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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기승전결 起承轉結은 더 이상 공식이 아니다(김부회 평론가)
문장을 쓰거나 보도문 등을 작성할 때, 독자에게 문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육하원칙 六何原則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를 기본으로 문장을 작성하면 읽는 이로 하여금 명확한 의미전달이 가능할 것이다. 대체로 신문지면의 기사들은 이런 원칙에 의하여 작성되는 것이 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실을 전달하는 문장이 아닌 거시적인 관점의 문학에서는 현상에 상상과 사유를 포함하여 삶의 인지적인 철학을 기표하는 학문인바 육하원칙보다는 기승전결이라는 문장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기승전결의 명사적인 용법은 글을 체계 있게 짓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문제 제기, 전개, 전환, 마무리의 네 단계로 글을 쓰는 방법을 일컫는다. 한시의 구성 방식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기(起)는 시의(詩意)를 일으키고
승(承)은 이어받아 전개하며
전(轉)은 한 번 돌리어 변화를 주고
결(結)은 마무리한다
특히 절구체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시상을 불러일으키는 기구起句,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승구承句, 급작스럽게 시상을 전환하는 전구轉句, 기승구와 전구의 서로 다른 시상을 연결하면서 더욱 강한 효과를 일으키며 여운을 남기는 결구結句로 끝맺는 방식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기승전결(起承轉結, 영어: introduction, development, turn, and conclusion)
기승전결은 언급한 한시 또는 논설문, 보도문, 시나리오 등등의 작법에서는 필수요소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문학의 경우 완고한 기승전결은 시의 상징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시를 쓰다 보면, 좀 더 엄밀하게 말해 시처럼 시를 쓰다 보면 시 역시 문장의 하나 인 바, 구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몸에 익숙한 글짓기 방식인 기승전결이 먼저 떠오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그 방식에 따르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딱딱하고 정형화된 시 공장 工場에서 나온 붕어빵 같은 시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반면, 기승전결이라는 구조를 과감하게 탈피하여 결승기전 혹은 승기전결의 다양한 시적 구성을 갖고 있는 시를 보게 되면 구성상의 참신함 이전에 작가의 다분하고 의도적인 ‘숨기기’에 매료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익숙하다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더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답습 踏襲의 사전적 의미는 전부터 해 내려오거나 있던 방식이나 수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현대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답습의 배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시 전개 방식으로 인한 독자적 관점의 피로가 누적된 것은 아닐까 싶다. 최근 수년간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면 일부를 제외하곤 전개 방식이나 시적 배경, 시의 수사적 활용 등에 있어 대동소이한 부분을 많이 느끼게 된다. 물론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제목의 난이도와 전개 방식의 특이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대개의 시가 소통, 개연성, 당위성을 꾸려나간 힘 또는 특징이 비슷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하여는 추후 가까운 시일 내에 개별 시 하나하나 비교 분석하여 기고할 것을 약속드린다.
문제는 이러한 익숙한 방식의 기승전결적 시의 구조가 가진 명료성, 의미 전달성, 당위성, 개연성의 원활함에 기여한 것은 대단한 장점이지만 좀 더 다른 방식의 구성은 또 다른 문장적 매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도 지리산 문학상을 받은 정윤천 시인의 다음 시를 보면 그 시적 전개 방식의 특징과 필자의 논리가 부합되는 점을 이해하기 쉬울 듯하여 전문을 인용해 본다.
이사, 뽕짝에서 랩으로
정윤천
캐시밀론 이불을 묶은 요철이 비워주고 오는 방의 쪽창 모양을 닮았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누드로 길에 나온 세간들이 어깨를 한번 뒤
챈다. 두고 온 것들이 멀어질수록 짧아지는 정처를 위하여 용달 씨가 흥
겨워 진다. 아뿔싸. 세상의 모든 노래는 용달 씨를 위하여 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숨을 죽이고 용달 씨의 노래에 귀를 기댄다.
네모나고 세모지고 동그랗고 뿔난 것들 속으로 용달 씨의 노래가 파고든
다.
