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윤(李從允)[1431~1495]은 1462년(세조 8) 생원시·진사시 양시(兩試)에 모두 급제하였다. 1468년(세조 1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469년(예종 1) 영창전참봉(永昌殿參奉)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예빈시경력(禮賓寺經歷)이 되었으나, 그해 임금에게 직언(直言)을 하다 장기현(長鬐縣)[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으로 귀양을 갔다. 1472년 귀양지에서 풀려나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에 올랐다. 1475년(성종 6) 예조좌랑, 1476년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1482년(성종 13)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이종윤은 사간원헌납으로 있으면서 부적합한 관리들의 임명을 반대하였고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 문제를 지적하였다. 또한 흉년에 회례연(會禮宴)을 거행하는 것과 정희왕후(貞熹王后) 초상 때 왕실에서의 불사(佛事) 거행을 반대하였다. 이후 이종윤은 1484년(성종 15)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1485년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1486년 사옹원부정(司饔院副正), 1487년(성종 18)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차례로 지냈다. 1489년 사헌부장령과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는데, 이해 왜구들이 남쪽 해안을 침범하자 임금의 명을 받고 대마도주(對馬島主)를 통유(通諭)하였다. 1490년(성종 21)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종윤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고을의 여러 폐단을 혁파하고 교화에 힘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에 임금이 여러 차례 하서(下書)하여 이종윤의 치적을 칭송하였다. 1492년(성종 23)에는 제주의 백성 양효손(梁孝孫) 등 3백여 명이 상언(上言)하여 제주목사 이종윤의 유임(留任)을 청원하였다. 이에 임금은 이종윤에게 당표리(唐表裏)를 하사하고 유임을 지시하였다. 이종윤은 1495년(연산군 1) 부임지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임금은 이종윤의 부인인 안동김씨의 청원에 따라, 이종윤의 의리를 우대하는 차원에서 정월분 녹봉을 지급해 상례(喪禮)를 치르라고 명을 내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소재 이명박 전 대통령 선대 묘소이다.
통맥풍수에서는 이 묘소의 기운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있는 묘소로 상하 2자리 정확하게 용사하였다.
제왕지지로 사신사가 수려하다.
유좌 묘향
주산
배위 월성 김씨
전순
헌성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