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톈산[天山] 자락의 불꽃씀바귀
불꽃씀바귀, 일명(一名) 홍화민들레,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
기후 온난화 영향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이 최장 열대야를 기록하는 8월 삼복더위에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으로 꽃 탐방 여행을 떠났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은 우리에게 약간 낯선 국가명이긴 합니다. 그러나 역사 공부를 통해 낯익은 톈산[天山]산맥, 실크로드, 쿤룬[崑崙]산맥 등의 지명이 이 지역과 연관되어 있어 이곳의 지리 환경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은 한때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에 독립한 나라입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어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위도상 수도 비슈케크가 N 42°, 백두산과 비슷한 위치입니다. 동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인 톈산산맥이 뻗쳐있고, 남쪽으로는 파미르고원이 펼쳐진 산악 지역 국가로서 국토 전체의 40%가 해발 3,000m를 넘는 산간 지방입니다.
이 나라 북동부에는 이식쿨 호수(Issyk-Kul)가 있습니다. 이식쿨 호수는 톈산[天山]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과 수면 아래의 온천수로 채워진 탓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라고 합니다. 동서로 180km, 남북으로 60km, 호수 표면의 해발은 1,600m입니다. 크기(6,200km²)는 서울시(605k㎡)의 10배 이상이며 산정호수로서는 남미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해발 3,800m)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입니다. 남과 북을 둘러싼 톈산산맥 속에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식쿨 호수는 50여 개의 만년설 물줄기가 흘러들고 있지만 흘러 나가는 강은 하나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호수이기도 합니다.
유람선을 타고 이식쿨 호수에서 바라본, 만년설에 덮인 톈산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은 감히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 장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톈산산맥의 여러 높은 봉우리들을 통칭하여 톈산[千山]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하늘로 오르는 높은 산! 현대와 같은 시대에도 접근하기 힘든 톈산산맥 등 실크로드의 험난한 여정을 옛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무슨 열정으로, 온갖 고난을 무릅쓰면서까지 넘나들어야만 했을까? 이 길에 얽힌 한(限), 갈망과 핏빛 진한 염원이 얼마나 많고 간절했을까?
이식쿨호 남안과 북안은 고대의 중요한 교통로, 실크로드입니다. 아득한 옛날, 동서 간 문명 교류의 대동맥이었던 실크로드, 톈산산맥 옆으로 자리 잡고 있어 당시 이곳을 오가는 무역상과 낙타들에게 아늑한 휴식처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길을 거쳐 간 역사적 인물로는 현장 스님이 장안(長安)을 떠나(629년), 톈산산맥을 넘어 이식쿨호를 지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723~727)에 의하면 4년여 동안 동천축(동인도)을 거쳐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파미르고원에 이르렀으며 이곳 톈산산맥 사이의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 시안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실크로드는 단순히 상품을 운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명과 문화, 구도(求道)의 길을 따른 동·서양의 이동과 혼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실크로드의 상인과 행객(行客)들은 톈산 계곡을 따라 길을 트고 지나갔던 바 톈산은 숱한 인류사적 사연을 담고 있는, 대륙 횡단의 길목이기도 한 셈입니다.
