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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업적을 높이 사 13세기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Ata-Malek Juvayni, 1226~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를 통해 칭기즈칸에게 유사 이래 그 어떤 제왕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세계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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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칭기즈칸의 뿌리가 우리 조선민족이라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놀랍게도 칭기즈칸은 발해(渤海, 698~926)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 발해 제2왕계의 시조)의 19대손이다. 이번 호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240년경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에는 칭기즈칸의 선조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족보가 실려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칭기즈칸에서 10대(代) 위에는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알룬 고와에서 다시 10대 위로 올라가면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지금도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푸른 늑대’다.
그런데 칭기즈칸과 그 조상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는 왜 ‘비밀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비(秘)’ 자가 들어 있을까? 그 이유를 보여줄 작은 단서를 하나 제시한다. 우선, 칭기즈칸이 자란 나라를 당(唐)대에는 ‘돌궐(突厥)’, 송(宋)-요(遼)-금(金)대에는 ‘조복(阻)’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자신이 건설한 나라에 처음으로 ‘몽골(蒙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그의 백성들은 그에게 ‘칭기즈칸’이라는 왕호를 바쳤다. 이들 나라 이름, 칭기즈칸의 이름, 그에게 부여된 칭호는 모두 몽골 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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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 주는 사서들이 있다. 칭기즈칸의 족보, 곧 아랍-투르크어로 ‘샤자라(Shajara)’다. 이 족보는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세운 일칸국(Il Khanate)의 가잔칸(Ghazan Khan)이 1310년경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에게 자신의 족보인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페르시아어로 다시 쓰게 한 <역사 모음(集史)>과 티무르제국의 4대 칸 울룩 벡(Ulugh Beg, 1394~1449)이 역시 페르시아어로 쓴 <사국사(Tarikh-i Arba’ Ulus)>다. 이 계보는 그 후 17세기 우즈베키스탄의 히바칸국 황제인 아불 가지칸이 쓴 <투르크의 계보(Shejere-i Atrok)>에도 나온다.
몽골 왕가의 족보를 실은 <역사모음>과 <사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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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일한(Il Han) 시대에 ‘몽골과 타타르 종족 간의 대 전쟁’(<사국사>)이라고 부르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역사모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키르기즈와 타타르 동맹군과 몽골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에서 몽골은 대패했다. 일한도전사하고 오직 두 사람, 키얀과 니쿠즈만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아내와 몇 명의 시종을 데리고 적을 피해 ‘아르카나쿤’이라는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세월이 지나 이 둘의 후손이 불어나 그들이 몽골족과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우선 <역사모음>의 기록을 보자.
<역사모음>에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는 ‘아르가나쿤(Arganakun)’ 이야기와 함께 ‘투르크와 모골(몽골의 투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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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을 제외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이 두 가족은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다. 그곳의 이름이 아르가나쿤이었다. (…)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이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해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를 비롯하여 오늘날 동서양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보통 ‘에르게네쿤(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했다.
“오래전 일칸(El 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bi n Faridun)은 타타르칸(Totor Khoni)인 세빈치칸(Sevinch Khon)과 동맹해 모골 종족을 공격했다. 일칸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일칸의 아들 카욘(Kayon)과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이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쿤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다른 부분은 <역사모음>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따르면 그 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불렀다. 이들이 바로 <역사모음>에서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다. 눈여겨볼 점은 <역사모음>은 일칸을 언급하지 않고, 키얀과 니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칸의 선조인지 밝히지 않은 데 비해,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씨가 칭기즈칸의 선조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한’ ‘키얀’ ‘니쿠즈’ 등은 과연 누구인가? ‘아르카나쿤’은 어디인가? 또 이 전쟁은 어느 전쟁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역사모음>의 키야트씨, 곧 <사국사>의 키요트씨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키요트는 놀랍게도 ‘걸(乞)’씨의 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 자전은 이 글자를 ‘去(거)-訖(흘)’ 반절(反切), 곧 우리말 소리로 ‘걸’이라고 적었다. 당시 남송인들은 ‘걸(乞)’을 ‘키요트(khiot/qiot)’ 라고 발음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이 ‘걸(乞)’을 성으로 쓴 인물이 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대조영의 선조들은 고구려-말갈어, 곧 우리말 ‘클(大)’씨를 한자의 소리만 빌려 ‘걸(乞)’씨라고 했고, 이를 대조영이 같은 뜻의 한자인 ‘대(大)’씨로 바꿔 쓴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성은 ‘걸씨(乞氏)’, 곧 ‘클씨’라는 말이다.
