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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mp 1. 19번째 만남
― 짹짹, 짹 째잭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군.’
나는 이불안에서 뒹굴 굴러 라디오 위에 놓여진 전자시계를 보았다.
7시였다.
언제나 같은 기상시간. 난 이 틀에 박힌 듯한 생활이 싫지만 은근히 안심도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필요 수면시간과 아침식사, 그리고 등교시간의 아슬아슬한 경계점이 바로 7시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음....... 슬슬 씻어볼까, 이제 제법 싸늘한 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들어선 욕실역시 어제와 다름없이 차가운 바닥과 물방울 자국이 있는 거울을 나에게 선사했다.
대충 비누로 헹구고 나와 어머니께 아침인사를 하고 차려진 따뜻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음....... 역시 조기는 간장이 있어야 된다니까.’
나름대로 아침식사의 오묘한 맛을 즐기며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교복을 빼입고 가방을 챙겨 아직 침대에 계신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나온다.
.......11월이라도 그렇지 갑자기 이렇게 추워지는 건 반칙이라고!
후들후들 떨며 나는 학교를 향한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친구1....... 에잇, 불쌍하니까 이름을 넣어주기로 하자. 준이를 만났다.
“여어.”
“잘 잤냐? 모습이 말이 아니다 이놈아.”
“잘 잘 듯 싶냐....... 어제도 형 때문에 1시까지 공부했다고. 수능도 끝난 주제에 일찍 일찍 좀 자면 오죽 좋아?”
이 녀석은 하루에 한번은 꼭 형 욕을 하는 녀석이다. 난 형이 없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형이란 게 애니에서만큼 좋은 건 아닌가 보다. 집에서 허구한 날 맞는다면 미칠 텐데 이러쿵저러쿵해도 잘도 버티네 이 녀석.
항상 그렇듯 애니나 게임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학교에 다다라있었다.
“아, 준호야, 너 오늘 미술 과제 해왔냐?”
그러고 보니 설명을 잊었다만........ 내 이름은 김준호다. 16세의 건강한 중3이라고나 할까.
“너 꺼 베끼려고 안 해왔는데? 흐흐흐.”
“이 자식!”
투닥거리며 교실에 올라온 (참고로 우리 교실은 3층이다.) 나는 교실의 분위기가 평소와 뭔가 다름을 직감했다. 뭐랄까....... 만화에서 배경에 똑부러지는 글씨로 술렁.......! 이라고 써져있는 듯한 느낌?
“뭔 일 났냐?”
내 앞자리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우리 반에 교환학생이 하나 온단다.
오면 오는 거지 뭐 그렇게 재잘재잘 여자애들같이 떠들어대냐 바보 녀석들.
‘하긴 지금 와봤자 한 2개월 다니고 고등학교 가야 될 텐데 좀 의문이 생기기는 하네.’
떠들어대던 대로 조례시간에 담임이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을 하나 데려왔다.
“자, 자. 조용해라 이놈들아!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게 될 사카가미 료 라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갈구면 뒤질 줄 알아라. 이상!”
.......
.......뭐랄까
.......저 녀석 좀 불쌍하네. 첫 등장을 처참하게 짓밟혔구만.......
훌쩍 담배 피러 나간 담임 덕분에 교정에 혼자 서서 어물쩡거리게 된 그 녀석은 꽤나 특이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제일 특이한 게 바로 은백색의 머리칼이었다. 마치 인형의 그것과도 같이 예쁜 머리칼이었다. 다음은 청록색 눈동자였다. 짙은 청록색의 눈은 흔치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그 눈은 꽤나 차가워보였다. 얼굴도 상당히 반반하게 생긴 것이 척 보면 곱상하게 자란 도련님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니 뭐 혼혈아려니 생각하려고 해도 말이지 저건 좀....... 거의 에이리언 수준이잖습니까. 저 녀석.
빈 자리가 내 뒷자리밖에 없었기에 그 녀석은 쭈뼛거리다가 뒷자리에 앉았다.
아, 뭔가 온다.
곧 폭발적인 반응이 내 뒷자리에 작열했고 녀석은 하나하나 상대하기가 힘들 텐데도 조용한 음성으로 모두에게 대답해주었다.
