복]
[진흥왕의 국사편찬]
[우륵과 가야금]
[정복군주 진흥왕]
[대가야 정복]
[화랑제도]
[진지왕]
[진평왕대의 태평성대]
[세속오계]
[찬덕과 해론]
<라봉봉>
소지왕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소지왕의 재종(6촌) 동생 김지대로가 왕위를 이어
신라 22대왕 지증왕(지증 마립간) 이 되었습니다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고
그가 왕위에 오를때 그의 나이 64세였습니다
지증왕은 체격도 크고 성기의 길이가 27~34.5cm 나 되어서
(이에 별명이 ['왕자지' 증왕 ;;] )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신하들을 전국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습니다
한 신하가 모량부에 이르렀는데
한 나무 아래에서
개 두마리가 크기가 북만한 거대한 똥덩어리를 양쪽에서
물고 다투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소녀는
<어떤 소녀>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은밀히 숲속에 눈 것입니다
라고 했고
신하가 그 집을 찾아가보니
과연 172cm 의 거대한 처녀가있었고
신하는 급하게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
지증왕은 처녀의 집에 수레를 보내서
궁중으로 불러서 왕비로 삼았습니다
지증왕의 거대한 그것은
왕의 권위와 훌륭한 지증왕의 모습을 상징한다 합니다
지증왕은 순장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순장이란 왕이나 귀족 , 권력자가 죽을 때
그의 무덤에 생전 그를 모시던
노비 , 여종들을 함께 죽여 묻거나 무덤에 같이 생매장시키는 악습(악한 관습)이자 인신공양이었고
중국 , 한국 ,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성행했던 악습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신라에서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명씩 순장했는데
지증왕때에 와서 폐지됬습니다
신라는 이로인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갈등하지 않고
서로 화합하게 됩니다
지증왕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토록 했고
이때부터 신라는 사람힘이 아닌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짓는
'우경' 이 시작됩니다
어느날
신라 신하들은 지증왕에게 말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정하지 못한 채
사라 , 사로 , 신라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은
신 (新 새 신) 은 덕업이 나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으로 ,
라 (羅 그물 라) 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 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임금을
모두 황제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우리말(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로서 왕호를 삼았을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신하들이 한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 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지증왕은 신하들의 말을 따랐고
이로서
이전까지 계림 , 사로라고도 불린 신라는
'신라' 로 국명이 고정되었고
또한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신라왕은
'왕' 이라는 칭호로 고정됩니다
지증왕은 이로인해
신라 마지막 마립간이었으며
신라에서 왕이라는 '왕호' 를 ,
지증이라는 '시호' 를 처음 사용한 왕이었습니다
지증왕은 상복법을 제정해
관리들의 옷을 고정시켰고
얼음을 저장시키고
선박 이용을 제도화시켜 항해술을 발전시켰고
시장을 설치에 상업을 발전시킵니다
이후 지증왕은
이사부 장군을 보내서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정복하는데
우산국은 험한 동해바다에 있음을 믿고서
신라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사부 장군은
<이사부>우산 사람들은 우둔하고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
이에 이사부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서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도착해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이사부>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
우산국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했습니다
지증왕이 사망하자
지증왕의 맏아들
태자 김원종이 왕위를 이어서
신라 23대왕 법흥왕이 되었습니다
법흥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법흥왕은 병부(오늘날 국방부)를 설치해 군사를 길렀고
율령을 반포해 신라를 부족국가에서 업그레이드 시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고
법흥왕은 처음으로 관리들의 관복색을 제정해서
왕족과 고위 귀족은 보라색 ,
그 다음은 빨간색 ,
그 다음은 파란색 ,
그 다음은 노란색 옷을 입게 했습니다
참고로 인공염색기술이 나오기전까지의
보라색은 같은 무게의 금값수준으로 비쌌는데
19세기 화학염료 합성이 생기기전까지
보라색은 자연에서 극소량 나는 엄청나게 구하기 어려운 염료였기에
동서양 할것 없이
보라색은 최상위층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해
로마에서도 카이사르나 예수 등에게만 허락되었던 색이었고
백제왕복도 보라색 , 신라 왕실 , 귀족들의 옷도 보라색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신라에서는 무속신앙 , 무당을 믿고 있었는데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에서 불교가 알음알음 전해지기 시작했고
불교식 향을 태우며 기도하는 것이 유행합니다
불교에서는 실제 향태우기는 악취제거 및 살균에 효과가 있다 합니다
불교의 영험함이 드러나게 되자
법흥왕은 신라에서 불교를 흥하게 (불법을 흥하게해서 법흥왕임) 하려했는데
이전부터 신라에서 뿌리깊게 자리매김한
토착 기득권인 무속신앙 , 무당들의 반발과
그것을 믿는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기에
법흥왕은 난처해집니다
이때 법흥왕과 가까운 신하였던 이차돈은
<이차돈>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으소서
이에 법흥왕은
