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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왕상19:1-8)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놀란 군중들이 그들을 신처럼 추앙하려 할 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 외에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밝히면서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증거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즉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비폭력 투쟁을 통해 흑인 인권 회복을 위한 일을 시작했을 때 당시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괴롭고 힘들 때면 늘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찬송을 부르며 전진해 나갔다고 합니다.
오늘은 말씀 서두에서부터 여러분도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를 마음 깊이 새겨 두시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우린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충고합니다.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면 뭘 할 수 있을까요?
직장이 없고 직업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건강치 못해 큰 힘 한 번 제대로 쓸 수 없는 형편이라면 뭘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을 ‘할 수 있다.’는 다짐으로 산다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게 또한 인생입니다.
잘 아시는 명언 중에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맥아더 장군이 말했다고들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 자연 과학을 영어로 가르치며 성경을 배부하고 기독교에 대해 강의했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교수가 먼저 했던 말로, 그런 말을 했던 의도는 ‘Boys, be ambitious in Jesus Christ.’로 ‘주님 안에서’를 강조했던 믿음의 권면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단순히 ‘할 수 있다.’고만 하는 것은 당장에 약간의 도움은 될지언정 인생이 바뀌는 결과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원치 않는 인생을 바꾸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는 말 뒤에 ‘in Jesus Christ’ 즉 ‘주님 안에서’까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누구의 인생이라도 성경이 약속한 결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이미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고,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자 하시나 할 수 없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세요. 그러나 인정하는 단계로만 끝내지 말고 예수님이 붙잡아 주시면 할 수 있음까지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살이에선 우리가 철저히 계획하고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예기치 못한 시험과 환난 속에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졌다는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일어서고, 재기하고,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은 / 내 편이시다.”
그리스도인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말을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현실입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갈멜산 정상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갈멜산에서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이방인 왕비 이세벨이 복수를 선포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피신해야 했고 로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는 중에 ‘언제까지 도망 다녀야 하나?’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을 생각하다 보니 생각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사느니 죽기를 소원하다가 피곤에 지쳐 깜빡 잠이 들게 됩니다.
본문에서 이 장면까지만 놓고 보면 참으로 얄궂은 것이, 어제의 승리의 용사가 오늘은 처량한 노숙자가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보시니 어떤가요? 인생이 ‘할 수 없다.’에서 헤어날 길이 없게 되면 본의 아니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죽어야 할까요? 아니면 죽지 못해 살아야 하나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본문을 보세요. 엘리야가 잠 들었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급파하셨고 그렇게 보냄 받은 천사가 그를 찾아와 떡과 물을 주며 잠을 자게 해서 엘리야의 기력을 소생시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엘리야는 기운을 차렸고 다시 일어나 호렙산으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각 사람에게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이 넘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항상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패할 가능성이요. 또 하나는 성공할 가능성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어제의 성공자일지라도 오늘의 실패자가 될 수 있단 말이고 반대로 어제는 실패자였지만 오늘은 그 실패를 딛고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공자였다가 실패자가 되는 건 누구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실패자였더라도 성공자가 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이 ‘주 안에 있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나 인생이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그랬지만, 제가 설교할 때면 여러분들에게 한번 따라 하시라는 말씀을 드릴 때가 자주 있습니다. 왜일까요?
기억하시라는 겁니다. 명심하라는 거고, 믿음 생활을 하는 중에 다른 건 몰라도 그간 여러분이 따라 했던 말 중에서 어느 게 됐든 ‘나는 이거 하난 믿는다.’는 신앙의 확신 즉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믿겠다고 다짐한 그 고백만이라도 믿으시라는 겁니다.
티비 프로그램 중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라는 게 있던데, 믿음도 그러합니다. 오늘 따라 하셨던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든 지 혹은 이전에 여러분이 따라 하셨던 고백들 중에 어느 하나만이라도 잘 기억했다가 그것만 잘 믿어도 여러분의 믿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시작되기만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엔 겨자 나무만 한 믿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세상만사가 꼭 내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닐지라도 분명한 것은 세상 어떤 일이든 모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너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자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 좋으려면 어찌 보면 ‘나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에겐 하나님께 간구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게 되고 우린 인생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시련과 어려움이 있다 해도 ‘아! 지금이 나 혼자만으로는 안 되는 때구나.’를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잘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는 않지만, 종종 시련을 묵인하시는 이유도 결국엔 하나님은 ‘믿음대로’만 역사하실 수가 있으시기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게 하시려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본문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구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했으면 실수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설사 사람들이 다 내 곁을 떠나는 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오히려 나에게 찾아오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보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지 못해 낙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찾아오셔서 그의 고기잡이 일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실패자를 외면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슬금슬금 피할지라도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내 힘만 의지하면 나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과 둘째,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서는 항상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는 질문을 해보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과연 좋은 소식이라는 복음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요?
성경의 약속을 보면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결코 망하게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 좋은 소식인 겁니다.
여기서부터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장 큰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가장 큰 능력을 얻게 될 것이고, 가장 큰 고난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의 문제도 아니고, 질병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100% 믿지 못한다는 것이 문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찌해야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걸 되게 할 방법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겐 꽉 막힌 상황에서도 ‘탈출구’와 ‘비상문’이 열릴 것입니다. 또 ‘나는 길이요’라고 하셨으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예수님만 믿으면 살길이 생긴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에서 우린 엘리야를 통해 꼭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비록 죽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 극한 고통의 순간에 있긴 했지만. 정말 죽겠으면 ‘죽어버리자.’ 했으면 될 것을 본문을 보실 때면 여러분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향해 죽여주시기를 ‘기도했다’는 점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내용만 놓고 보면 그는 소위 ‘개떡같이 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땠습니까?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찰떡같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말에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 있듯이 표현이 좀 거칠긴 해도 우리 기도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도 낙심하거나 불평하려 해도 그것들을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됐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다 기도가 됩니다. 그렇기에 ‘못하고, 안 한 기도’는 있어도 ‘잘 못한 기도’는 없습니다.
어떤 기도가 됐든 하나님은 어떻게 들으신다고요?
찰떡같이 들으시고 정녕 내가 원했던 것들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쯤에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자면, 어차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거라면 엘리야처럼 죽기를 위한 포기와 체념의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도가 고난 극복과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 되게 하시기를 권면을 드립니다.
셋째로 본문은 위로와 격려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낙심한 엘리야를 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소개했었지만, 미국의 어느 작은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 핍박이 심하고 고통만 겪게 되자 결국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깊은 밤 사무실에서 사직서를 쓰며 눈물로 기도하는데 옆에 붙은 예배당에서 누군가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할머님 성도 몇 분이 둘러앉아 ‘하나님 우리 목사님 불쌍합니다. 하나님이 힘 주시고, 우리 목사님 맘 상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해 주시라’고 눈물을 쏟으며 중보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목사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은혜의 찬양이 울려 나왔다고 합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 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날 위해 기도하는 그 ‘누군가’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로마서 8:26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정말 힘들고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그 누군가’가 되어 주셔서 날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우리에게 사람의 위로나 도움이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가장 든든한 위로자시요, 가장 신실하신 중보기도자가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더 따라 하세요.) “하나님이 / 내 편이시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에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로부터 그 손길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젠 우리 차롑니다. 이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지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세요.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고.
이미 나를 향해 손 내밀어 주신 하나님께서 내어민 내 손도 잡아 주실 줄로 믿으세요. 반드시 예수님께서 내 손도 붙잡아 주십니다.
믿으세요. 모쪼록 지금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복 주실 때 다들 꼭 그 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