내 입장에선 시끄러워 잠이 안 와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지만 말이다.
겨우 1교시가 되었을 쯤에야 모인 인파는 해산되었고 난 자유로운 mp3영화관 애니 시청을 할 수 있었다.
한창 재미나게 보고 있는데,
난 불쾌한 이질감을 느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 타는 듯한 시선, 어떻게 좀 해주시지 않으렵니까, 일본인씨.
말해두지만 난 이 녀석의 특이한 용모 때문에 관심을 갖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에게도 좀 예의가 아닐 것 같고....... 그래서 무시하려 했지만 이건 무시하거나 어쩔 상황이 아니었다.
뒤통수가 무지하게 따가웠다.
혹시 이 녀석 나보고 수업 똑바로 받으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훗.
난 내 짝 준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준이도 느낀 것 같았다.
준이는 훗 하고 한번 웃고는 서서히 손을 들어올려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어
손에 쥐고는
애니 시청을 계속했다.
.......이 자식, 내 눈짓을 어떻게 왜곡해서 이해한거냐!
할 수 없이 나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 도움이 안 되는 녀석.
내가 mp3를 일시정지 해두고 홱 뒤로 돌아보자 녀석은 흠칫하는듯했다.
“이봐. 난 말이지, 이 수업시간을 창조적으로 나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라고. 괜시리 알짱알짱 끼어들 생각은 접으라구, 일본인.”
내가 쏘아붙이자 녀석은 되레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했다.
“저기....... 준호상.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혹시 R.O.D가 아닙니까?”
―쿵
“그리고 제 이름은 료 입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준호상.”
아까 본 듯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눈초리만이 남은 그 얼굴 어디서 칼바람 씽씽부는 목소리가 나오는지 원.
하여튼 좀 당황해서 나는,
“게―.”
하고 요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컥, 이게 아니잖아!
“아....... 아 그래, 뭐 이 R.O.D라고 하는 애니, 너도 봤었나보지?”
내가 황급히 수습하자 녀석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저는 OVA판까지 다 봤습니다.”
“컥, 너도 어지간히 애니 좋아하나 보다?”
“물론입니다!”
자신 있는 눈빛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녀석은 내게 말했다.
아, 이 녀석. 왠지 좋은 녀석일 것 같아. 후후
난 이 료 라고 하는 녀석과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후, 다시 소개하도록 하지. 난 김준호라고 해. 잘 부탁해 료.”
내가 내민 손을 꽉 잡으며 료는 답했다.
“예, 사카가미 료 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준호상.”
이렇게 아름다운 우정이 싹트는 장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란 말인가!
우리 둘이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쥐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뒷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장준 이 녀석 눈치 더럽게 없.......’
돌아본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가 선생님의 손에 놓인 내 mp3와 자고 있는 준이의 모습이었다.
.......허허,
두고 보자, 망할 녀석.
속되게 말하자면, ‘졸라게 얻어터지고 온’ 우리 셋은 급식실 앞에서 잡담을 나누며 줄을 섰다.
―물론 준이의 옆구리에는 나와 료 에게는 없는 멍이 두세 개 더 있었다.
꽤 오래 얘기를 나눈 결과, 나는 녀석이 무사가문의 아들이며,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원정 수행을 하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원정 수행이라는 게 또 정신 수양의 일종이라나....... 다른 인종의 무리에 껴서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녀석, 생각보다 무지하게 재미있는 녀석일세. 허허허.
다행스럽게도 녀석도 나를 그리 나쁘게 생각지는 않는 것 같다.
“어, 줄이 벌써 없어졌네?”
알콜 소독을 받고, 급식판을 들어 급식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 녀석의 얼굴은 호기심 반, 의문 반으로 복잡한 심정이 투영되어 보였다.
그도 그럴게, 우리 학교 급식 그다지 먹을 만한 게 나오는 날이 별로 없거든. 흐흐흐.
료는 생선 통구이를 한입 대더니 안색이 창백해져 급식판을 저 멀리 밀쳐버리고 연신 침을 뱉어댔다.
생선 좋아한다는 일본인들의 리액션을 저 정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생선요리라니, 각성하시라구요. 급식부원 아줌마들. 난 1학년 때 무리해서 이거 먹다가 목구멍에 가시가 걸려서 그야말로 피나도록 식도를 헤집고 뒤져야했었단 말이지.
