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함께 12·3 비상계엄 사태
‘대공수사권’ 미끼까지 던지며…尹은 왜 국정원 1차장 찾았나 [정국을 보는 ‘새의 눈’②]
카드 발행 일시2024.12.13
에디터
고대훈
김민상
12·3 비상계엄 사태
관심
‘새의 눈’을 드립니다
② 윤 대통령은 왜 국정원을 계엄에 가담시키려 했나
지난 12월 3일 오후 10시53분. 홍장원(60) 국가정보원 1차장의 비화(秘話)폰이 울렸다. 통신 내용을 암호화해 해킹이나 도청을 막아주는 특수 전화다. ‘대통령님’ ‘[무선보안] 1000번’이 화면에 떴다. 비상계엄 선포(오후 10시24분) 29분이 지난 긴장된 시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국정원에도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우선 방첩사령부에 자금이고 인력이고 지원하라.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이라.
윤 대통령은 계엄과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왜 대공(對共)수사권을 꺼내들었을까. 대공수사권은 이적(利敵)·반(反)국가 행위를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등을 수사하는 권한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이 간첩을 잡는 근거였다. 지금은 그 기능을 빼앗겼다. 500명이 넘는 인력으로 알려진 대공수사 조직도 사실상 와해된 상태다.
탄핵 위기에 몰린 12일 오전, 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에서도 ‘간첩’과 ‘대공수사권’을 재차 강조했다. 여섯 차례 언급했다.
지난 정권 당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박탈한 것도 모자라서 국가보안법 폐지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을 잡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중략) 대한민국을 간첩 천국, 마약 소굴, 조폭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닙니까?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비상계엄 관련 현안 보고를 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 JTBC 캡쳐
간첩과 대공수사권에 대한 윤 대통령의 편집증적 집착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듯하다. 대공수사권 회복이란 회심의 카드를 내밀어 국정원을 계엄의 동조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숨은 의도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이라는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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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다 잡아들이면 대공수사권을 주겠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박탈은 문재인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2020년 국정원법 개정 후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1월부터 경찰로 완전히 넘어갔다. 1961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탄생한 대공수사권이 63년 만에 이관된 것이다. 대공수사권 폐지로 국정원은 국내에서 간첩을 잡지 못하는 정보기관으로 약화됐다.
사실 지난 4·10 총선 때 여당의 승리를 간절히 바란 곳이 있다. 국정원이다. 대공수사권 회복이 숙원이었다. 여당이 승리하면 대공수사권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다.
그래도 윤석열 정권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걸었다. 조태용 국정원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대공수사권 폐지로 간첩 등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개념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현실적·실질적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했다.
여당 정치권에서도 거드는 형국이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9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대공수사권 이관은 (수사 주체) 교체가 아니라 간첩 수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경호 원내대표도 “(의석) 숫자는 모자라도 반드시 대공수사권이 부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계엄 지원-대공수사권 복원’의 거래 시도가 폭로됐다. 국정원의 꿈도 봄날의 헛된 꿈처럼 사라지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비상계엄 관련 현안보고를 마치고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대통령은 왜 국정원 1차장에게 전화했나
국정원은 원장 산하에 1‧2‧3차장 산하로 운영된다. 차장은 차관급 공무원이다. 해외‧대북 정보 분석을 맡는 1차장은 원장 공석 시 직무를 대행한다. 2차장은 대공수사 지원을, 3차장은 대북 공작과 과학‧산업‧방첩 업무를 담당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 선포 전후 홍장원 1차장과 두 차례 통화했다. 계엄 선포 2시간 24분 전, 그리고 선포 29분 이후다. 1차장이란 직책 때문에 홍 차장에게 연락했는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친분 때문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홍 전 차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에게 평소 직접 보고를 자주 했고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차준홍 기자
결과적으로 홍 차장은 윤 대통령의 지시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윤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뒤 정치인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포함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열린 국정원 주요 간부 회의도 별다른 결론 없이 끝났다”고 전했다.
