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 속 전언 외 1편
권영옥
푹우가 칠 때면 마음 속 폐선 한 척이 떠오른다
하반신이 주저 앉은 배는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태풍을 보고 뻘 깊이 숨는다
유폐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유월 갑판에는 뇌우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쳤고
아픈 것도 잊은 배는 반항심에 불타올라
풍랑 속으로 풍덩,
폭풍의 부리가 배의 밑바닥을 쪼개버렸다
많은 것을 달고 사는 몸일수록
부리를 멀리하는데
그날 그는 왜 분간없이 행동했을까
아랫배가 꿀렁거리는 것을 보며
화를 앞 세우기보다는 묵언이 한 수 위라고 적은 나는
두루마리를 병에 넣어 그날의 바다로 띄운다
검은 리본을 단 병은 바다 한가운데
배의 영혼에 닿아
겹쳐진 흰 칸나꽃을 펼친다
차분해진 영혼이 흰 깃발을 타고 날아와 폐선의
바닥에서 숨을 고른다
안식이 깊다
사람 도서관
한 줄 문장으로 생을 압축할 수 있는 돈벌레가
법전 속에 끼여 목을 떨어뜨리고 있다
부도의 내리막길을 막야야 하는 그는
빈 구멍만 보아도 놀라고,
수렁만 봐도 허우적거린다
진흙뻘에는 앞선 발자국이 흩어져 있고
부러진 각목 사이로 피묻은
신체포기각서가 피부처럼 붙어서 너덜거린다
호루라기 소리, 수갑의 금속성
이 문장에 이르면
나는 의자에 등을 묻고 저탄 같은 생을 생각한다
세상 모든 문어발은
나를 통과하면 든든한 다리로 변할 수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의 날들
가난이 창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날아간다고 했던가
호적에 붉은 빗금이 쳐지고
혼자서 시멘트 바닥에 누워야 하는 여자는
몇 밤이나 한댓잠을 잘 수 있을까
판례를 덮은 후 창밖을 본다
도서관의 돈벌레들이
죄다 노란빛의 모과 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본다
권영옥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3년 시경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청빛 환상 모르는 영역 외.
비평서 구상 시의 타자윤리 탐구 비시간성에 의한 그림자 시학 외.
두레문학상 수상. 현재 문예비평지 창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