결국 우리는 반찬에도, 국에도 생선을 처넣은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내며 매점으로 가야만했다.
“아, 매점인가요. 일본에도 이런 게 있어요.”
“그래? 여하튼 내가 메뉴에 정통하니까 가서 뭔가 먹을 것을 좀 사올게.”
웃으며 말하는 나의 옷소매를 꼭 잡은 료는 나에게 속삭였다.
“혹시나 양갱이 있다면 그걸 부탁해요. 많이요.”
너무나 진지한 어조에 얼떨결에 끄떡이고 말았다.
후후, 녀석. 이 정도는 먹어야겠지?
나는 바글거리는 시꺼먼 놈들을 파헤치고 들어가 나도 먹을 겸 오래 먹을 요량으로 영양갱을 8000원어치 사서 나왔다.
“자, 사왔어. 입에 맞을지는 미지수다만....... 꽤 괜찮다고”
“감사합니다. 준호상.”
의외로 영양갱을 한 입 맛 본 녀석은 미친 듯이 먹어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돈 아끼는 준이가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하나 들고 있던 영양갱을 료에게 쥐어주고 초코빵을 사올 정도로 녀석은 보는 사람이 다 뱃속이 괴로울 정도의 많은 양의 양갱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너....... 양갱 무지 좋아하는구나.”
내가 하얘져서 묻자 료는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폭주를 하고 말았네요. 배도 고프고 해서 그만.......”
무슨 양갱섭취욕구폭주냐.
몇 개를 처먹은 거야 네놈!
나는 내 주머니의 empty싸인을 애써 무시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학원에 가기 위해 준이와 교문을 나섰다. 준이의 집과 내가 다니는 학원이 퍽 가까이 자리하기에 같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안 그래도 옆자리이건만 서로 신물 나게 보게 된다, 이 말이다. 무슨 커플도 아니고.......
아, 갑자기 피곤해졌다.
누가 네놈이랑 커플이야?
실없는 생각을 하며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즈음, 어떤 녀석이 내 이름을 불러댔다.
“준호상~.”
.......너희 나라에서만 해, 그런 건.
말 할 필요도 없이 군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 녀석은 료, 녀석임이 자명했다.
“준호상, 어디에 가시는 겁니까?”
내 옆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녀석은 물어왔다. 꽤나 뛰어온 모양이다.
“나야 학원에 간다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주자 녀석은 같이 가자고 매달렸다.
이 놈아, 대체 남의 학원에는 와서 뭘 어쩌려고!
“이 놈아, 대체 남의 학원에는 와서 뭘 어쩌려고!"
아, 이것은 생각과 언행의 일치......! 순간적인 반응으로 날 이런 고차원적인 경지로 이끌어준 녀석에게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나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습니다. 제게 한국의 학원을 비롯한 요모조모를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녀석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했다.
윽....... 꽤 그럴듯한 이유를 끄집어내고 있잖아 이 녀석, 제법이다. 허나!
“그 정도는 혼자서 하라고. 애기도 아니고....... 뭣하면 준이를 데려다가 써먹던지.”
“무엇이? 나 역시 집에 튀어가서 형이 오기 전에 한편이라도 더 많은 애니를 봐야 한단 말이다!”
놀랍게도, 이런 우리의 반박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쟤들 봐봐, 일본인이라고 막 무시하고 있어.
―저런 시대착오적 발상을 하는 놈들 같으니.
―동네 구경이 뭐 그리 어렵다고 저러냐? 쫌스럽게.
―그까잇 학원 한번 데려다 주면 안 되나? 저것들 저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짠돌이들이네.
―쑥덕쑥덕.......
―속닥속닥.......
―.......
이런 수군거림의 폭풍의 눈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우우....... 짜증나.
에잇,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데려다 줘버려? 마침 오늘은 과학이로군. 그 선생님이라면 이런 진기한 상품을 마다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지.
“알았어, 알았다고. 따라와라 임마.”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군중의 구설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녀석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후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준호상.”
.......방금 이 자식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띄워진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훗, 보통 내기가 아니로군, 이 녀석. 군중심리를 이용하다니. 인정하기 싫지만 당한건가.