그러면 키얀의 아버지는 일칸은 누구인가? <구당서>와 <대씨대동보> 등은 걸씨 가문 대조영의 아우 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둘 가운데 일하가 바로 일칸이다. ‘일칸’과 ‘일하’는 비슷한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걸(乞)’씨 성을 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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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모음>은 키얀을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의 몽골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몽골어에는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이나 같은 소리를 가진 낱말이 없다. 왜냐하면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는 제3의 언어, ‘말갈어’였기 때문이다.
한자에 ‘(세차게 흐르는) 산골 물 간(澗)’ 자가 있다. ‘간’자의 뜻은 정확히 <역사모음>의 키얀이라는 말의 설명과 일치한다. 이 간 자의 고구려-말갈어 발음이 바로 키얀이다.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는 사실 말갈어, 곧 고구려어였던 것이다. 결국 키야트, 곧 걸씨 성을 쓰는 키얀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다.
놀랍게도 그는 발해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죽은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이다. 즉, 대무예의 적손인 셈이다. 도리행(都利行)의 일은 <구당서> 등에 적혀 있으나, 그 아들 이야기는 동방사서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모음>과 <사국사> 등은 니쿠즈에 대해서도 기록해두었다.
<역사모음>과 <사국사>는 니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도리행과 같은 소리다. <송본광운>을 보면 도리행의 8~9세기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行)’은 ‘항렬(行列)’의 경우처럼 ‘항’으로도 읽는데, ‘항’의 8~9세기 발음은 ‘캉(khang)’이다.
결국 “‘니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한다”는 기록은 니쿠즈가 자신에서 비롯된 가계를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도리행이 대무예의 맏아들로, 당나라에서 독살당하지 않았다면 차기 발해 왕이 되었을 인물인 만큼 도리행을 가계의 시조로 받드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아가 왕이 되지 못한 왕가의 적손이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도리행의 아들로 생소한 이름을 가진 니쿠즈는 누구인가? 니쿠즈는 우리말로 ‘님금’이다. 16세기에 씌어진 <시바니의 書(Shibani-name)>는 칭기즈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이 책은 니쿠즈를 ‘데르리긴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데르리긴한은 <역사모음>과 <사국사>에 등장하는 ‘다를라킨 한’이고, 발해식으로는 ‘도리행 가한(可汗)’이다.
또 <몽골비사> 등에 따르면 니쿠즈와 같은 이름을 쓰는 후손들도 있어 ‘네군(捏昆/날군)’ 또는 ‘링쿠(領忽/령홀)’라고 도 한다. 이들 이름은 과연 무슨 뜻인가? <역사모음>은 ‘네군’ 또는 ‘링쿠’와 같은 말을 두고 “링쿰(lıngqum)이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 평민들은 ‘링쿰’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적었다.
이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몽골 평민들과 달리 황가의 성원이나 귀족들만 링쿰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왕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랍에 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즉, 아미르=링쿰=‘군주(임금)’라는 의미다.
또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원나라 때는 양자강 이북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지나를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바로 키타이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한인(漢人)’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자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거란 남쪽사람)’, 곧 ‘남인(南人)지역’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이때 ‘키타이(거란)’는 이미 사라졌고, 그 땅에는 발해를 이은 조션(女眞)과 고려가 있었다. 따라서 <역사모음>이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어가 아니라, 마르코 폴로 시대에 가까운 고려-여진어를 말한다. 고려-여진어로 ‘군주’를 뜻하는 말이 ‘님금/링쿰’이고, 니쿠즈는 말갈어(곧 우리말) ‘님금’의 몽골-페르시아어다.
정리하자면 <사국사>에 등장하는 ‘일칸의 양자 니쿠즈’는 우리 말로 ‘님금’이라는 사람이고, 발해 무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한)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대씨 왕가의 계보도를 그릴 수 있다.
<사국사>가 일칸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칸(Tengiz Khon)은 또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텡기즈칸’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이 쓴 ‘진국 공’이라는 칭호다. 그렇다면 텡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 혹은 ‘진국공(震國公)’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국사>는 일한, 곧 우리나라 대씨 족보의 일하(壹夏)에 해당하는 인물의 아버지가 ‘텡기즈칸’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때의 텡기즈 칸은 대조영이 아니라, 그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을 말한다. <신당서> <구당서> <대씨대동보> 등의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에서 보면 일한, 곧 일하(壹夏)의 아버지는 분명 대야발이기 때문이다.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르면 ‘진국왕(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칸’인데, 300년 후인 14~15세기에 기록된 <사국사>에 적힌 ‘텡기즈칸’은 자음접변을 거친 말이다. 이것이 ‘칭기즈칸’으로 바뀐 것이다.