<법흥왕>불도를 흥하게 하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에 이차돈은
<이차돈>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법흥왕은 결국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모든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신하들>요즘 중들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에 이차돈은 홀로
<이차돈>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법인데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법흥왕은
<법흥왕>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해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고 말하고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차돈은 목이 베어지기 전에 말했습니다
<이차돈>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젖 색같은 흰 피가 솟아나왔고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차돈의 순교와 여러 진통끝에
결국 신라는 법흥왕때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금관가야왕 김구해는
세 아들과 함께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했습니다
(법흥왕의 금관가야 정복)
법흥왕은 이들을 예의로서 대우해
높은 직위를 주었고
특히 마지막 가야왕자이자 김구해의 셋째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큰 장군이 되었고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법흥왕이 사망하자
법흥왕의 동생 김입종의 아들
김삼맥종이 왕위를 이어
신라 24대왕 진흥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진흥왕의 나이가
7살이었기에 왕태후가 섭정했습니다
이사부 장군은 진흥왕에게 말했습니다
<이사부>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
이에 진흥왕은 깊이 동감하고
거칠부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모아 역사책(국사)을 편찬하게 했습니다
한편 고구려가 백제와 싸우자
진흥왕은 백제와의 나제동맹을 깨고
두 나라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해
그들을 공격해 두 성을 빼앗았습니다
진흥왕시기 신라는 점차 강성해져있었고
가야가 혼란스러워지자
가야의 음악가 우륵은
자신이 만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순해옵니다
사람들은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 이라 했습니다
진흥왕의 명으로
우륵은 계고 , 법지 , 만덕 세 신라인들의 음악스승이 되었고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보아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
법지에게는 노래를 ,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습니다
진흥왕은 그들의 경연을 보며
기뻐하고 우륵에게 큰 상을 주었습니다
가야금은 일본에도 건너가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진흥왕시기 최전성기를 맞은 강성한 신라는 점차 북진했는데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신라는 한강상류 , 백제는 한강하류지역을 가지기로 합의했는데
신라는 백제가 혼란한 틈을 타서 한강지역을 하류까지 모두 점령합니다
진흥왕은 한강유역에 또한 진흥왕은 북쪽 함경도 유역까지 진출합니다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은 점령지를 직접 행차하고
점령지에 여러 비석을 설치해 신라의 영토임을 알렸고
이에 각지에 한강 , 함경도 등 각지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집니다
한편 신라에 한강유역을 모두 빼앗기고
분통에 빠진 백제 성왕은
애써 진흥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냅니다
성왕이 진흥왕의 장인이 된 다음해
성왕은 신라 관산성을 공격했는데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이
병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해
백제 성왕을 죽이고
이에 신라군은 승세를 타고 싸워
백제 좌평 4명과 백제군 2만 9천 6백명을 참살했습니다
이 관산성 전투로
오랫동안 한반도 남부의 최강대국이었던 백제는 힘을 잃고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도 신라에 대항하자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했고
화랑 사다함은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가야 성에 들어가 흰 깃발을 올렸는데
이에 성안의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어찌 할 줄 모르다가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오니 모두 항복했습니다
이로서 대가야 , 가야는 진흥왕대의 신라에 완전히 합병됬고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공을 논할때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진흥왕은 좋은 밭과 포로를 상으로 주었는데
사다함은 3번이나 사양하다
진흥왕의 강력한 권유로 결국 밭과 포로를 받았고
곧 포로들을 풀어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진흥왕은 사다함이 나온 '화랑제도' 를 만들었는데
화랑은 신라의 청소년·청년 무예집단 및 인재선출 방식이었습니다
처음 진흥왕은
원화제도를 두어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해
3백명의 무리를 모아
이들을 어울리게 하며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적절한 자를 선발해 인재를 알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남모와 준정은 서로 미모를 다투며 질투하다
준정이 남모를 집에 유인해 술을 권하고
준정은 남모가 취한 틈을 타
그녀를 끌어내 강물에 던져 죽입니다
이에 발각된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해산합니다
이후
미녀가 아닌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 이라 부르게 하고
그들을 떠받들게 했는데
화랑들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화랑들은 도의를 공부하고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고
