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약기 99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진 서원
서원의 설립에 있어 가장 중시했던 조건은 한적하고 경치가 좋은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서원이 산수가 뛰어난 한적한 산기슭이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 공부와 수양에만 전념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곳에 서원을 건립한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그래서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산천이 수려하고 한적한 장소를 찾다 보니 옛날의 절터를 서원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풍수를 중시했던 고려시대의 절터는 대부분이 명당자리였기 때문이다. 소수서원 자리도 기실은 숙수사라는 이름의 절터였던 곳으로 지금도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나라 곳곳에 세워진 서원 중에는 옛날의 절터를 이용한 곳이 많다. 그 뒤 조선이 막을 내리고 현대에 접어들면서 그 서원 자리나 절터가 기독교의 수련원이 되거나 유명 기업의 연수원 자리로 거듭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연스런 순환법칙인가?
소수서원 경천대소수서원 자리는 숙수사라는 이름의 절터였던 곳이다. 지금도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를 중시했던 조선시대에는 서원을 지을 때에도 배산임수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름난 서원들은 대부분 강변에 있다. 기나긴 낙동강 줄기를 배경으로 한 서원들로는 안향을 모신 풍기의 소수서원,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의 병산서원, 야은 길재를 모신 선산의 금오서원, 김굉필을 모신 달성의 도동서원이 있다. 그리고 남강 상류엔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과, 조식을 모신 산청군 시천면의 덕천서원 등이 있다. 한강이나 섬진강 그리고 금강변에는 이름난 서원이 흔치 않은데, 강경에 김장생(金長生)을 모신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있고 달천의 상류인 괴산군 청천면에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 있었으며 동진강변의 칠보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는 정도이다.
동락서원
낙암서원
병산서원
서원의 설립에 있어 가장 중시했던 조건은 한적하고 경치가 좋은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 공부와 수양에만 전념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원을 세울 때 중시되었던 조건 중에는 배향할 인물을 선정하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 지역적으로 연고를 둔 사람을 배향하였으므로 이황은 도산에, 김장생은 연산에, 남명은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