歌詞가 스민 세간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그가 잠시 목청을 쉰다.
목줄에 매인 주인집 개가 용달 씨 대신 서서히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기
시작한다.
2014년 <시와 경계> 봄호
정윤천 시인
1991년 <실천문학> 등단, 2018 제 13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
시집<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구석> 등 다수
특히 주목할 점은 제 13회 지리산 문학상에 대한 심사위원의 심사평에 잘 들어나 있다.
“그의 시적 모티프는 많은 부분 기억의 지평선 아득한 지점에 묻어두었던 것을 새삼 발굴해 드러내는 형식에 의존한다”
「제 13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자 정윤천 시인에 대한 심사평」일부인용
심사평에 언급한 부분 중 새삼 발굴해 드러내는 형식이라는 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정윤천 시인의 시는(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 실험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시의 본질인 문장의 개연성과 현상의 당위성이 명료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필자가 주장하는 논리적인 형식은 파괴하되 시적 본질은 어긋나지 않게 써야 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좋은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은 수학적의미로 연산의 방법, 수학적 정리 등을 문자와 기호를 써서 일반화하여 나타낸 식이며 동시에 틀에 박힌 일정한 형식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기승전결이라는 답습되어온 말의 표현 방법을 우리는 몸에 익숙하게 간직한 채 사는 것은 아닌지? 그것으로 인해 사고 역시 경직되고 일반화된 사고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가끔 시 창작 강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시는 무엇인가요?’라는 말이다. 답도 많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답이 있는데 답이 없다. 필자 역시 이러한 질문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시라는 문학 장르가 공식으로 풀어갈 수 없는 학문이기도 한 이유이다. 비근한 예로 어느 문예지에서 낙선한 시가 그 해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한 사례도 얼핏 들은 것 같다. 선자의 취향? 선자의 오류? 선자의 편애? 모두 있을 수 있는 변명이지만 한마디로 정의 하면 시엔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신춘문예 당선작이 좋은 시의 기준이라는 것을 절대 아님을 밝힌다.)다만, 시를 쓰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익숙’이라는 말이다. 익숙은 공식이다. 익숙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상상력의 자유를 훼손하며 더 나아가 사유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존하고 있다. 필자가 지금보다 더 아마추어일 때 어느 시인은 시에서 배제하여 할 것들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관념어를 빼라, 묘사만 해라, 이미지화하는 것이 제일 좋다. 당선작을 많이 읽어라 등등의 이야기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에 관한 이수명 시인의 [시학]에 나와 있는 [이미지와 말]이라는 부분을 잠시 인욯해 본다.
이미지 혹은 말
이수명
이미지와 씨름하는 시인이 있고 말과 씨름하는 시인이 있다. 이미지는 묶여 있고, 말은 풀려 있다.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말은 해방되려 한다.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 비판이 더 강력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면, 말에 의한 말의 비판은 막을 수 없는, 커 가는 심연에 대한 말들의 동원 이다. 이미지를 지향하는 시는 구상에 가까워지고, 말들을 운용하려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진다.
언제나 이미지나 말을 찾아 헤매는 시인들은, 이미지나 말들이 침입하는 순간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서 오는 시가 있는가 하면, 아주 멀리서, 뜸을 들여, 힘겹게 오는 시도 있다. 그때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손을 내밀어 끌어야 하며, 그 거리를 단축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떠한 한 순간 혹은 하나의 말을 폭력적으로 가로막거나 잡아채기도 하고, 이미지들과 말들을 새로운 공간에서 혼합, 배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시의 밖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정체를 깨닫지 못한다. 지루한 수작업이 계속 될 뿐이다. 멀리서 오는 시는 이러한 미궁 속에서 대체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시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미지나 말과 씨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험난한 과정임을 암시한다. 이미지나 말은 대개 문을 닫아걸고 있다. 문을 열고 눈앞에 있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 그들이 존재하는 듯이 여겨진다. 그 다른 곳을 찾아 다가가지만, 그 다른 곳은 또 다른 곳에 있다. 시를 쓰는 일은 패배 의 연속이다. 문 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서기 마련인 것이다. 시인에게 는 뇌 속으로 땀이 흐르는 일이다. 하지만 저항이 강력할수록, 강한 폭 포수일수록 그것을 역류한 물고기는 생명력이 넘친다.