톈산 산봉우리 중 하나인 알틴아라산을 오르는 것도 이번 꽃 탐방길에 포함된 여정이었기에 산기슭의 산장(2,600m)까지 특수차량으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폭우로 해발 3,200m에서 되돌아 하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산장까지 이동하는 동안과 산에 오르는 길에서 참으로 다양한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여태껏 국내와 몽골, 만주, 사할린 등 동북아시아에서 보아온 많은 식물의 유사종(類似種)을 비롯해 전혀 새로운 종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꽃 중 회상해 보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불꽃씀바귀입니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꽃, 국내 식물원에서도 몇 번 본적이 있는 꽃입니다. 가지가지 다양한 꽃들을 많이 보았는데도 왜 이 꽃이 저의 기억에 깊숙이 각인되었을까? 이 꽃은 숨은 듯 길섶에 피어 있는 조그마한 꽃이지만 강한 햇살 아래 내뻗치는 붉은 꽃 빛깔이 유난히도 붉어 시선을 강탈했습니다. 아마도 한여름 불볕더위에 피어나는 핏빛 진한 강렬한 붉은 색상과 이 길을 걸었을 옛 행객(行客)들이 겪었을 고난(苦難), 덧붙여 여행 도중에 겪은 애틋한 개인적 사연 등이 겹쳐서 더욱 잊을 수 없게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여름에 피어나는 핏빛 진한 선홍빛, 불꽃씀바귀
불꽃씀바귀는 유럽 원산이며 국내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합니다. 높이 30∼60cm로 잎은 긴 타원형 피침형이며 회색빛을 띤 녹색이 돌고, 털이 많고 뿌리잎이 로제트형으로 모여 납니다. 뿌리에서 꽃자루가 길게 올라와 한여름에 두상화가 산방화서(繖房花序)로 달리는데 꽃자루와 총포에 검은 털이 밀생합니다. 꽃은 적색 또는 황적색으로 매우 짙어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열매는 하얀 솜털 씨앗으로 뭉쳐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씀바귀처럼 생겼으나 짙은 빨간색 꽃이 피기 때문에 불꽃씀바귀라고 합니다.
크지도 않은, 씀바귀만큼 한 붉은 꽃망울! 섬뜩할 정도로 빛이 짙고 강렬해 보는 이의 가슴에 금세라도 불꽃이 옮겨붙을 듯했습니다. 붉다 한들 꽃이 이보다 더 진할까? 높은 산기슭 풀숲 사이에서 튀는 불꽃처럼 빨갛게 내 쏟는 빛깔! 강렬한 붉은 빛이 섬광처럼 뻗칩니다. 꽃이 조그마하고 키도 크지 않아 쉽게 지나칠 수도 있으나 조금만 주의해서 내려다보면 캄캄한 밤하늘에 불꽃놀이의 섬광이 번뜩이듯 시선을 휘어잡는 꽃입니다.
그동안 사할린 전역과 몽골 초원에서도 많이 만났었고 국내 식물원에서도 두세 번 만났으나 이번처럼 강하게 인상에 남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톈산산맥이라는 역사적인 실크로드의 한 줄기, 만년설이 뒤덮인 산기슭에서 만난 탓일까?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대동맥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교역과 구도(求道)의 길을 걸었던 선인들의 핏빛 진한 갈망이 담긴 여로(旅路), 톈산 자락에서 만난 꽃, 한여름 삼복더위에 험난한 산을 오르면서 만났던 꽃이기에 새삼스럽게 떠오르나 봅니다. 더하여 여행 도중 제 가슴에 맺힌 애틋한 사연이 있었기에 그 의미가 더 진하게 남아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은 같은 꽃을 바라보면서도 환경과 상황과 사연 따라 생각과 느낌도 제각기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새삼스레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꽃 탐방길이기도 했습니다.
톈산[天山]의 불꽃씀바귀
하늘 오름길의 톈산 자락 한여름 불볕더위에 핀 꽃. 붉다 한들 이보다 더 진하랴. 섬뜩하리만큼 강렬한 선홍빛.
섬광처럼 내뻗친 불꽃, 무슨 사연 그리도 진할까? 수천 년 톈산을 오간 고난(苦難)했던 나그네의 한(限)과 갈망, 알알이 핏빛으로 피어났나.
긴 세월 감당 못 할 하 많은 사연 절절한 그 사연 꽃이 되었어라. 눈 따갑게 파고드는 매서운 섬광, 세상 번뇌 불사를 화염일러라. 한여름 톈산 자락의 불꽃씀바귀.
(2024. 8월 톈산산맥 꽃 탐방길에서)
산림욕 산속의 물소리와 새소리/숲의 소리, 새들의 지저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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