묘한 패배감에 젖은 나와 준이는 터벅터벅 학원으로 향했다.
20여분을 걸어, 나와 료는(도중에 준이와는 헤어졌다.) 학원 건물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 우리는 난생 받아본 적 없는 수많은 여학생들의 눈길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닌 료가.......
에잇,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아!
에잇,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아!
에잇,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아!
같은 문장을 삼회 복창한 후에야 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은근히 머리색도 튀는데다 내가 생각해도 그럭저럭 생겼으니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봐야겠지만, 그렇겠지만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괜히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그 녀석을 한번 째려봤다.
“?”
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무사가문이라며, 살기도 느끼지 못하는 거냐. 뭐 못하는 편이 나로서는 편하지만 말이지. 으헤헤헤.
아차, 이미지 관리해야 되는데! 으헤헤헤라니! 하하하 정도로 정정해주세요!
.......난 지금 누구한테 뭘 말하는 거지?
.......하튼
우리는 4층에 도착해 내린 후, 학원용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과학 교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나와 료가 교실에 들어서자, 과학 선생님은 나에게 인사하려다 말고 우뚝 서서는 료를 바라보며 당황스럽게 외쳤다.
“너....... 너는!”
***
일어나 보니,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너무 늦게 자서 그런가, 평소보다 늦잠을 자버렸다,
“이래서야 데몬◯인도 못 보잖아. 왜 늦잠 자버린거냐, 나.”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며 어제의 꿈을 떠올려보았다.
“후우, 역시나.”
요 몇 주일간, 나는 같은 내용의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불행한, 끔찍한 느낌의 꿈.
비명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피육(披肉)의 소리....... 그리고 깨어진 무수한 약병들과 사방에 뿌려진 피.
내용은 대충 이랬다.
내가 어떤 성에 있었는데, 나의 수하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수하들을 죽인 무리가 마구 문을 두들기며 고함하는 것이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하고.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나의 음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그것이 나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불안과 분노, 안타까움 등의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그 누군가를 기다렸다.
누구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항상 그쯤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잘 기억해보니 오늘 꿈은 뭔가가 달랐다, 들어온 누군가를 쳐다보는 데까지 진도가 나간 것이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새하얀 은백색의 머리칼의 칼을 든 사내였던 것 같다. 얼굴에는 복면을 써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두운 얼굴에서 빛나던 청록의 눈빛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아~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추태냐. 그런 판타지스러운 꿈을 다 꾸고. 하지만 리얼하기가 이를 데 없단 말이지.......”
중얼거리며, 나는 대충 아침을 때우기 위해 토스트를 구웠다.
“자, 암울한 꿈은 일단 제껴 두고, 아침을 먹어야지! 오늘은 특별히 프렌치토스트다!”
달걀을 풀어 순식간에 구워서, 순식간에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파하~ 나의 실력은 역시 아즈△ 수준이란 말이지! 우하하하하.”
괜시리 기분이 들떠서, 그동안 미루었던 빨래들을 세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집구석 정리를 좀 하다보니 어느덧 4시가 되었다.
“슬슬 가보지 않으면 지각하겠군. 다녀올게 세이□!”
가방을 챙겨 나오며, 나는 신발장위에 놓여진 세이□ 피규어를 향해 소리쳤다. 에이프런을 입은 세이□였다. 후후후, 다녀오세요~ 성호씨~ 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자, 오늘도 우매한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보실까!
―덜컥,
차문을 닫고, 난 잠깐 동안 생각에 빠졌다.
혼자 사는 것은 외롭다.
외로워서 게임을 한다.
게임을 해서 2D캐릭터들이 좋아진다.
2D캐릭터들이 좋아서 피규어를 산다.
피규어를 사서 의인화한다.
의인화시켜서 인격체로 의식한다.
집에 인격체들이 많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묘한 논리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절실했다.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집안이 너무 썰렁해지고 만다.
남들은 이런 날 보고 오타쿠네 뭐네 하지만 사나이가 남의 시선 따위를 의식해서 어찌 큰 뜻을 이루겠는가?
아니, 물론 자각은 하고 있다. 저 인형들은 실존 인격체들이 아니라는 것 쯤.
그러니까 괜찮은 거다, 분명.
