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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28. [역경의 열매] 김의식 (1-20)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넘은 십자가 사랑’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고통받은 이들
치유하기 위해 대학서 상담 치유학 전공
십자가 사랑 체험 후 치유의 은혜 충만
김의식 치유하는교회 목사가 지난달 8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빌딩에서 자신의 삶을 바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신학대학원 시절에도 호남 출신 전도사들은 서울 시내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호남 출신 목사가 서울 지역 교회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한다.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와 고통의 연단 속에서 나는 호남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졌고, 차별받는 불쌍한(?) 호남을 더 사랑하게 됐다. 일찍이 이순신 장군도 “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호남의 지역 의식을 뛰어넘어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한 후 이보다 더 소중한 치유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상담치유학을 전공했고 이 모든 것이 치유 목회의 원동력이며 은혜의 가시가 됐다.
아버님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인데 고향에서 사랑하는 형제를 잃었고 학교도 소학교만 나오셨다. 해방 직후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고향을 떠나 당시 무안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성모의원에서 마동안 장로님을 만나셨다. 그분께 신앙과 의술을 배워 1950년 약종상 면허시험(현 약사고시)에 합격해 영생당약방을 여셨다. 또 심정택 목사님을 모셔 영산포중앙교회를 개척하셨고 초대 장로로서 1985년 전남노회(전남노회 광주노회 광주동노회 분립 전) 노회장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을 다하셨다. 그리하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때 총회장 표창까지 받으셨다.
충성의 결과로 영생당약방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계속 확장돼 나주군 광산군 장흥군 강진군 영암군 함평군 무안군에 이르기까지 도매로 약을 공급하는 커다란 약방이 됐다. 당시 집에서 일하던 직원만 해도 상주 직원과 배달 직원, 가정부를 포함해 1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나주군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로서 상당히 윤택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할아버지 김달복 집사님과 할머니 박연심 집사님을 봉양했을 뿐 아니라 여섯 동생과 그 가족들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뒷바라지하셨다. 그 결과 모두 의사 약사 간호사 교수 건축사 미용사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약력=한양대 공과대, 성서침례신학교, 장신대 신대원(교역학 석사), 장신대 대학원(신학석사),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 호남신대(명예신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부회록서기 및 서기 역임, 현 치유하는교회 위임목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넘은 십자가 사랑'
* [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머니의 폭탄선언
* [역경의 열매] 김의식 (3) 금고 손대려다 아버지께 들켜 "커서 뭐가 되려고…"
* [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 [역경의 열매] 김의식 (5) 결혼 후 독립선언… 신혼여행 다녀오니 13만원이 전부
* [역경의 열매] 김의식 (6) 괴롭히던 선임이 싸놓은 더블백엔 '폐의류만 가득'
* [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가시나요"
* [역경의 열매] 김의식 (9) 첫 목회지 성령께 묻자 "가라"… 눈물의 이민 목회 시작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0) 암 치유 기적… 힘들게 하던 교인들에 경종 울려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1)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되나"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2) 담임목사 청빙에 고민하자 "아빠, 목사는 고생을 해야…"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3) 욕설과 몸 싸움장 된 교회… 주일에 설교 가기도 두려워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4)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치유의 은혜 체험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5)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6) 심방 다녀오면 집 앞에 쌀과 고기… 성도들 사랑에 눈물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7) 새 성전 '치유하는교회' 입당… 나잇대별 맞춤 목회 펼쳐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8) 한국교회에 치유 목회 접목… 해외에서도 크게 부흥
* [역경의 열매] 김의식 (19) 부회록 서기로 총회 임원 첫발… 한국교회 위해 헌신
* [역경의 열매] 김의식 (20·끝) 나에게 맡겨진 치유의 사명, 충성 다할 수 있기를…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머니의 폭탄선언
남매 중 가운데 끼어 사랑 못 받는단 생각
부모님 불 순응과 형제자매 다툼으로 터져
학교와 교회서도 애들 때리고 괴롭히자…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두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어릴적 큰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에 윤택한 가정 환경에서 살았으나 학교와 교회에서 문제아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에 샌드위치가 되어 위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 상처는 처음엔 부모님에 대한 불순종과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저것은 형이나 누나는 안 닮고 동생들만도 못하니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것을 낳았는지 모르겠어야!”하고 한탄을 쏟아놓으셨다. 그때마다 내 상처는 더 깊어졌고, 점점 그 증상이 가정 밖에서도 나왔다. 학교에서 애들을 얼마나 두들겨 팼던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 엄마들이 약값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나마 아버지가 약방을 경영해서 그 약값을 댈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교회에 처음 오는 아이들을 못 나오게 하고 여자아이들을 괴롭혔다. 선생님들은 선임 장로 아들인 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나를 예배당 밖으로 끌고 나가 “의식아, 너는 왜 1년 내내 아프지도 않냐?”고 하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내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원기소와 에비오제(당시 어린이 영양제)를 먹어서 튼튼해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약방을 해서 원기소와 에비오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먹었으니 얼마나 튼튼했겠는가. 나는 학교폭력을 넘어 교회폭력의 주범이 돼 있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동안 어머니의 속은 썩을 대로 썩어만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난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우리 5남매를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다른 자식은 다 내가 낳았지만, 의식이 저것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폭탄선언을 하셨다. 그날 어머니의 폭탄선언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내가 그날 저녁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53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저녁의 기억만은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 잤는데 그날 밤에는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적실 정도로 한없이 울면서 속으로 외쳤다. “엄마! 엄마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다음 날부터 더 이상 의붓부모님(?)과 의붓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디 갈 만한 곳도 없었기에 나는 열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아버지 약방의 극약통에 있던 사이나(청산가리)를 꺼내 먹으려 했는데 크기가 주먹만 해서 한입에 먹을 수 없었다. 깨뜨려서 먹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려고 하셨던지 잘 깨지지 않았다. 그날 자살 시도(?)는 실패였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는 나를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고 위축시켰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3) 금고 손대려다 아버지께 들켜 “커서 뭐가 되려고…”
눈물 글썽이며 하신 말씀 지금도 생생
늘 축복기도와 예배 빠지지 말라 강조
삶 속 보여준 신앙, 유산으로 물려받아
김의식(뒷줄 오른쪽 두 번째) 목사의 아버지가 1998년 전남 나주 영산포중앙교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될 당시 찍은 가족사진.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의식아, 엄마가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다 너 잘되라고 하신 거야!”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당시 나를 붙들어 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약방에서 손님을 대하고 계실 때 그 뒤편 금고에서 돈을 훔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신 아버지가 돌아보시는 바람에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갑자기 얼음이 되어서 금고에서 손을 슬며시 뺐다. 손님이 가신 후 아버지는 나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셨다. 나는 그날 죽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오히려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의식아, 벌써부터 도둑질을 하면 커서 무엇이 되겠냐….” 나는 지금도 그날 저녁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2남 3녀 자녀들에게 무언의 신앙교육을 하셨다. 자녀들이 모이면 아버지는 늘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또 예배에는 절대 빠지지 말라고 하셨다. 부모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통해 우리 자녀들에게 남기신 가훈은 첫째 하나님 중심, 둘째 성경 중심, 셋째 교회 중심이었다. 자녀들에게 물질은 남겨 주시지 않았지만 우리 남매들을 오늘날 목사 장로 권사가 되게 만들었던 가장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셨다.