「이수명의 시학」일부 인용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존재한다. 공식이라면 공식이며 묘사라면 묘사, 비유라면 비유가 맞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정답을 오답이라고 먼저 생각해 보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다. 시는 움직이는 생명체이며 공감을 먹고 사는 독자라는 층이 분명히 존재한다. 공감할 수 없는 시는 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문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기승전결이라는 무의식에 존재하는 공식을 버릴 때 현대시는 더 많은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많은 시적 구성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전위의 경계를 넘어 중의적이며 다의적인 시적 표현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도형의 법칙
오영록
각종 도형이 담겨있는 상자를 열자 와르르 각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길로 쏟아져 뒹군다
끝없이 굴러가는 것도 있고
한 키도 구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는 것도
같은 모양 같은 크기 하나도 없다
동그라미가 세모꼴에 말한다
왜 한 곳에만 있느냐고 좀 굴러보라고
네모가 원뿔에 왜 가만 안 있고 굴러가느냐고 핀잔이다
네모는 사각에 대하여 역설 力說하고
원은 동그라미에 대하여 목청을 높였다
저들에 대하여 세모는 침묵하고 마름모는 방관했다
네모는 동그라미를 품으려 애쓰지만, 동그라미는 네모를 거부하고
다가갈수록 동그라미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삼각형을 기웃거린다.
잠깐 사이 정삼각형 직삼각형 역삼각형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마름모만 덩그러니 배를 두드리며
시치미 떼고 있다.
오영록 시인은 다작을 많이 하는 시인이며 시적 진실성 내지 진정성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시는 다소 기존 작품보다 구성상의 특장점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혹자는 위 시에 대하여 구성상의 특징보다는 소재를 먼저 언급할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구성의 파격에 대하여 먼저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이 작품 역시 기승전결이라는 구조를 배경에 깔고 있다.
상자 속 각종 도형....................각자의 모습/구르는 것 머무는 것
도형은 각자 존재하지만, 종국의 결론은 상자 속의 도형이라는 점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도형은 상자 속에 들어있는 도형일 뿐이다. 많은 시가 존재하지만 시라는 장르 속의 시라는 말과 비슷하다면 오독일까?
동그라미가 세모꼴에 말한다
왜 한 곳에만 있느냐고 좀 굴러보라고
네모가 원뿔에 왜 가만 안 있고 굴러가느냐고 핀잔이다
네모는 사각에 대하여 역설 力說하고
원은 동그라미에 대하여 목청을 높였다
저들에 대하여 세모는 침묵하고 마름모는 방관했다
묘사는 이지미에게, 이미지는 관념에, 비유는 진술에와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잠깐 사이 정삼각형 직삼각형 역삼각형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마름모만 덩그러니 배를 두드리며
시치미 떼고 있다.
시의 내용에 대한 것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모두 알 수 있기에 배제한다. 결국은 정삼각형, 역삼각형, 어쩌니 해도 도형이라는 커다란 당위성 앞에서는 도형일 뿐이다. 시가 그렇다. 시가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도형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수명 시인이 최근 발간한 [물류창고]라는 시집 속 [물류창고]라는 시를 잠시 인용해 본다.
창고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어요/
창고 밖에 서서 그는 창고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과 이야기해요/
창고에서 창고로 건너뛰어 다녀요/
「물류창고/ 이수명」 부분 인용
개연성의 여백을 뛰어넘어 파격적인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영록 시인의 시가 파격적인 구성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영록의 시에서 진술하고 있는 상자 속의 도형과 필자의 논리를 빗댄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두 번째 작품은 기승전결이 매우 잘 된 작품이며 동시에 공감이 영역이 아릿한 송문희 시인의 [한 끼의 밥]이라는 작품이다.