“아아~ 난 대체 뭘 자기 합리화시키고 있답니까? 킬킬.”
자조하며, 차를 몰아 학원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만, 내 소개를 하자면 이름은 고성호, 현재 선생질을 해먹고 있다. 나 같은 인재를 섬에 썩히는 이 세상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32세 아저씨.......가 아닌 총각이다!
총각이예요!
총각입니다!
의미 없는 자기소개를 하며 학원에 거의 다다를 때 즈음,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본 것 같지 않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짧은 머리의 귀엽게 생긴, 생글생글 웃고 다니는 그런 아가씨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음, 말하고 보니 작업 멘트스러운 느낌이 좀 들긴 하지만, 어하튼 신기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걸 보고 데자뷰라고 하나?
그 순간, 그 아가씨와 나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아주, 아주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이 투명한 파란색으로 빛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속을 꿰뚫는 시퍼런 창날과 같이, 그녀의 시선은 나의 속을 한바탕 휘저었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우욱, 뭐지......?”
내가 정신을 차린 뒤 다시 그녀가 있던 곳을 보니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내가 귀신을 봤나? 허허, 악몽에 이어 이젠 귀신까지....... 아무래도 기가 허해진 거 같아. 오늘은 저녁으로 보신탕이나 한 사발 하러가야겠군.”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차를 세워놓고, 나는 내 교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잠깐 들러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내 안락한 교실의 가죽의자에 몸을 실었다.
“역시 죽이게 편하단 말이지, 이 국어선생 의자. 음하하하하.”
위 문장의 ‘내’는 교실을 수식한다. 결코 가죽의자가 아니다.
얼마 전 내가 회식 술값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열 받아서 홧김에 가져온 것이다. 난 술도 많이 안 마셨는데 20만원이라니 말이 되냔 말이다! 20만원에 13만원만 보태면 세이□ 1/6 피규어가 하나라고! 다들 비싼 것만 쳐드셔가지고.......
자, 열 받으니 그런 얘기는 일단 이 가죽의자에 묻어두고, 아직 첫 수업까지는 20분 여유가 있으니 한 숨 자볼까!
.......라고 눈을 감아봤자 갑자기 잠이 올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난 노트북을 켜 동인지 구경을 하며 설렁설렁 20분을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시간죽이기 능력은 거의 길가멧○의 레벨이란 말이지! 흐흐흐~
“자아, 슬슬 정리해보실까, 오늘의 첫 수업~ 준호녀석 이구만. 귀여운 내 수제자 녀석. 흐흐흐~ 부탁한 CD는 구워왔을까나~?”
가죽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준호의 얼굴이 보였다.
“짜아식, 시간 하나는 칼이구만~ 어여 와.......”
“안녕하십니까~.”
“저....... 안녕하세요.”
준호를 따라 들어온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난 경직했다.
날 바라보는 청록색의 눈, 새하얀 은백색의 머리칼.
틀림없었다.
꿈의 그 녀석이었다.
“너....... 너는!”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묘한 위화감과 정겨운 느낌, 그리고 알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이 내 머리 속을 온통 휘감았다.
읽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무 유치하게 안쓰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제 장난기가 가끔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군요
읽어주신 분들 감사하구요.
되도록이면 빨리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가세요. ^^
혹시 퇴방 그림방 아직 안 가는 분들은 한번 꼭 가보세요. 실력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답니다^^
첫댓글 오호.. 데자뷰...인가요?;;(아닌가ㄱ-;;?)
아아 데자부던가? ㅋㅋㅋ
오오...길어요~+ㅅ+누군가와는 다르게...ㅋ
아니 누군가는 누구를 뜻하시는지?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출현(반짝)<-출현을바라는 애절한() 눈빛
..............(반짝반짝)<-뭔가를 더욱 강렬히 바라는 눈빛[응???
;;;;;
...............(반짝반짝반짝)<-뭔가를 더더욱 강렬히 바라는 눈빛[응??????
요즘은 비슷한 내용 따라하기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 그런겁니까?! ;
흐음...환생한 건가...
그렇습니다! 예리하시군요. VIP로 모시겠습니다 ㅋㅋ
흐음 환생이군요...(답알고 뒷북치기
누가 등장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