무술을 닦고
산수를 찾아 유람했는데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은
이를 한국의 문화인
'풍류' 라 했습니다
하여튼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들의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고
이 중 선량한 인물을 택해서
조정에 등용되었습니다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은
말년에 들어 점차
잦은 전쟁으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에 법흥왕에 이어 불교를 흥하게 했고
또 말년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승려처럼 하고 다녔습니다
진흥왕이 사망하자
진흥왕의 태자 김동륜은 일찍 죽었기에
진흥왕의 둘째아들 김사륜이 왕위를 이어
신라 25대왕 진지왕이 되었습니다
진지왕은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하자
세종(이름이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케 했고
세종은 백제군을 격파하고 3천 7백명을 목베었습니다
진지왕이 사망하자
진흥왕의 태자 김동륜의 아들
김백정이 왕위를 이어
신라 26대왕 진평왕이 되었습니다
진평왕시기대부터 신라는 태평성대 , 즐거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점차 한강유역도 안정되어
한강유역을 통해 신라인들은 외국과 교류하며
외국의 신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했고 유학등이 유행합니다
대세와 구칠이라는 두 사람은
신라같은 산골에서 인생을 썩히기 아깝다 생각했습니다
처음 대세는 구칠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
<대세>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어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이후 대세의 잎사귀가 조금 더 앞서자 대세는 웃으며
<대세>내가 먼저 간다 !
고 말했습니다
구칠도 불끈 성을 내며
<구칠>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 !
이에 대세는 구칠이 자신과 같이 행동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서로 서방을 유람하기로 결정했고
둘은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는데
그후로 그들이 간곳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
한편 진평왕때에는 중국 통일제국 수나라가 등장해
한국 삼국에는 큰 위기감이 감돌게 됩니다
백제는 무왕대에 이르러 신라에 다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무왕이 신라 아막성을 공격하자
이곳에서 화랑 귀산과 추항이 전사했습니다
원래 귀산과 추항은 친구였는데
둘은 군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원광법사를 찾아갑니다
<귀산 , 추항>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을 해주시어
평생의 계명으로 삼게 해주소서
이에 원광법사는
<원광법사>불가의 계율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사군이충 (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치 말라 !
세속오계는 신라 화랑들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백제가 아막성을 포위하자
귀산과 추항은 전선으로 나가 백제군을 방어합니다
백제군은 군사를 매복시키다 튀어나왔고
이때
귀산은 크게 말하기를
<귀산>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임전무퇴)
어찌 감히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 ?
이에 귀산과 추항은
창을 함께 휘두르며 힘껏 싸워
들판에 시체가 쌓이고 겨우 무찔렀는데
귀산과 추항은 온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는 중에 죽었습니다
이후에도
백제군은 가잠성을 공격했는데
신라 구원군은 백제군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곧 돌아갔고
남겨진 가잠성 현령 찬덕은 분개하며
<찬덕>구원군이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리있게 죽는 것이 낫겠다
이에 찬덕은 용감히 싸우고 지키기도 했는데
점차 물과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가잠성 사람들은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점차 성안 사람들이 지쳐 무너지게 되었고
찬덕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외쳤습니다
<찬덕>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되찾게 하겠다 !
말을 마친 찬덕은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 뜨고
느티나무에 달려가 부딛혀 죽었습니다
찬덕이 죽자 성이 함락되었는데
이후 찬덕의 아들 해론은
신라의 가잠성 탈환전에 참여했고
백제군이 군사를 보내오자
해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해론>전일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시었는데
내 지금 이곳에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는 짧은 칼을 가지고 적진에 다달아
몇명을 죽이고 죽었습니다
당시 신라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긴 노래를 지어 조문했고
진평왕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남겨진 가족 돕기를 매우 후하게 했습니다
한편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점차 신라와 중국 VS 고구려+백제+왜 의
십자구도로 형성되고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 , 왜가 점차 강성해지는 신라를 계속 견제 , 공격 , 압박하자
진평왕은 새로운 중국의 통일제국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계속 요청해 이들을 쳐달라 부탁합니다
<라봉봉>지증왕대부터 진평왕대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최전성기였고
오랫동안 백제나 고구려의 간섭과 보호를 받던 국가에서
점차 힘을 기르고 내정개혁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로인해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내준
백제와 고구려는 점차 신라를 협공하게 되었고
위기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