아버지는 장로 은퇴 후 고향 교회의 원로장로로 계시다가 2001년, 50여년을 경영하던 영생당약방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 서울로 오셨다. 그런데 당시 교회가 극심한 불화와 분쟁 가운데 있었다. 어떤 장로는 나를 회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불러 위협과 압박을 가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우리 아들은 아버지 말씀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잘 듣는다”라고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과 10년 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다.
20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한번은 새벽기도회를 모시고 가는데 갑자기 나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평생 교회와 노회, 총회를 겪어봤지만 이렇게 힘든 교회는 처음인데 김 목사가 잘 이겨내서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아버지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아버지께 불효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
부모님은 고향의 영산포중앙교회를 세 번 건축하시면서 건축비 70%를 감당하실 정도로 평생을 주님과 교인, 이웃을 위해 바치고 나누고 베풀며 사시다 가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신까지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셨다. 부모님이 우리 남매들에게 남기신 신앙 유산은 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말씀이다. 평생을 이 말씀대로 사시다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읽고 전할 때마다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의대 입학 좌절하며 춤과 술로 방황하다
원인불명 병 걸려 병원 치료도 차도 없어
성경 읽는 순간 질병의 고통 의미 깨달아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어도 고열과 오한이 그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신촌의 작은아버지 병원이며 고향의 전남대병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다시 서울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고향 집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있을 때였다. 장롱 선반 위에 있는 아버지의 성경책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때 저 성경책을 붙잡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충동이 솟구쳤다. 성경책을 붙들고 엎드려서 “하나님 아버지,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대로 순종할 테니 저 좀 살려 주십시오!”하고 성경책을 펼쳤다. 그때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말씀을 읽는 순간 방황했던 대학 생활이 동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왜 이 질병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쳐야 했는지 깨달았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면 남은 삶을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얼마 동안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울부짖었을까. 갑자기 머리와 등을 따라 성령님의 불이 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신다는 약속의 징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기력을 되찾은 지 사흘도 안 되어 나는 78년 1월 1일 고향 교회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주의 종으로서 헌신기도를 올렸다. 두 달간 요양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 신학대에 편입하고자 했으나 이과에서 문과로 편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윤 은혜성서침례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야간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다. 공대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신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포스터 선교사님을 만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미국 침례교의 복음주의 성서신학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더구나 포스터 선교사님이 미국의 유명한 영적 강해 설교가인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강해 설교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게 성서침례신학교를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니고 최우수 졸업생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의 종으로 부르실 거면 왜 공학을 공부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런데 은혜성서침례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맡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증거했더니 많은 학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2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중고등부가 3년 뒤에는 70여명으로 부흥했고 목회자가 7명이나 나왔다. 그 가운데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신학대학원인 미국의 서남침례신학대학원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 김종환 박사도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5) 결혼 후 독립선언… 신혼여행 다녀오니 13만원이 전부
신대원 입학 후 약대 출신 아내와 혼인
‘원어 성경’ 갖고 싶어 새벽마다 기도
땅에 떨어진 돈 주워 세어보니 딱 책값
김의식(왼쪽) 목사와 문채성 사모가 1981년 광주제일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와 문 사모는 가난한 신혼생활 중에도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포스터 선교사님께서는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도록 해줄 테니 유학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셨다. 장로교회 출신이었던 나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노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아버지는 “어떻게 부자간에 장로교와 침례교로 나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좋다 하는 복음을 장로교회에 와서 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눈물로 권면하셨다. 그래서 나는 장신대 신대원 한경직 목사님 특별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그때 장신대 교무과에 매형의 매형이 되시는 권길웅 장로님이 교무과장으로 있어서 시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시험으로는 2등이었는 데도 최종 결과는 탈락으로 나왔다. 그것을 보고 권 장로님이 연락을 주셔서 총회장을 지내신 한완석 광주제일교회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한 목사님은 바쁜 와중에도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야간열차로 서울로 올라오셔서 다음 날 이종성 학장님을 만나셨다. 그때 이 학장님은 병역 미필을 탈락 이유로 내세우셨다. 그런데 그 후에 보니까 병역 미필자가 계속 한경직 목사님 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이렇게 장신대와 쓰라린 만남은 시작됐다. 나는 1981년 3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일반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해 3월 21일 이대 약대를 졸업한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할 때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부모님, 결혼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겠습니다”라고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난생처음 해보는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수중에 13만원이 남았다. 군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이 갑작스럽게 가난해지고 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신대원 공부를 시작하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우면서 ‘히브리어·헬라어 원어성경’(The Interlinear Bible)이 너무 갖고 싶었다. 전 4권으로 당시 2만원이었다.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했다. 어느 날 오전 10시쯤 혼인신고를 위해 동사무소를 찾아갔을 때 기적의 응답이 일어났다. 입구에 막 들어서는데 오른쪽 바닥에 5000원짜리가 구겨져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가. 그 순간 다른 사람이 먼저 집을까 봐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전도사 양심에 도저히 그냥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안 보이게 돈을 손에 움켜쥐고 제발 주인이 안 나타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여기 돈 잃어버린 사람 있어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 번만 묻기가 아쉬워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주머니에 5000원짜리 구겨진 돈을 집어넣었다.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동사무소에서 나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겨진 돈을 펴서 확인했는데 한 장이 아니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딱 2만원이었다.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도 교회 목양실 한쪽에 놓인 4권의 원어성경을 볼 때마다 40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 “저 성경은 주님이 선물로 주신 성경이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6) 괴롭히던 선임이 싸놓은 더블백엔 ‘폐의류만 가득’
경비근무 설 때마다 기합 주고 때리다
다른 부대 전출 가게 되자 골탕 먹여
사과 전화에 용서, 전도 기회로 삼아
김의식 목사가 1983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종 사병 생활을 하던 모습. 김 목사는 군 생활이 영성은 물론 체력과 정신력을 연단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1981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청와대 경호부대)으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30경비단에 가게 된 데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혜성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다. 칠순이 넘고 몸도 불편하신 김순례 권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 서울 시내 한복판에 배치돼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고 하면 광화문 네거리인데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서서 근무하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권사님의 기도는 정확하게 응답을 받았다. 내가 배치받은 곳은 청와대 앞 당시 중앙청 뒤 경호부대였다.
