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9~30 / 흥해야 할 예수님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서 예수님께 가자, 예수님은 새로운 제자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요한도 제자들이 떠나는데 슬퍼하지 않고 예수님이 기뻐하는 그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세례요한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9절 신랑의 결혼식 날 신랑은 신부를 취하여 기뻐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주인공이고 자신은 들러리인 것을 알기 때문에 신랑이 기뻐하는 것으로 자신도 기뻐합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들러리 친구는 요한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에게 갔을 때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신랑 예수님의 친구로서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신랑 예수님이 기뻐하듯이 아주 크게 기뻐합니다. 자기 중심이었던 요한의 제자들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예수님 중심이었던 요한은 너무나 기뻤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로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고 우리는 들러리라고 알야야 합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찌될지라도 예수님이 존경받고 기뻐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나의 영광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립니다.
내가 높아져야 하고 우리 교회가 높아져야 기뻐합니다. 이들은 제자가 떠나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뻐하면 우리는 이래도 저래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보다 복음을 더 잘 한다는 것을 알려서 사도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려고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화가 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화가 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이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보다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 왕은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이 낮아질 때 번민하고 고통하였습니다. 그에게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고,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중심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
신랑과 친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안 될 때 함께 슬퍼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가 잘될 때 기뻐하고 스승이 사랑하는 제자가 잘될 때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기뻐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올라갔을 때 온 나라가 기뻐하였습니다. 현장뿐만 아니라 TV를 보던 온 국민이 아리랑 노래를 함께 부르며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월호가 잠길 때 온 국민이 함께 슬퍼하였습니다. 젊은 고등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혀서 여러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나라와 인류를 위해서 기뻐할 때 더 많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될 때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들과 함께 기뻐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잘될 때 그것이 다 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되찾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면 그 일이 이루어질 때 나의 기도가 응답 되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점점 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점점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에 떠나야 합니다. 그는 헤롯에 의해서 죽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알고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가 망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나를 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망하고자 한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높여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늙고 죽어갑니다. 바람처럼,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꽃처럼 우리의 영광은 떨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꽃이 아름답게 떨어지듯이 아름답게 떨어질 줄을 알아야합니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꽃이 피는 것도 기쁘지만 떨어지는 것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을 마치고 물러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떠나야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아름답게 떠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버리고 홀로 느보산에 올라가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사명을 떠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아름답게 떠나는 뒷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랜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는 것도 천국에 랜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슬프지 않고 기쁘게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지만, 더 좋은 하나님 나라로 가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마치고 죽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임으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