한 끼의 밥
송문희
을숙도에 바람처럼 머문 적 있다
창을 열면 조각상들 감천항 선박처럼 정박해 있고
매일 고단한 삶 관망하던 나는
바닥에 엎드린 한 사내를 만났다
을숙도 조각공원
한 끼의 밥*이란 이름으로 엎드린 사내
오로지 밥을 위해 세상 앞에 무릎 꿇고 귀를 막았다
천만 근 한 닢 차가운 금속성은
얼마나 달콤한 차가움인지
바닥을 향해 숨죽인 등에서 뼈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같은,
한 번도 환한 것 품어본 적 없던 두 손에
거역할 수 없는 그늘의 시간들
한 겹 한 겹 포개어져 있다
한 끼의 밥 구걸하는 저 빈손은 얼마나 많은 굴욕을 견디었나
주린 배 채우기 위해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야 했다
맨발의 사내
두 손 벌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을숙도 조각공원 김병철 작가의 조각상
을숙도에 머문 적이 있는 화자가 을숙도 내 조각공원에 있는 김병철 작가의 조각상을 보며 느낀 점을 기승전결의 형태로 잘 꾸린 작품이다. 단순히 조각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조각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시인과 시인의 오래된 기억, 기억에서 파생된 아버지라는 이름, 아니 아버지 같은,
아버지 같은,
한 연으로 처리한 아버지 같은, 을 딱 빼놓고 시를 다시 읽어보면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 것이다. 시인의 사물에서 현상을 발견했고 현상에서 기억을 꺼내고 다시 현실을 인식해 냈다. 을숙도라는 지명조차 시적 배경으로 무척 잘 어울리는 어감을 갖고 있다. 조각상의 이름이 한 끼의 밥이라는 부분도 시적 배경과 문장의 당위성을 이어주는 매우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자연스러움 속에 진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개연성에서 출발해 진중한 당위성을 시에 담고 있는 듯하다.
천만 근 한 닢 차가운 금속성은
얼마나 달콤한 차가움인지
바닥을 향해 숨죽인 등에서 뼈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끼의 밥 구걸하는 저 빈손은 얼마나 많은 굴욕을 견디었나
주린 배 채우기 위해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야 했다/
주목할 점은 현상에서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성찰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말이 될지 모르지만, 인식적 자기반성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그저 지나치지 않는 것은 시인의 장점이다. 쉼 없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끼의 밥/ 주린 배/ 바닥을 향해 숨죽인 등/ 차가운 금속성/이 형상화 한 모든 것은
아버지 같은,
이 한 연에 집약되고 응축되어있다. 시는 3연에서 2연을 유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4연에서 1연을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개연성이며 당위성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것이 기승전결이 공식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승전결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한 끼의 밥과 같은 충분히 좋은 시를 만들기도 한다. 다만, 좀 더 다른 관점 좀 더 파격적인 구성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도 좋은 시 공부의 지름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를 만나는 것은
몇 끼를 굶어도 좋을 행운이다. 송문희 시인의 시가 그렇다. 어느 부분을 따로 떼 읽어도 아버지 같은, 이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은 배세복 시인의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을]이라는 작품이다. 누구나 한번 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소재에 멋진 옷을 입힌 작품이다.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을
배세복