30경비단 생활을 가장 견디기 어렵고 힘들게 한 사람은 같은 소대의 불교 군종사병 김모 상병이었다. 그는 주·야간 복초(두 사람) 경비 근무 때마다 이병인 나를 데리고 가서 질문에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기합을 주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렸다. 그때마다 M16 소총으로 쏴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모든 분노와 울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한 덕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는가. 그래서 나도 “주여, 원수 같은 그를 내 감정으로는 용서하기 어렵지만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82년 1월 1일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이현우 당시 30경비단 단장(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 사령부 작전참모로 갈 때 나를 당번병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내무반에 돌아가자 뜻밖에도 그토록 나를 핍박하던 김 상병이 내 더블백 짐을 다 싸놓았다. ‘마지막이라 선행을 베푸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출신고를 마치고 나는 소대를 돌아보지도 않고 북악산을 5분 만에 뛰어내려 왔다. 그런데 사령부에 도착해 더블백을 펼쳤더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짐 안에는 훈련소에서 받았던 군복, 내의, 겨울용 내복, 양말은 하나도 없고 다 떨어진 폐의류만 가득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김 상병은 병장이 되어 전역했는데 어느 날 밤늦게 사령부 군종부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술에 취해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김 일병, 다 용서해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김 병장님, 저는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고 가까운 교회에 꼭 나가십시오” 하고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불교 군종사병이었던 그에게 교회 나가라고 한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생명력 없는 종교생활을 하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변화된 삶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30경비단과 수도경비사령부 생활은 영적인 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강인한 정신력, 굳건한 체력에 이르기까지 치유 목회를 위한 영·혼·육을 연단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전역 후 장로교 정통 목회 배우고 싶어
아버지와 림 목사 찾아가 청빙 부탁하자
세 가지 질문 후 교육전도사로 받아줘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데 림 목사님께 장로교 정통 목회를 배우고 싶었다.
아마 총회 임원회가 열렸던 날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함께 총회로 림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아버지는 모처럼 고급 식당에서 림 목사님과 김 장로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하셨지만, 림 목사님이 극구 사양을 하셔서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앞 1000원짜리 백반집에 갔다. 그만큼 림 목사님은 첫인상부터 소박하셨다.
림 목사님께서는 그때 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셨다. “우리 노량진교회는 사례가 적은데 밥 굶을 각오가 되어 있수?” “네, 저는 굶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이 많은데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수?” “네,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속 썩이는 교인이 많은데 참고 이겨낼 각오도 되어 있수?” “네, 맡겨만 주시면 죽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오구려!” 세 가지 질문으로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 면접에 통과한 셈이었다.
그 후 89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부터 시작해 심방 전도사, 교육 목사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노량진교회에는 어려운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치유 목회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과 목회의 아버지이신 림 목사님께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고 축복이었다.
림 목사님의 신앙과 인품, 삶의 모범을 따라 나는 치유 목회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보다 먼저 소년부를 맡고 계셨던 김광식 전도사님(현 제주 충신교회 은퇴목사)을 자문하며 토요일 학교 앞 전도에 힘쓴 결과 200여명 모이던 소년부를 600명에 이르도록 부흥시켰다. 이후 신혼가정부도 이어받아 매 주일 성경공부와 친교 모임을 통해 2배로 부흥시켰다. 10여명 모이던 대학부를 맡았을 때는 여름 농촌 전도 봉사활동과 영성훈련을 강하게 해 기적의 응답을 체험했다. 교구 심방전도사를 맡아서도 2년 만에 1.5배의 부흥이 일어났다.
모든 부흥에는 먼저 교사들과 구역장들을 올바로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과 동역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뜨겁게 기도하며 전도, 심방에 힘쓴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 부서든지 그 부서의 지도자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훈련시키면서 앞장서 솔선수범했던 것이 부흥의 요인이었다. 노량진교회에서의 사역은 부흥의 기쁨을 누렸을 뿐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림 목사님 밑에서 목회의 틀을 잡았기에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치유 목회 훈련기였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가시나요”
사고로 딸 잃고 주님께 원망했지만
같은 고통 겪은 성도와 공감 나누며
남은 삶 치유 사역 위해 살기로 결심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87년 11월 3일,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다섯 살 딸 아이 한나가 “아빠, 해태 종합선물세트 하나 사주면 안 돼요?” 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나야, 이제 성탄절도 가까워지니까 성탄절에 아빠가 선물하면 안 될까?” 하고 말했다. ‘아니요’가 없었던 착한 딸은 “네” 라고 대답했지만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흘 후, 그날도 밤늦게 퇴근했는데 딸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 딸아이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아내의 약국 문을 닫아 주려고 나갔다. 길어야 10분 정도 걸렸을까. 돌아와 보니 딸아이가 1층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간 사이 딸아이가 깨어났는데 아빠도 없고, 대문은 밖에서 잠겨 있으니 베란다로 나와서 나를 찾다가 그만 떨어진 것이었다.
딸아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교회에 가기만 하면 혼자 본당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항변을 시작했다. “새벽 일찍부터 나가서 밤늦게까지 심방하느라 쉴 틈도 없이 충성을 다했는데, 그 보상이 딸아이를 불러가시는 것입니까. 주님, 할 말 있으시면 한번 해보세요!” 항변을 계속 이어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 전도사,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렇게 힘드냐. 나도 너희를 위해 단 하나밖에 없는 죄 없는 아들을 잃었는데….”
