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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하느님께 전가하라>
집착이나 중독 증세를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무엇에 집착하는 행위는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꼭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 안에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이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극대화됩니다.
사랑 받지도 못하는데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된 걸까요?
그 불안한 존재 이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술과 도박과 성과 힘과 성공이나 돈 등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훨씬 큰 공허감으로 더 힘들어야만 합니다.
이렇듯 우리 존재적 불안함은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안정적일 때는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부모가 싸우면 아기는 불안해하고 그것이 태어나서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교에 그리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태교는 “아기야, 나와도 안전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가장 안정감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엄마 뱃속에서 느꼈던 안정감을 사회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속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이나 중독은 소속감의 결여가 그 원인이라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왜 안정감을 느낄까요?
바로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엄마가 집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외국으로 공부하러 나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무어라 대답하면 그들에게 뭐가 좋을까요?
그건 그렇게 했을 때 자신들의 책임이 저에게도 나누어지기 때문에 좋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관계 맺고 속하고 싶은 이유는 이 소속감을 통해 책임을 줄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젊은 부부에게 그 책임을 하느님께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중에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외국에 안 가도 안 간 것에 후회할 것이고 가도 간 것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이 더 낫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미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책임을 미루는 데 서투릅니다.
책임을 미루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그 자유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물론 이는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어쩔 수 없는 교육입니다.
저는 일곱 살 생일 때 어머니가
“엄마는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면 되는 거야.
앞으로 다쳐도 네 책임이고 잘 되도 네가 잘 된 거야!”
라고 말씀하시며 일찌감치 저에게 저 자신에 대한 책임을 쥐어주셨습니다.
이는 마마보이가 되지 않게 제 인생을 제가 선택하며 살 수 있게 해 준 가장 귀중한 어머니의 선물이었습니다.
결혼해서까지 어머니가 자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물론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기 때문에 저의 안전을 위해 하신 말씀이었지만
저에게는 일찍 인생은 혼자여야 함을 알게 해 준 귀한 교육이었습니다.
이때 유행했던 노래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 간섭받지 않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내 인생의 무게를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은 매우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일반 대학 다닐 때 사막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 어떤 누군가가 지친 저를 부축해 주는 꿈을 꾸고는 그 사람을 바로 좋아하게 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모를 떠나 독립해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제 인생의 무게를 나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엄마의 뱃속처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줄 사람은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50/50’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27세의 모범청년 애덤에게 치료될 확률 50%의 암 덩어리가 발견됩니다.
주인공 애덤의 친구 카일은 당연히 살아날 것처럼 애덤을 대합니다.
웃고 농담하고 즐깁니다.
심리치료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가족들도 그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암이 걸려 함께 치료를 받던 사람이 사망하자 죽음의 무게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항암도 아무 효과가 없기에 더 암울해집니다.
결국은 50/50인 확률의 수술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지만 죽음의 무게까지 함께 나눌 사람은 없습니다.
그 무게는 사람이 나누어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주인공도 활기 넘치다가 이때에 와서는 차를 역주행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술 당일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때문인지 덤덤하게 수술대에 몸을 누입니다.
주인공은 실제로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사실 50%의 확률이면 작은 확률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 선택이 잘못될까봐 두렵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나의 생명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느냐 죽느냐의 이 선택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집착이나 중독으로 이 현실을 잊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인간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고서는 책임감을 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무게까지 책임져줄 사람에게 속해야 속이 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주어진 삶의 무게를 잘 버텨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메시아란 분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다니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첫 제자들은 인간에게 안정감을 얻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고 참된 안식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해서 나무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죽음까지도 책임져 줄 그분이 자신들의 가족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가족을 굶어죽게 하실 분은 아니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 주시는 것처럼 당신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까지 그 안정감을 넓혀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애정을 통해 얻는 행복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애정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떠남은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안정된 모습으로 돌아와서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들이 부모님께 더 효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완전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던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 안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도 저도 안 되면 자기 자신 속에 소속됨으로써 안정감을 찾아보려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부부에게 어떻게 해야 옳은지 주님께 기도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다 부르시면 바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책임을 그분에게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움직였다가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반드시 가장 좋은 때에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이고
그 확신이 들면 그냥 따르면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무게가 매우 가벼워집니다.
자신이 자신의 책임을 지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힘든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맞습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그분에게 넘겨드리십시오.
물론 그분은 가벼운 짐을 지어주시고 멍에도 메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잡혀 먹힐지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는 길 잃은 황소의 삶보다는
그분 멍에를 멘 주인 있는 소가 되는 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더 큰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품에서 미리 살 수도 있습니다.
대신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이 포근한 소속감, 이 포근한 포옹은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던 내 자신의 무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에게 유일한 책임이 있다면
바로 나에 대한 책임을 그분에게 오로지 전가시킬 줄 아는 것을 배우는 책임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주 어렸을 때 제게 커다란 열등감을 안겨준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나가 생각납니다.
물론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어떠한 장면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지 않지?’라면서 괜히 부끄럽고 어디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묘기대행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세상에 이런 일이?’, ‘생활의 달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종종 어린이들이 나옵니다.
소위 천재, 영재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지요.
대단한 암기력을 보여주고, 외국어도 달달 욉니다.
암산을 비롯해서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풉니다.
이런 어린이들과 비교해보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내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지요.