가난한 나는 어느 봄날 호기롭게 내 마음을 분양하기로 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계약서에 바로 도장을 찍었다 고요하던 밭고랑엔 꽝꽝 말뚝 박히고 울타리 쳐졌다 내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닌 셈, 그해 여름동안 나는 거름을 잔뜩 먹은 대가로 고구마 순처럼 부지런히 기어 다녔다 또는 들깻대처럼 뒤꿈치 힘껏 들어 올리거나, 그리고 나면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르는 그들 입은 파꽃처럼 활짝 피었다 가을이 오자 저마다 품 안에 부푼 녹말 주머니 품고 그들은 그대로 밭을 떠났다 세간은 사라지고 주소만 덜렁 남은 빈집, 바람은 제멋대로 드나들었다 며칠 내내 마 가을비 내리던 날, 문패는 떨어지고 도랑 이룬 빗물이 비목碑木같은 이름마저 쓸어갔다 나는 주인을 아주 잃었다 그제야 나를 다시 맞아들여야 함을 알게 됐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비 내리는 밭두둑에 서 있었다 두 다리가 서서히 도랑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근친의 비유, 근친의 수사, 근친의 당위라는 말이 있다. 정확한 시의 구성 배경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배세복 시인은 이 시를 쓰기 전 가장 먼저 생각한 점이 자연스러움 아닐까 싶다. 전위적인 시의 형태가 문장에 문장을 덧입히는 방식을 선호한다면 배세복 시인의 시는 문장에서 문장을 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말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상이점을 갖고 있다. 시를 전개하는 힘이라는 말을 종종 하거나 듣게 된다. 시가 힘이 있다. 없다라는 말도 자주하거나 듣는다. 시에서 말하는 힘이라는 것은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다. 대체로 문장을 끌고 가는 힘을 힘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좀 다른 생각이다. 시에서 말하는 힘은 자신의 성찰에 방점을 찍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도적인 중언부언이 아닌 명료한 자기반성에 기초한 말 이어가기가 된다는 것은 시를 탄탄하게 만드는 일이다. 개연성, 당위성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하여 의미 없는 수사를 남발하거나 몸에 맞지 않는 전위의 옷을 입혀 마치 무엇인가 대단한 철학을 발견한 듯한 표현은 사실 시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일 것 같다.
1. 가난한 나
2. 내 마음을 분양
3. 고요한 밭고랑에 말뚝이 박히고
4. 부지런히 기어다니고
5. 그들(물을 주거나 밭을 돌본)이 파꽃처럼 활짝 핀
6. 가을 = 그들= 떠나고
7. 주소만 덜렁 남은 빈집
8. 주인을 아주 잃었다
1~8까지의 전개 과정이 매우 적당하고 자연스럽다. 비만한 수사나 과장된 문장의 전이가 없다. 기승전결의 과정을 정당하게 거쳤으나 빤함이 적다.
그제야 나를 다시 맞아들여야 함을 알게 됐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비 내리는 밭두둑에 서 있었다 두 다리가 서서히 도랑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배세복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필자는 필자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를 맞아들여야 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슬픈 것인지? 좋은 것인지? 몰라/ 는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누군가 상실의 시대라고 했다. 나는 나를 분양했지만 정작 나는 내게 무엇을 분양하려고 한 것인지? 어쩌면 상실된 나를 되찾고 싶은 마음속 저 기저 모를 깊은 곳의 아우성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적 긴장감은 다소 밋밋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유적 긴장감이 풍부하다. 표현적 긴장감이 아닌(일종의 수사적 기법에만 충일한 것이 아닌) 시=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 삶의 긴장감이 자연스러움을 빌어 조밀하고 침착하게 정리된 느낌을 받게 된다. 배세복 시인의 시를 이전에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힘을 빼니 문장이 더 수려하다. 획일화된 관념을 탈피하니 시가 적요하다. 정중동 靜中動의 묘미를 시에서 발견한다. 어느 가을, 필자가 바라보는 하늘의 한 컷을 뚝 떼어 가져간 듯하다. 필자 역시 두 다리가 서서히 도랑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그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기승전결의 몸에 익은 무의식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에서 한 걸음 뒤로 혹은 한 걸음 앞서가 좀 더 침착한 전위를 모색해 보자는 말이다. 어느 공익광고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장애는 다름이 아니라 다양함이다.” 필자는 이렇게 의역하고 싶다.
“기승전결은 더 이상 공식이 아니라는 말은 다름이 아니다. 다양함이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출처] (평론) 기승전결 起承轉結은 더 이상 공식이 아니다 - 김부회 시인, 평론가 (다시올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