나는 그날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여, 사랑하는 딸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맡겨 주신 목회의 사명에 죽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부터 비로소 목숨을 걸고 목회를 하게 됐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사고로 잃고 나니 교인들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더 나아가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교인들을 통해서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교인들이 다가와 “전도사님, 저도 첫째를 잃었어요” “저는 막내를 잃었어요”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헨리 나우웬 박사가 말했듯이 나의 여생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성탄 예배를 마치고 해태 종합선물세트를 샀다. 혼자 교회 봉고를 몰고 노량진 동산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밭을 헤치고 딸아이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한나야, 아빠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물세트 사 왔어. 이렇게 늦게 사와 미안하구나. 이제라도 아빠를 용서하고 아빠의 사랑을 받아다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무릎 위에 하염없이 쏟아졌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9) 첫 목회지 성령께 묻자 “가라”… 눈물의 이민 목회 시작
한 교회 청빙 소식에 이력서 제출하자
목사 힘들게 하는 교회라며 주변서 만류
부흥에 주력 성도 200여명 다시 돌아와
김의식(원 안) 목사가 1992년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위임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에게 이민 목회는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첫 사랑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공부한 결과 보스턴대학교(Th.D.), 에모리대학교(S.T.D.), 드류대학교(Ph.D.),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시카고신학대학원(Ph.D.)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은 다 목회상담이 전공이지만 시카고신학대학원은 가족치료 전공이었다. 당시 시카고신학대학원은 종합대학병원 3개와 가족치료센터 12개를 가지고 있어서 이론과 실제를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오성춘 장신대 교수님과 상의해 시카고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간의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오 교수님께서 장신대 교수로 오려면 담임 목회 3년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기도하던 중,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력서와 설교 테이프를 전달했다. 그때 시카고 한미교회에 계시던 강신원 목사님(현 모스크바 장신대 총장)께서 “그 교회는 목사를 힘들게 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 첫 목회지로 그런 곳에 가면 다칠 수 있으니 안 갔으면 좋겠다”고 극구 만류하셨다. 그런데 기도하면 성령님께서는 “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를 어떻게 찢어 죽이는지 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92년 4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거기서부터 눈물의 이민 목회가 시작됐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는 52년 역사를 가진 시카고를 대표하는 장로교회였다. 초대 박영희 목사님, 2대 노재상 목사님, 3대 권영배 목사님은 모두 다 열심히 목회를 하셨지만 교회와 힘든 관계 속에서 퇴임하셨다. 그런 과정에서 성도 400여명이 모이던 교회가 내가 갔을 때는 60여명만 남아 있었다. 권사님들은 푸념 삼아 “알곡은 다 날아가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아 있어요”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위로했다. “쭉정이는 다 날아가고 알곡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이민 목회는 잃은 양 찾기에 주력한 끝에 부흥 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년 만에 200여명이 출석하게 되었을 때 시험이 찾아왔다. 예배당이 흑인 슬럼가에 있으니 백인 동네로 이사 가자는 의견이 교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시카고 내에 있는 조그마한 한인 대학을 인수할 것인지, 시외에 있는 미국 침례교회를 인수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차로 교회가 둘로 나뉘었다. 공동의회를 거쳐 시카고 케이스대학을 인수해 이전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에게는 어떠한 해명도 통하지 않아 매일 눈물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모든 교인이 부족한 종을 신뢰하고 지지해 극소수의 반대자들이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열 가정 정도가 다른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나를 괴롭게 했던 장로님을 한국에서 만났다. 그 교회 부흥성회에 초청을 받고 가서 과거 장로님, 집사님들과 지난날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은혜가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0) 암 치유 기적… 힘들게 하던 교인들에 경종 울려
암 재발로 시한부 선고받은 집사 위해
“차라리 저를 대신 불러가시고…” 기도
목숨 건 간절한 금식기도에 성령 응답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1996년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문채성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카고한인연합교회 목회 시절 기억에 남는 성도는 김진해 안수집사님과 김계자 집사님(현 권사님) 부부다. 남편 집사님은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다가 6개월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방암이 재발해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 집사님이 방황하던 6개월이 뇌리를 스쳤다.
부인 집사님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던 중 고난주일을 맞이했다. 집사님의 병세는 더 심해져 암세포로 인해 목뼈와 골반까지 삭아버렸다. 집사님의 엎드린 모습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 쓰러진 모습으로 보였다. 집사님 가정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불쌍한 마음에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닷새째 금식하던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터져 나왔다. “만약 김 집사님을 불러가실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대신 불러가 주시고 그렇지 않으신다면 김 집사님을 살려 주시옵소서!”
목숨을 걸고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한참 울부짖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님의 불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증표라는 마음에 한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응답대로 김 집사님은 유방암에서 치유 받았다. 이 기적은 그동안 교회를 어지럽히고 힘들게 했던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하나님의 표적이었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 온 지 4년이 되었을 때인 1996년 6월 1일 시카고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 그런데 교인들은 나와 평생을 함께하길 간절히 바랐기에 처음 당회에 사임서를 냈을 때는 거절을 당했다. 두 번째로 다시 사임서를 냈을 때 장로님들은 더 거절을 못 하고 “목사님이 꼭 가고 싶으시면 제직회 허락을 받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제직회에서는 사임 반대 의견들이 터져 나왔다.
가까이 지내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의 발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하던 집사님들도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 처음 오셨을 때 힘들게 해드렸습니다. 이제 은혜받고 열심히 하려는데 양 떼를 버리고 떠나는 목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붙잡는 것이었다. ‘이렇게 붙잡을 것 같으면 진작 잘해 줄 것이지….’ 하는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궁리 끝에 1년간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하나님께서 1년 동안 저의 마음을 바꿔 놓으시면 제가 이곳에서 뼈를 묻겠지만 만약 저를 한국으로 보내길 원하시면 그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심정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런데 1년을 기도해도 나의 마음은 계속 한국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나는 시카고를 떠나왔다. 벌써 24년 세월이 지났지만 내 마음속 첫사랑인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 잊지 못할 양 떼들이요, 첫 담임 목회에서 만난 너무도 소중한 동역자들이었다. 지금도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나와 마지막 환송 인사를 나누며 눈물 흘리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1)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되나”
귀국 후 교수임용 순위 바뀌어 후보 탈락
시간 강사와 논문 번역일로 생계 꾸리다
정 교수 배려로 치유상담연구원서 강의
김의식(앞줄 왼쪽 여덟 번째) 목사가 지난해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열린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취임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7년 5월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교수 임용 1순위로 이사회에 올라갔는데 유력 이사의 조카였던 2순위 후보와 순위가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 되는가?’ 하고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그 교수의 손위 동서가 내가 한양대를 다닐 때 전도했던 친한 친구이자 공학박사가 된 후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된 최동수 캐나다 밴쿠버 삼성교회 목사였다. 그래서 내 앞길을 막았던 교수를 다 용서하고 화해한 후 지금은 마음의 친구로 삼았다.
내가 교수 후보에서 탈락하자 나를 추천한 정장복 교수님과 오성춘 교수님은 당황하며 내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회 이틀 후 새벽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법궤를 찾아오는 사무엘상 6장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날 황승룡 호남신대 총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 박사님, 얼마나 마음이 많이 상하세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꼭 우리 학교에 오셔서 가르쳐 주십시오.” 황 총장님의 간곡한 권유에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배 가는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호남신대는 98년 1월 부임이었기 때문에 그사이 강의할 학교를 찾아야 했다. 오성춘 교수님의 배려로 장신대 대학원에서 6월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30만원 강사비로는 가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과정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한신대 목회상담학과에 계시던 정태기 교수님이셨다.