홍 차장은 국회에서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폭로한 직후 경질됐다. 그는 7일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문자를 보내 “분명히 국정원에 지시했는데 한 놈도 안 움직였다니 놀랐겠고, 배신감으로 충격 받았겠죠”라며 “저를 당장 (대통령실에서) 경질하라고 한 게 당연하겠죠”라고 했다.
홍장원 전 차장은 2023년 11월에 임명됐다. 육군사관학교(43기) 출신으로 1987년 임관 뒤 특전사 대테러 특수부대인 707특수임무단 중대장을 거친 뒤 국정원으로 들어가 해외 공작 파트에서 일했다. 2017년에는 주영국대사관 공사를 지냈다.
“홍장원 전 차장과 45년 동안 친구였다”고 밝힌 한 대학 교수는 최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홍장원)는 경남 진해 출신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해군 제독 아버지와 6‧25 전쟁에 참전한 간호 장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대북 담당 블랙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해임됐다.
홍 차장이 지난 6일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 계엄 지시에 반발했다는 메시지를 공개하자 국정원 전직 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를 응원하는 기류가 한때 흘렀다. 국정원 대공수사를 담당했던 한 대학 교수는 기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댓글 수사부터 시작해 과거 정부에서 정치 참여 의혹 때문에 조직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홍 전 차장이 윤 대통령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과거 흑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한 잘한 결정이다.
윤 대통령은 왜 ‘국정원 돈’을 언급했나
우선 방첩사령부를 도와서 지원하라. 자금이면 자금, 인력이면 인력, 무조건 도우라.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직후 이렇게 지시했다는 게 홍 전 차장의 증언이다. 윤 대통령은 왜 국정원에 방첩사에 ‘돈’을 지원하라고 했을까. 이는 국정원이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기는 했지만 간첩 수사와 관련한 예산은 여전히 주도적으로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 예산 내역은 비밀이다. 예산 편성 1년 후 총액만 알려진다. 2022년 기준으로, 국정원 전체 예산은 1조5000억원 정도다. ‘안보비’라고 불리는 공식 예산(8300억원), 비상금 성격의 ‘국가안전보장 활동비’(6300억원), 국방부·외교부·경찰청 등과 함께 쓰는 ‘특수활동비’(2393억원)로 구성됐다. 국정원은 특활비 중에서 방첩사와 정보사 등 군 정보기관에 배분하는 권한이 있다. 윤 대통령의 “자금 지원”은 ‘활동비’와 ‘특활비’를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2024년 예산은 1조40000억원이다.
정보사와 경찰 등 전‧현직 관계자들에 따르면 스파이를 침투시켜 적국 정보를 알아내거나 북한 공작원과 해외에 접선하는 간첩들을 수사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으로부터 예산을 받는다. 기밀 사항이라 영수증이 필요 없는 예산도 포함된다. 공작원 한 명이 한 달 쓸 수 있는 예산이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계엄이 성공하고 방첩사가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하게 됐다면, 국정원이 쥔 정보‧수사 예산을 ‘반국가 세력’을 체포하고 신문하는 데 사용됐을 개연성이 크다. 국정원 출신의 대학 교수는 기자에게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됐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막강한 예산을 쥐고 있는 권력 핵심 기구다. 계엄 등 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내부가 정치적으로 분열될까 걱정된다”고 전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출신인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대공수사권 복원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는 “2011~2017년 26건이던 간첩 적발 건수는 국정원법을 개정한 지난 정부부터 급감하는 추세다. 앞으로 수년 동안은 간첩 수사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고 했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첫 화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 원훈이 쓰여있다. 사진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캡쳐
국정원을 계엄에 끌어들이는 독배
집권당의 총선 패배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탈환은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법 개정 사안으로 민주당이 동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자신들이 박탈한 대공수사권을 민주당이 돌려줄 리 만무하다.
그런 와중에 윤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이면 대공수사권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부르는 독배(毒杯)였다. 박안수 계엄사령관도 계엄 포고령을 통해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체제 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했다. 이런 불온한 제스처들은 대공수사권 이관이란 미끼를 던져 국정원을 계엄에 끌어들이려는 위험한 도발이었다. 독배는 일단 깨졌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9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