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졸업장 수여 故 손양원목사의 명예졸업장 수여가 모교인 중동고등학교 강당에서 2014년 2월 6일 목요일 오전11시에 있었다. 중동고 107회 졸업식에서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여사(81)가 고인을 대신해서 김병민 중동고 교장으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고 감격에 찬 모습으로 손자뻘 되는 졸업생들에게 부친 손목사를 소개하고 인사를 했다. 일제하 어렵던 시절 풀빵을 팔아서 95년 전에 이 학교를 다녔다고 부친 손목사를 회상했다. 실제로 손양원 목사는 1919년 4월에 중동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다음해에 자퇴를 했는데, 이는 부친 손종일 장로가 독립만세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장남으로서 가정에 대한 책임 등의 형편 때문이었다. | | | ▲ 졸업식사에서 손양원 목사를 기리는 김병민 중동고 교장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백광수 총동창회장 |
이어진 학교장의 졸업식사와 백광수 동문회장의 졸업축사에서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자랑스런 손양원 선배를 기리고, 그의 헌신과 사랑과 애국의 정신을 기렸다. 이날 받은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은 장녀인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기념관에 영구 보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졸업식에 앞서 졸업하는 학생들과 내빈들은 손양원목사의 지난 성탄에 KBS가 제작 방영한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깊은 사랑”을 시청하면서 손목사의 희생적인 사랑을 회상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중동중고 총동문회와 신우회가 주최하는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 기념 세미나가 중동고 컨퍼런스홀에서 열렸다. 강사로는 손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 신학교 일년 선배인 방지일 목사가 손 목사를 회상했고, 이만열 교수가 손양원목사의 한국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 | | ▲ 고 손양원 목사에게 수여된 졸업장 |
세미나 세미나에 앞서 백강수 총동문회장은 인사말을 통해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게 된 경위를 보고했다. 중동고를 일 년 다녔다는 소식을 듣고 유현종 씨의 소설 손양원과 지난 연말 KBS의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고 확신을 가지고 김병민 교장에게 건의했고,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라는 보고였다. 손동희 권사의 간증 손 목사는 1902년에 태어나서 함안 칠원에서 소학교 시절부터 동방요배(천황에게 절하는 것)를 거절하다가 퇴학의 위험까지 당하면서 졸업을 하고, 1919년 4월에 서울 중동고에 진학을 한다.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하고 주일 성수를 하다가 만두집에서 쫓겨나면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고 공부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부친이 기미 독립 운동에 주동이 되면서 구속이 되자, 장남으로서 가정 형편을 돌보아야 하는 여러 여건으로 일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공부할 길을 찾다가 일본 동경의 스가모 중학 야간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다. 신문과 우유 배달 등을 하면서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평양 신학교를 거쳐서 여수 애양원에 정착하여 한센 병 환자들의 친구로서 평생을 보낸 시절과 신사참배 거부로 40-45년 사이에 투옥생활, 그리고 해방 후 잠시 누렸던 행복한 가정생활, 그러나 여순사건으로 인한 두 아들의 죽음과 가해자 안재선을 양자 삼는 과정, 그리고 한센 환자 교우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목자의 마음으로 피난가지 않고 남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담담하게 손권사가 전해주었다. 방지일 목사의 증언 방지일 목사는 손목사보다 한해 먼저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였다(32회). 그는 이미 백세가 넘는 몸이어서 긴 시간을 이미 기다린 상태로 지쳐 있었지만 손양원 목사를 회고하면서 한 마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증언하였다. | | | ▲ 간증 손동희 권사 ▲증언 방지일 목사 ▲강연 이만열 장로 |
이만열 교수의 강연 그는 산돌 손양원 기념 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어서(회장은 정주채 목사) 기념 사업회의 일을 먼저 소개했다. 손양원 목사의 삶은 세계적인 성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기에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와 순교만을 떠들지 말고 손목사를 세계적인 성자로서 평가 받도록 노력해 달라고 한국교회에 요청했다. 산돌 손양원 기념 사업회 5대 사업 소개 기념 사업회는 그동안 유현종 작가를 통해서 소설 손양원을 집필하게 하여 출간하였고, 둘째로는 손양원 오페라를 박재훈 목사에게 위임해서 작곡하여 공연하였다. 박재훈 목사가 암투병중에도 두 아들의 죽음까지 작곡된 일차 분을 이어서 순교 장면까지 확장하고 있다. 세 번째는 지난 성탄에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제작한 일이다. 네 번째는 함안 칠원 생가 복원과 기념관을 짓는 일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국가와 경남도 그리고 함안군의 협조와 한국교회가 협력해서 진행 중이다. 다섯 번째는 목회자로서는 당대에 드물게 많은 저작이 있어서 전집 간행을 추진 중이다.현재는 장신대 교수가 맡아 추진 중이다. 손목사의 한국사적 의미 강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손양원의 교회사적인 의의가 아니라 한국사적 의의를 몇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부친 손종일 장로와 손양원 목사 모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한국사적 의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했다. 부친 손종일 장로는 칠원 장날에 두 번이나 독립 시위를 주동하여서 마산 형무소에 투옥됐다. 손양원 목사도 1940-45년 사이에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손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실로 인한 투옥인데, 1943.5.17일에 전향서를 쓰지 않았기에 출옥되지 않고 계속 투옥되었다. 여기서 이교수는 신사참배 반대가 가진 한국사적 의의를 설명한다. 