정 교수님은 한신대 1년 선배이신 이종민 미국 시카고 레익뷰장로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내 소식을 들으셨다 했다. 나를 꼭 돌봐달라는 이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곧바로 연락하셨다는 것이다. 한 번 형제이면 영원한 형제처럼 돌봐 주시던 이 목사님의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나는 가슴 찡한 감동이었다.
그분의 배려로 97년 3월 설립된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9월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식사 시간만 빼고 강의에 열정을 쏟았다. 그렇게 시작된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일반 과정은 그 후에 전문 과정, 인턴 과정으로까지 발전해 학생들만 1500여명에 이르렀다. 2014년에는 교육부에서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로 인가를 받아 200여명의 대학원(석사 과정) 학생들을 가르치는 치유 상담 전문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올해부터는 박사 과정을 개설했으며 미국 최고의 상담 대학원인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과 공동 상담학 박사 과정까지 열게 됐다.
나는 정 교수님과 함께 지난 24년간 안식년도 없이 강의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그분의 뒤를 이어 제3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정 교수님은 내가 가장 어려울 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가장 존경하는 은사 중 한 분이시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2) 담임목사 청빙에 고민하자 “아빠, 목사는 고생을 해야…”
딸의 입 통해 하나님의 음성 듣게 돼
신학대 부임 후 학생들 영성 식지 않게
강의 때마다 찬양과 통성기도로 시작
김의식(왼쪽) 목사가 딸 안나(가운데)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
1998년 1월 호남신학대에 부임했다. 내려갈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았다. 강의 전에는 항상 찬양과 통성기도를 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Seminary is a cemetery’(신학교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뜨겁던 신학생들의 신앙이 졸업할 때가 되면 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의 영성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강의 10분 전부터 찬양과 통성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불을 붙이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자 다른 교수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신학대가 기도원이냐는 것이었다. 신학대에서도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렇지만 무더운 여름날 창문을 다 닫는 한이 있어도 간절히 찬양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간 호남신학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내내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있는 치유의 강의가 끊이지 않았다. 강의하면서 나 자신부터 치유를 받았다. 나는 신학생들을 치유함으로 치유의 물결이 그들의 가정과 교회, 나아가 대한민국과 세계로 확장되길 간절히 바랐다.
99년 9월 장신대 신대원 강의를 하러 서울에 올라갔을 때 신학의 멘토시며 내 진로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던 정장복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화곡동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데 가라는 것이었다. 호남신학대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교회로 갈 수 있나 하며 있었는데, 정 교수님이 강권하셔서 기도를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목회 현장은 날마다 새로운 말씀 준비를 하고 기도하는 영적 전쟁터지만 교수 생활은 준비된 강의를 되풀이하면 됐고 방학과 안식년 등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이렇게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아도 되는가’ 하는 갈등이 싹트던 참이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딸아이에게 물었다. “아빠와 엄마가 서울로 목회하러 가려고 해. 앞으로는 이렇게 가족끼리 시간도 갖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힘든 삶을 살 게 될 텐데 괜찮겠니?” 그때 사랑하는 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아빠, 목사님은 고생을 해야 해요. 제 걱정하지 마시고 아빠가 기도하면서 결정하세요.”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대답인가. 나는 그날로 화곡동교회에 가기로 결정하고 이력서를 보냈다.
호남신학대에서 교수로 있었던 시간은 내가 선한 목자로 연단 받는 세월이었다. 한번은 점심 식사 시간에 두 학생이 1000원짜리 학교 식당 티켓이 없어 수돗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 어려웠던 신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조교에게 학부부터 신대원에 이르기까지 점심을 거르는 학생 명단을 파악하도록 했다. 그리고 생활비 150만원을 제외한 교수 봉급과 교외 강사비, 교회 부흥회 사례비까지 털어 그들의 식대와 등록금에 다 쏟아부었다.
그렇게 3년을 지내다 학교를 떠나왔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수의 갓김치, 완도의 김, 해남의 전복, 목포의 젓갈, 김제의 쌀 등 특산물을 보내는 제자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들을 잘 가르쳤다기보다도 그들이 참으로 스승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3) 욕설과 몸 싸움장 된 교회… 주일에 설교 가기도 두려워
부임 전 장로 불법 선거로부터 시작
관리집사들 해고문제로 갈등 더 커져
갖가지 협박과 폭언으로 위협까지…
김의식(앞줄 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00년 서울 화곡동교회 목사 위임예배에서 당회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6월 11일 서울 화곡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부터 한 안수집사님이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10여 차례씩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했다.
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노량진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받을 때는 교회 안에 사랑하는 형제들만 있는 것 같았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는 교회 안에 원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당시 화곡동교회는 마귀가 득실거리는 복마전 같았다. 화곡동교회는 김학만 원로목사님이 출석 교인이 200여명 되던 1975년 부임하신 뒤 24년 2개월 동안 2000명으로 부흥됐다. 그런데 김 원로목사님은 은퇴를 2년 앞두고 장로 불법 선거 시비에 휘말리셨다. 총회 재판국의 판결대로 보면 문제 삼을 것이 없었지만 시비를 걸면 문젯거리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내가 부임하기 한 주 전에 문제가 있던 관리집사들을 해고한 것이었다. 이 일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나는 서로 간에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평한 교회를 회복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교회가 평안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관리집사들은 당회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했고 이후 기독노조를 설립하며 교회와 대립했다.
이런 교회 분쟁이 6년 7개월 동안 계속됐다.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가 있는 주일은 교회에 나가기가 싫었다. 심한 욕설과 몸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주일에 교회 가기가 싫을 정도라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X새끼 같으니라고” “네 명에 죽을 것 같냐” 등 갖가지 폭언으로 위협했다. 심지어 어떤 교인은 새벽 1시든, 2시든 상관없이 사택에 전화해서 “아파트 문에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해놓았으니 나올 때 콩가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또 당시 화곡동교회에는 고소의 달인(?)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계속 고소를 해댔다. 그래서 매주 경찰과 검찰, 법원, 노회 재판국, 총회 재판국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됐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었다. 나는 주님만 바라보며 치유 목회를 계속해나갔다.