고구려의 잔얼(殘孽)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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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보자. 기원전 1세기 시조 주몽(朱蒙) 이래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高句麗)는 중앙아시아와 인도-페르시아, 동로마제국 등 서방세계에는 ‘코라이(Koorai)’ 범어로는 ‘무구리(畝俱理)’ 그리스어로는 ‘무크리(Mukr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남북한을 지칭할 때 쓰는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이름이기도 하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했다.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이때 고구려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 곧 말갈(靺鞨)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였던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끌려가 당나라 영주(營州), 오늘날의 조양(朝陽)에서 29년간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698년경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를 틈타 말골 수령(군왕) 출신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두 아들 걸조영과 야발도 영주를 빠져나와 동으로 말을 달렸다. 이들은 자기네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으로 돌아와 말골(말갈)과 구려(고려) 백성을 규합해 698년에 ‘진국(震國)’을 세웠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로 바꾸었다. 그런데 <일본서기> 등 일본 사서는 3대왕 대흠무가 일본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高麗) 국왕’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이는 발해 왕조가 스스로 고구려를 이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를 비롯하여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견해다.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다.
그 근거가 있다. 발해가 망한 지 약 30년 뒤 쓰인 <무경총요(武經總要)>는 대조영 가문이 ‘부여별류(夫餘別類)’, 곧 부여(夫餘)에서 갈라진 무리(別類)라고 기록했다.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을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이다. 또 대조영 가문이 주몽의 후손임을 말한다. <구당서> 등도 발해 왕가를 ‘고려별종(高麗別種)’, 곧 ‘고려(高麗)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別種)’이라고 했다. 대조영 가문이 고구려 왕족의 가닥족속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이들은 서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같은 뜻의 한자인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대조영 때 같은 뜻의 한자 대(大)씨로 바꾼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전이나 <당문습유(唐文拾遺)>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도 대조영의 가문을 가리키며 “고구려 잔얼(高句麗 殘孽)[대조영]이 무리를 모아(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적었다. ‘고구려 잔얼(高句麗 殘孽)’이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이라는 뜻이다. <고려사>도 그가 ‘고구려인(高句麗人)’, 곧 오늘날의 말로는 ‘고구려 왕족’이라고 했다. 이 기록들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국인(國人: *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마을이던 말골(靺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그러자 당 현종(玄宗)은 사라진 고구려가 다시 태어나는 악몽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는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725년 경 오늘날의 흑룡강골 하르빈(忽汗) 건너에 자리 잡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현종은 이를 위해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해 황실의 성까지 주겠다고 꾀어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흑수부(黑水府)로 삼아 직접통치를 도모했다.
발해의 당 등주(登州) 진공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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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칸 통치 시 그의 둘째아들[사실은 둘째 사촌아우]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대문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 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흑수]와 튀르키스탄(Turkistan)[오늘날 내몽골] 땅으로 떠났다. (…)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러 살지 않고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투르키스탄’은 당 태종 이세민이 돌궐(突厥) 카간(Kaghan)을 겸칭한 이래 오늘날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당시의 돌궐(突厥: 오늘날 몽골리아, 카자흐스탄 등)과 만주·내몽골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인 실위(室韋)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 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大) 도리행(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도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리행은 장안에서 숙위(宿衛)를 강요당하다 728년 4월 갑자기 급사했다. 도리행이 사망하자 당은 예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압록강 하구에서 수군을 출발시켜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를 치게 했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이 <사국사>에 등장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막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 집결한 뒤 바다를 건너 등주에 상륙했다.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개복순은 <사국사>에 ‘타타르 수윤지칸’으로 등장하는데, 당나라로 망명한 개소문(蓋蘇文)의 아들 남생의 후손이다.
당의 반격작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개복순 군대의 반격에 궤멸했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 후 이들의 행방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 해 733년 봄 당 현종은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당 현종은 <사국사>에 ‘키르기즈칸’으로 등장한다. 지나의 사서도 당 왕조 이씨는 원래 키르기즈 출신이라고 한 바 있다.
당 현종은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에 따르면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사국사>가 “타타르[대대로]의 수윤지칸[개복순]과 동맹해 모골 종족에 전쟁을 걸어왔다”고 기록한 일칸의 둘째아들[사실은 둘째사촌동생] ‘파리둔의 아들 투르’[파리땅(勃利州, 부여 땅) 통치자 ‘일하’의 아들]가 바로 대문예다.