일제 말기에 사상범의 투옥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사회주의자들이고, 둘째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이다. 신사참배 반대자의 경우 일본의 천황의 신 됨을 부정한 것인데, 이는 당시 일본이 지향하는 정교일치의 국체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1867년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정교일치체제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후 청일, 러일 전쟁, 미국 영토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내부 결속을 위해서 천황의 신격화를 시도한다. 여기서 신사참배의 의의가 있다. 단지 십계명의 1, 2계명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전시체제 강화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조선의 역사와 말, 글을 못 쓰게 하고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등도 같은 성격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이고 명분적인 것은 우상숭배의 1,2계명이지만 마음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있다고 이교수는 주장한다.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자들이었던 주기철 목사가 오산 중학을 졸업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주남선 목사도 이미 3.1운동 시에 거창에서 앞장을 섰고, 이후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였다. 그가 목사가 된 후에도 신사참배 가결 후에 목사직을 내어놓고 반대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 실제로 손양원 목사는 반전 설교도 했다고 이교수는 주장한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우상숭배라는 형식으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감추면서 일본의 전시체제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결과로 평가했다. 또한 해방 후에 백범 김구와의 만남을 의미있게 소개했다. 김구와 이승만이 해방 정국 초기에는 서로 협력했지만 정부 수립 방식을 놓고, 통일 정부와 남한 정부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김구와의 만남은 손목사가 김구 노선에 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애향원을 떠날수 없어 김구가 세운 학교 교장직을 거절한다. 또한 두 아들 동인 동신의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사건도 민족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두 아들을 잃고 처음에는 낙심을 하지만 당시 이인재 전도사가 애양원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위로와 권고를 하는 것을 받아 마음을 정리하고 유명한 9가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아가 살해했던 무리들 중에 하나였던 안재선을 양자로 입양하기로 하고 사형직전에 나덕환 목사의 중재로 군 장교를 만나 사면을 받게 하고 풀려나게 해서 양자 삼는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통일과 분단 그리고 공산과 민주 등의 이념적인 갈등을 뛰어넘는 용서의 실천을 통해서 민족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적대적 공생관계의 남한의 종북몰이나 북한의 이념 선명으로 말미암는 민족적 갈등이 극심한 때에,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인데, 손목사의 용서의 실천은 민족적인 메시지를 준다고 이교수는 주장한다. 또한 손양원 목사가 국기배례를 국기 주목으로 변경하는 발의를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까지 이끌게 된 단초가 손목사의 발의에서 비롯된다. 이는 국가주의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국가주의를 반대하지만 그러나 민족의식은 철저함을 말한다. 민족 주체성과 민족의식의 회복을 강조했고, 단군정신 선양을 말하였다. 경천애인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도자의 솔선수범으로서 그의 순교를 한국사적으로 정리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피난을 갈 때 애향원을 지켰다. 배에 승선하고서도 내려서 목양지로 달려갔다. 이것은 솔선수범의 지도력을 말한다. 그는 그래서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이다. | | | ▲ 단체사진 |
질의응답 질의응답 시간에 손목사를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라는 평가와 오늘날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일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서 이교수는 먼저 야스쿠니 참배 문제에 대해서 답하였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1963년에 일급 전범 14인의 위패가 있기에 거기에 참배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차 세계 대전시의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지향성을 말하기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참배는 다신교 문화의 생활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구별을 명확히 했다. 이어서 손목사는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을 가르치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의 시야는 넓었음을 말한다. 감옥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가라는 검사의 심문에 대해서 네 명의 일본인을 거명한다.우찌무라 간조, 구로사끼, 다하기, 나까다 쥬지 등이다. 이들은 무교회주의자들이며, 감리교, 성결교인들이다. 이들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계의 흐름을 이해한 손목사를 언급하면서 보수적 지평을 넘어서서 신학의 흐름을 이해했다고 평가했다. 이만열 교수의 강의 제목이 손양원의 한국사적 의미이기에 교회사적인 의미의 본질을 민족사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돋보였고 설득력 있는 논거들이 제시된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이(민족적 동기와 신앙적 동기) 기본 동기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동시에 양자가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의미 있는 강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