부임 후 3년쯤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왜 우리 원로목사님이 목회를 이렇게 마무리하셔서 나를 힘들게 하냐고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셨다. “네가 평생 목회해서 오늘 같은 화곡동교회를 이룰 수 있는 줄 아느냐. 네가 못 이룬다면 이뤄 놓은 교회에 와서 설거지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날 이후부터는 원로목사님에 대한 불만이 싹 사라졌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4)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치유의 은혜 체험
교회분쟁으로 울분·마음의 상처 쌓여
협심증 심해져 묵상 중 호흡곤란 발생
“교회 수습은 하고…” 주께 눈물로 간구
화곡동교회는 10여년에 걸친 분쟁을 그치고 부흥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새 예배당을 짓고 입당했다. 이름도 현재의 치유하는교회로 바꿨다. 글로리아채플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화곡동교회의 분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수습전권위원회와 관계도 점점 악화했다. 수습전권위원회 부위원장 목사님이 수습을 전제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위원장 목사님이 반대하셨는지 그 후에는 각서 내용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끝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눈물 나는 일은 수습전권위원회가 불러서 갔다가 위원장 목사님이 노회를 탈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면서 3시간 반 동안 온갖 욕설을 쏟아놓았던 일이다. 노회 탈퇴는 우리 교회의 마지막 투쟁 카드였기에 각서를 쓸 수 없었다. 유명한 목사님에게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욕설을 듣고 나니까 그 충격이 너무 컸고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또다시 교회로 달려갔다. 예배당에 엎드려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들을 또다시 주님의 사랑으로 다 용서했다. 그러나 그런 상처의 감정들은 나의 무의식 속에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생각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협심증이 생겼는데 그것도 모르고 몇 달 동안 가슴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의 치유를 간절히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목양실에 돌아와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굳으면서 숨이 안 쉬어지는 것이다.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어디에 연락할 생각조차도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간신히 일어나서 무작정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숨이 안 쉬어지니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창틀에 엎드린 채로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부르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떠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저 불쌍한 양 떼를 생각해서라도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는 데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거의 숨이 꺼져 스러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푸후’ 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하나님께서 또 한 번 나를 불쌍히 여기고 살려주신 것이다. 나의 이런 죽음 직전 체험들은 불치병 환자 교인들을 치유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 후 기도원에 들어가 20일간 금식하고 20일 동안 보호식을 한 뒤 교회로 돌아왔다. 그 기간 하나님은 내 마음속 깊은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심장병까지 치유해주셨다. 강단에 서자 체중이 13㎏이나 줄어 야윈 모습을 본 교인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도 보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 시작했다. 나는 기도원에서 기적적으로 심장병을 치료받았고, 교회 문제 해결의 돌파구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치유 은혜를 체험했고 교회는 영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5)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암으로 2개월 시한부 받은 집사님 위해
매일 새벽기도 때마다 눈물로 안수기도
3개월 뒤 암 크기 줄어드는 기적 일어나
김의식(앞줄 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인천 강화군 계명수련원에서 치유동산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치유동산은 성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교회 프로그램이다.
심근경색의 위기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난 후, 계속되는 영적 전쟁에서 받는 온갖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지혜를 주셨다.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가장 먼저는 통회와 자복부터 하게 하셨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가장 먼저 주의 종인 나 자신에게서 찾게 하셨다.
그다음으로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안고 해결을 위한 기도제목들을 구체적으로 간구하게 하셨다. 더 나아가 깊은 감사를 하게 하셨다. 그렇게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목회였지만 뜻을 함께하며 싸워 주는 동역자들과 장로 권사 집사 성도들 등 92%의 교인들을 한 사람씩 되뇌며 감사하는 순간은 고통스러운 목회의 위기 속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됐다.
기도의 마지막에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이겨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주님, 오늘은 뭘 하고 행복하게 살까요” 라고 묻곤 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실천하며 주님이 주신 행복의 감격을 지켜나갔다.
분란 속에도 하나님의 기적은 이어졌다. 화곡동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는 오랜 분쟁 속에 기도의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성령님의 불을 붙일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부임 후 2년쯤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당시 60대 초반의 김쌍배(후에 안수집사)·정용임 집사(후에 권사) 부부가 강단에 올라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 집사님의 간에 6㎝의 암이 생겼는데 병원에서는 치료 방법이 없으며 2개월 이상 살기가 어렵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의술로 치료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내려놓고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라고 말하고 눈물로 안수기도를 해드렸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고 개인 기도가 끝나면 안수기도를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그다음부터는 매일 정 집사님이 살아서 나왔는지, 새벽기도회 때마다 그 자리를 먼저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정 집사님은 몸에 죽음의 증상이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더 가뿐해지고 건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병원에서 CT 촬영을 다시 했다. 그동안 아무런 약도 안 먹고 치료도 안 받았는데 6㎝ 암이 3㎝로 줄어들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부부는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와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난 후 또다시 CT 촬영을 해보니 암이 1㎝로 줄어들었다. 또다시 석 달이 지난 후엔, 놀랍게도 1㎝의 남은 암 덩어리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이 기적의 응답은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 가던 우리 교회에 기도의 불을 붙인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나는 다음 주일 예배에서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도 정 집사님처럼 얼마나 많은 신체적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과 가정의 불행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기적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간절히 외쳤다. 다음 날 새벽예배부터 성도들은 본당 700여석의 구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6) 심방 다녀오면 집 앞에 쌀과 고기… 성도들 사랑에 눈물
면직된 전임 목사 원로목사로 명예 회복
새 예배당 건축에 성도들 큰 건축비 감당
나 역시 생활비 제외 모두 헌금 바치자…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영등포노회에서 김학만 원로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있다.
화곡동교회 전임 목사님이신 김학만 목사님은 은퇴 후 김포로 가셔서 말씀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말씀교회는 독립 교단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우리 화곡동교회와 영등포노회, 총회를 위해 헌신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독립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목사 면직 사유가 됐다. 김 목사님이 그렇게 수모를 겪으시는데도 나는 도와드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인내하며 회복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종이 2008년 영등포노회 부회록서기가 됐다. 나는 노회에 면직된 김 목사님을 복직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김성규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셔서 김규 목사님이 노회장이실 때 가까스로 김 목사님이 원로목사로 복직되셨다. 그 후 내가 2015년 노회장이 됐을 때 당회와 공동의회가 만장일치로 김 목사님을 원로목사로 추대했다. 또 뒤늦게나마 노회의 공로목사님으로 추대했다. 평생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하신 김 목사님의 명예가 회복돼 이제야 후임 목사로서의 소임을 다한 듯이 너무나 기뻤다.