동시에 발해 남쪽에서는 <자치통감>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했다. 오늘날의 100만 대군에 필적하는 대병력 10만 명을 동원했다고 하니,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사서에 남아 있지 않다. 동방의 사서들은 “신라군이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고만 기록했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 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타타르 종족’은 곧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귀부해 발해 침공에 협조한 대대로 가문을 말한다.
궤멸당한 발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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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당-신라 전쟁 결과에 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 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같은 전쟁을 기록한 <사국사>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한은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만 살아남아 아르카나쿤 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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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쟁에 패한 키얀과 니쿠즈가 숨어든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이라는 ‘에르게네쿤’은 어디인가? 몽골 학자 빌렉트(L. Bilegt) 등은 “그들이 가서 목숨을 구한 곳은 에르군쿤(Ergun Kun)인데, 이 지방은 (…) 오늘날(…) 에르구네물(Ergu’ne mo’ro’n)과 가까운 (…) 러시아의 아르곤 산맥”이라고 주장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역사모음>의 아르카나쿤은 아르군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 서경(西京) 압록군(鴨綠郡)’으로 나오는, 곧 말갈 구어로 ‘압록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발해가 상실한 땅은 바로 이 압록군(鴨綠郡) 이남지역이기 때문이다. 압록군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보면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투르크어화 하면서 아로간나쿤을 거쳐 아르카나쿤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모음> <사국사>의 전쟁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일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간), 그의 양자 니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의 정체는 모두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또 종족 이름인 ‘모골’은 말갈-발해어로 ‘몰골(馬忽)’, 곧 고구려어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 사람 키얀과 니쿠즈가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아르카나쿤도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그 가문의 후손이자 칭기즈칸의 10대 선조 ‘알란 고와’는 <원사>에 ‘아란 과화(阿蘭果火)’로 등장한다. 이 ‘아란’이라는 관향도 바로 압록강나군(아르가나쿤)의 한 지역인 함경북도 아란(阿蘭)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역사모음>과 <사국사>의 기록과 동방 사서의 기록을 통해 칭기즈칸의 선조가 누구인지, 또 오늘날 ‘몽골 왕가와 몽골족’의 기원을 추적해보았다. 이제 글머리에서 진실을 밝혀주는 세 마디의 말, 테무진이라는 이름과 칭기즈칸이라는 왕호, 그리고 몽골이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칭기즈칸이 칸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을 두고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터무르-진’ 또는 ‘데미르-친’, 곧 ‘철인(鐵人)’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사> ‘태조기’에는 그 이름은 “무공을 뜻한다(志武功)”고 설명했다. 곧, 테무진은 ‘큰 무공의 신’ 곧 고구려 3대 ‘대무신(大武神)’ 왕(王)에게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칭기즈칸’이라는 말의 어원을 ‘왕중 왕’ 또는 ‘가장 위대한, 강력한 왕’이라고 보지만, 몽골어나 투르크어에는 이와 비슷한 낱말조차 없다. 한마디로 속설에 기반한 풀이다. <송보광운>이나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Millenium)>에 근거해 보면 이는 발해 고왕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왕(震國王)’또는 ‘진국공(震國公)’의 옛 소리인 ‘텡기즈칸(Тenggiz Khon=팅기즈칸=팅궤트칸)’의 구개음화인 ‘칭기즈칸’이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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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오늘날 학자들은 송(宋)나라 서정(徐霆)이 쓴 <흑달사략(黑韃事略)>에 따라 ‘몽골’이라는 국명이 ‘멍거(은/銀)’라는 몽골어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페르시아어 사서 <타리히 고지데(Tarikhi Gojide, 선별된 역사)>는 ‘몽골’이라는 종족 이름이자 나라 이름을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붙였다고 기록했다. 자신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말갈어로 ‘몰골’, 곧 ‘말/몰(馬)고을’, 즉 발해-말갈(靺鞨)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테무진(대무신)·칭기칸(진국왕)·몽골(말골)이라는 단 세 마디 말로만 보아도 ‘세계정복자’인 칭기즈칸은 바로 고구려-발해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가문은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지금껏 그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세계제국을 세웠다. 지나 대륙은 말갈(몽골) 왕가가 지나 땅에 세운 나라인 원(元)의 통치령이었을 뿐이었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be part of China)”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한반도가 지나의 일부이므로 남북한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투의 발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정반대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것처럼 청·명·원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약 1300년 전 발해-나당전쟁 때나 오늘날 우리의 남·북한 시대나, 우리 주위의 판도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또다시 발해-당-신라 전쟁과 같은 꼴을 겪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