교회가 수습됐지만 그 여파는 남아 있었다. 제직회 때마다 담임목사를 쫓아내려 했던 장로들은 당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이제 교회가 화평해졌으니 과거는 다 용서하고 하나 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답변했지만 이런 발언들은 제직회 때마다 이어졌다. 결국 내가 부임한 지 6년 7개월 만에 몇 분의 장로님들이 조기 은퇴를 했다. 개혁파 장로들은 조기 은퇴 장로들의 원로장로 추대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이제는 다 용서하고 화합해야 할 때라고 설득해 만장일치로 장로님들을 원로장로로 추대했다. 그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다들 은혜롭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후에도 고소 건이 계속됐지만 당회가 힘을 받아 상처 난 교회의 치유와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감사하게도 그 환난 속에서도 교회는 갑절로 부흥해 새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우리 교인 중 부유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개미군단처럼 온 성도들이 힘을 합해 250억원의 건축비를 감당했다. 나 역시 건축헌금을 해야 하는데 은행 잔고가 없었다. 그래서 세 식구 생활비 150만원을 제외하고는 강사비 모두를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아무래도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도님들의 사랑의 손길이 그때부터 펼쳐졌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심방을 다녀와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하면 집 앞에 쌀 라면 고기 생선 채소에 이르기까지 성도님들이 시장을 봐서 가져다 놓으셨다. 나는 그때마다 눈물이 핑 돌며 성도님들의 사랑을 느꼈다. 뜨거운 감동이 가슴 속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후 벌써 1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큰 힘이 돼 주었던 목사님과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에 대한 감사는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들의 수고와 희생은 주님께서 하늘의 상과 면류관으로 다 갚아 주시겠지만 나 역시 평생 갚아야 할 은혜로 남아 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7) 새 성전 ‘치유하는교회’ 입당… 나잇대별 맞춤 목회 펼쳐
성도 수 늘어나 2500석 규모 예배당 짓고
치유 목회 적용하려 목장과 교구 재편성
세대 특성 잘 맞는 부목사들 사역에 투입
2012년 완공된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 예배당 전경. 김의식 목사는 전 세대에 치유 목회를 접목해 교회 부흥을 일궜다.
10년의 영적 전쟁 속에서도 교회는 기적적으로 부흥해 성도 수가 갑절에 이르렀다. 당시 700석의 예배당과 300석의 소예배실로는 주일 5부 예배까지 드려도 성도들의 수용이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건축 후 30년이 지나서 교회당 건물이 낙후돼 비가 오면 누수 현상이 있었고 지하 교육관에는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래서 당회에서 만장일치로 새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교회 옆의 주택까지 매입했다.
2010년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현재의 지상 6층, 지하 3층 예배당을 지었다. 2500석의 글로리아채플, 700석의 힐링채플, 8개의 교육실, 찬양대실, 위임목사실, 은퇴목사·장로실, 당회실, 15개의 부목사실과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공사를 마치고 2012년 1월 1일 입당했다. 새 예배당 입당과 동시에 교회 명칭도 공모했다.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에 근거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치유하는교회’로 개명했다.
나는 주님의 소명을 받은 이후부터 사도행전 2장 37~47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라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목회를 했다. 10년 전부터 30~40대를 대상으로 치유 목회를 적용하기 위한 목장과 교구 편성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 당시 가장 역동적으로 목회하던 부목사에게 이 사명을 맡기고 청·장년 치유 목회를 준비하도록 했다. 30대 목장과 40대 목장을 분리, 편성해 교회 주변의 수많은 30~40대 청장년들이 오기 시작했다.
결국 3년 만에 30·40대 교구는 배가 부흥을 이루고 30대 교구와 40대 교구를 각각 분리하게 됐다. 특히 30대는 결혼 후 신혼생활부터 시작해 직장생활, 교회생활의 삼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30대 교구에는 상담치유학을 전공한 부목사를 투입했다. 많은 가정이 자신들의 문제들을 내어놓고 개인이나 가정 상담을 통해 성령님의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면서 심방 때마다 눈물바다를 이룰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30·40대 치유 목회를 정착시킨 다음엔 청년 목회에 집중했다. 청년 목회에는 영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부목사를 투입했다. 그 결과 21년 전 처음 부임했을 당시 200여명 모이던 청년부가 600명까지 부흥했다. 사실 치유하는교회 주위에는 젊은 층이 모이는 대학이나 회사, 청년 문화공간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열정을 쏟아 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적적인 청년 목회가 가능했다.
다음으로 중·고등부 치유 목회가 중요했다. 급변하는 세대 가운데 교회학교에 치유 목회를 적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십자가 복음으로 영과 혼과 육의 치유 목회를 해나간다는 원리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렇더라도 청년까지는 이 치유 목회가 쉽게 접근이 됐지만 교회학교까지는 충분히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학교에서는 고학년일수록 말씀의 은혜와 기도의 능력이 있는 목회자에게 맡겼다. 그 외에도 지적 장애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랑부와 호스피스 사역에 이르기까지 전부 치유 목회를 적용하며 사역해나갔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8) 한국교회에 치유 목회 접목… 해외에서도 크게 부흥
목사·사모 초청 치유 목회 세미나 시작
개척·미자립교회와 홀사모 후원도 앞장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서 치유 성회 열어
김의식(앞줄 왼쪽 열 번째) 목사가 2019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파송 선교사들을 초청해 선교대회를 열고 있다.
나는 치유 목회가 한국교회에 접목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마다 크고 작은 불화와 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부터 전국 목사·사모 초청 치유 목회 세미나를 시작했다. 또 2년 간격으로 호남 영남 충청 강원 지역에서 농촌 전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만(1만명 성도 출석), 천(1000명 사역자 양육), 백(100명 선교사 파송), 십(10개 교회 개척)의 비전’을 따라 교회 개척과 농어촌·도시 미자립 교회 후원을 계속해 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영등포노회 동반성장위원장을 6년째 맡으면서 영등포·경서·전서·진주노회의 미자립교회도 섬기고 있다.
또 총회 농어촌선교회 3대 후원회장을 맡아 4년째 총회 산하 농어촌 교회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에서 목회하고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 교인이 농어촌 출신들이 아닌가. 농어촌 교회 없이 어떻게 도시 교회의 부흥이 가능했겠는가. 그래서 우리 교회도 농어촌 교회 개척과 후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총회 부흥전도단 제42회 대표단장으로 취임했다. 부흥전도단을 통해 총회 산하 교회에 치유 목회를 접목하고, 치유 목회 훈련과 치유 설교를 통해 영적 침체 속에 있는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절감했다. 또 총회에서 소외되는 여성들을 위해 여성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여성의 권익과 여성 리더십의 활성화를 위해 힘써 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 목사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홀사모님들을 위한 목회자유가족협의회 이사장으로 섬기며 그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 왔다.
치유 목회는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가장 먼저 요청이 온 곳은 일본이었다. 2006년 오사카에서 첫 치유 성회를 열면서 외국 성도들도 치유가 절실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회를 인도했고 선교사들의 치유를 위해서도 일본을 방문했다.
또 하나의 선교 요청지는 유럽이다. 예장유럽선교사회에서 매년 부활주일 후 한 주간 동안 선교사 가족 수련회를 여는데 나는 2010년 처음 초청을 받았다. 첫 수련회에서 치유 목회가 큰 호응을 얻어 매년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치유해야 할 선교지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격년으로 가서 수련회를 인도했다.
2019년 교회 설립 50주년에는 우리의 선교지는 전 세계라는 생각으로 교회가 파송한 100명의 선교사 부부를 초청해 치유와 재교육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4300여 외국 선교사님들이 목숨 바쳐 선교하신 덕분에 우리나라가 개화되고 근대화했으며, 민주화·복지화·세계화가 됐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바쳐 선교로 보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43년 동안 목회하면서 선교하는 개인이 축복받고 선교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보아 왔다. 특별히 치유하는교회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선교에도 힘씀으로 오늘의 부흥을 이룬 것이라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19) 부회록 서기로 총회 임원 첫발… 한국교회 위해 헌신
예장 통합 채영남 총회장 부름받아 시작
제103회 총회장 선거에선 발대식 참여해
림형석 목사의 부총회장 당선에도 일조
김의식(오른쪽 두 번째) 목사가 2015년 충북 청주 상당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100회 총회에서 부회록서기에 오른 후 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회 여정에 늘 동행해주셨지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제100회 총회장이신 채영남 목사님께서 부족한 종을 부회록서기로 불러주셔서 처음으로 총회 임원으로 섬기게 됐다. 채 목사님은 전에 듣고 알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성이 깊으셨고 총회 주제인 ‘주여, 화해하게 하소서!’에도 알 수 있듯이 한마디로 ‘화해의 사도’였다. 그래서 총회 안의 화해를 위해 힘썼을 뿐만 아니라 예장합동 총회 임원회와 친교를 시작해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제102회 총회장이신 최기학 목사님께서는 나를 서기로 중용해주셨다. 최 목사님의 ‘마을 목회’는 너무도 소중한 목회 프로젝트였기에 깊이 공감하며 최선을 다해 돕고자 했다. 바쁜 목회 일정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서기 임무였기 때문에 미숙함과 아쉬움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보람 있었던 것은 최 목사님을 모시고 극한 대립 관계에 있던 서울동노회를 화해 및 분립시킨 일과 그 결과 목사 안수 예식안을 만들어 통과시킨 일이었다.
제103회 총회장을 위한 부총회장 선거는 역대 부총회장 선거 중 가장 치열했다. 다섯 분의 후보 목사님들은 모두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난 존경받는 목사님들이었다. 나는 노량진교회 림인식 원로목사님 밑에서 6년 동안 신앙과 목회 훈련을 받은 목사로서 림 목사님의 아들인 림형석 목사님의 부총회장 선거 발대식에 참여해 격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선배이신 목사님들 앞에서 내가 무슨 격려사를 할 수 있겠는가. 순간 성령님께 의지해 “선거에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조직도 재력도 다 무너지고 맙니다. 이번 부총회장 선거에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림형석 목사님이 부총회장에 당선되도록 기도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왔다.
사실 림형석 목사님과 같이 출마한 목사님 중 두 분은 부총회장 선거에 두 번씩 출마했던 분이셨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지만 림인식 목사님의 영적 사단이 뜨겁게 기도하고 합심 합력하여 림형석 목사님이 부총회장에 당선됐다.
림형석 목사님은 총회장 취임을 앞두고 나에게 한 번 더 서기로 봉사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나는 그동안 교회를 많이 비웠기 때문에 장로님들과 상의를 해보겠다고 답했다. 돌아오는 주일, 평소에 사랑하고 존경하며 목회에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시던 교회 선임 장로님들을 만나 림형석 목사님의 제안을 전했다. 장로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해주셨다. 서기를 연임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의 영광으로 볼 수 있으니 교회 걱정은 하지 말고 총회 임원으로서 봉사를 계속하라고 적극 권면해주셨다. 나는 장로님들 덕분에 102회부터 103회 총회까지 서기를 연임하며 교단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총회 서기를 두 번씩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총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과 충성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20·끝) 나에게 맡겨진 치유의 사명, 충성 다할 수 있기를…
죽음의 위기서 주께서 덤으로 주신 인생
치유 목회, 치유 강의, 치유 성회 등 통해
나라와 교회 세계 선교 위한 소명에 최선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20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국민일보목회자포럼 대표회장에 취임한 후 직전 대표회장 이철 목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만 20세의 나이에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은 후 어떠한 인간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살아왔다. 그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덤으로 사는 인생, 언제든 나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맡겨 주신 영혼들만 바라보면서 모든 열정을 쏟으며 달려왔다. 내가 혼신의 열정을 쏟은 곳은 가장 먼저는 치유하는교회의 치유 목회이고, 둘째는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부설 치유상담연구원)의 치유 강의였으며 셋째는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와 세계 선교지에 이르기까지 치유 성회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이 되기 위해 힘이나 재물을 쓰지 않았음을 주님 앞에서 당당히 고백할 수 있다. 나에게 맡겨진 치유의 사명에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고소를 당했고 인터넷과 언론까지 나를 공격해 죽이려고 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당신의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고 망했어야 할 목사가 더 잘되고, 무너져야 할 교회가 기적적으로 부흥했으니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께서는 내가 노회와 총회와 한국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 선교를 위해 쓰임 받도록 크신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부어 주셨다. 마태복음 25장 21, 23절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씀이 진리임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된다.
앞으로 나의 사역은 하나님께 다 맡겼다. 주위에서 부총회장 출마를 강권할 때 나는 교회 당회원 수련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인들의 피땀 흘린 헌금을 선거비용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모셨던 림인식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에 절대 폐를 끼치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에 저의 퇴직금을 가불해 주시고, 교인들 가운데 총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금할 기회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당회는 부족한 종을 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지난해 부활주일 새생명초청축제를 앞두고 김명서 인천가좌제일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 세미나를 했다. 김 목사님은 말씀을 전하러 오면서 그의 저서 두 권과 함께 하얀 무명 손수건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는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이 손수건으로 이제는 형님이 한국교회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이 느껴지며 그의 말이 성령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내가 언제까지 어떻게 치유 사역을 할 수 있을지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없다. 다만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소명을 처음 받은 44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내 심령 속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십자가 치유의 복음을 뼛속까지 깊숙이 되새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