마냥 이런 아이들이 부럽고 나도 이렇게 천재나 영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러워했던 이 아이들은 커서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솔직히 어렸을 때의 천재성이 성장해서까지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4살 때 검사한 지능검사에서 IQ 210을 기록해서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으로 기네스북까지 올랐던 사람도 현재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러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은 부러움이 더욱 더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안에서 대단한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후대에 인정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닙니다.
돈밖에 몰랐다면 욕을 먹고 있을 테고,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돈’을 잘 활용해서 이 세상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신 미래를 바라보면서 했던 행동은 대단하게 평가받습니다.
소위 예전에 잘 나갔다는 분들이 술 한 잔 걸치시면 “내가 왕년에~”라는 레퍼토리를 쏟아내십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와~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이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용담과 같은 이야기는 관심이 없으며,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듣기 싫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이야기, 지금을 더욱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삶을 향하길 늘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이는 요나의 말 한마디로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 모습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내리시기로 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지요(요나 5,10 참조).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코린 7,29)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예”는 충만하고 전적이며, 평생을 걸만큼 조건 없는 “예”입니다.
어중간한 “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솔직하게 어중간한 “예”에 길들여있는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못하겠습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거예요. 내일 기도드리겠습니다. 선행도 하겠습니다. 내일이요.”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어중간한 “예”를 통해서는 주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가장 큰 가치인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예”를 기쁘고 또 힘차게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때가 차서~ 가까이 왔다.">
오늘은 연중 제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첫 번째’말씀입니다.
곧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첫 번째’ 말씀인 복음 선포에 응답하라고 요청입니다.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는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제자들을 부르심입니다.
곧 “나를 따라 오너라.” (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요,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이후 줄곧 준비해온“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니“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되,그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적 회개”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잘못 알고 살았거나, 잊고 살아온 삶으로부터,
“복음”이 말해주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복음”이 제시하는 곳이 “회개”의 목적지라는 말씀이요,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회개”라는 말입니다.
곧“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동시에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은 믿음, 곧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리 굳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믿되 올바르게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칼 라너는 지적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아니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마르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이요,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떠나기는 하는데 당신께로 가지 않는다든지, 당신께 가기는 하는데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든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당신께로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다름 아닌,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이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일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그분을 따라나선 그들은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또 자신들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것, 곧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는지, 누구를 따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 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반려자(伴侶者) 주님과의 행복한 삶 - 깨어있음, 회개, 따름>
네 편의 제 자작시 감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21년 전, 1997.4.18.에 쓴 ‘산능선’이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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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들
내 영혼/늘/하느님께 닿아있는/고요한/산능선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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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전, 1999.2.28.일에 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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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 별빛 영혼으로/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님의 품안에/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황홀한 동녘 향해/마냥 걷다가/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마냥 걷다가 사라져/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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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2005년에 쓴 '창'이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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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있는/TV, 그림, 사진/대부분이 군더더기/쓸데 없는 짐
이보다 더좋은/임만드신/창문밖 하늘 풍경/살아있는 그림
늘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
바로 어제 2018.1.20.일에 쓴 ‘행복’이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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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내다볼/창만 있다면
함께/바라볼/산능선만 있다면
함께/걸어볼/길만 있다면
언제/어디서든/행복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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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반려자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이 녹아있는 시입니다.
어제 ‘기쁨과 희망’ 후원회 소식지를 읽다가 ‘반려’란 단어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올해는 무술년, 개의 해입니다.
개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최근에는 애완견을 넘어서서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가족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습니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이라 합니다.
반려자인 사람에서 동물과 식물로 반려자가 바뀌는 참 이상한 세태입니다.
반려동물 양육인구 1000만 시대,
단지 귀엽고 예쁘다는 의미의 애완동물이 아닌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사회문제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합니다.
반려동물에 이은 반려식물에 관한 기사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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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홀몸 어르신에 반려식물 보급해 우울감 해소.
시 올해 아이비, 고무나무 등 반려식물 보급, 원예치료사 방문해 지속적으로 관리,
시 도시농업 통해 건강한 일상 지원하는 반려식물의 긍정효과 확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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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친화적 삶을 떠난 비인간화된 삶의 반영입니다.
이기적이고 가난하고 외로운 빈인간화된 세태의 반영입니다.
아파트가 늘어나고 1인 가구가 확산될수록 사람은 더욱 이기적이되고 외로워지고 약해지고 가난해 지면서
반려동물과 반려식물의 수요도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불편하고 거부감을 갖게 하는 동물과 식물에 붙여진 ‘반려’라는 단어입니다.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을 찾아야 하고 참 반려자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진짜 반려자는 주님과 사람 둘뿐입니다.
바로 주님과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물이, 식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반려자를 닮아가는데 반려동물을, 반려식물을 닮아가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참 좋은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닮아가고
참 좋은 반려자와의 우정을 통해 서로 닮아가는 고귀한 품위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여 주소서.”
화답송 후렴이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화답송에 응답하여 주님은 여러분에게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의 참 행복한 삶’이란 당신의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의 참 행복한 삶은 얼마나 적절하고 중요한지요.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사람 반려자와의 우정 역시 함께 깊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주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 는 말씀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임을 천명하십니다.
첫째,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어야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납니다.
무엇보다 때를 아는 지혜를 지니게 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 하느님의 때입니다.
깨닫고 나면 우리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때,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언젠가 거기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야 하는 주님이요, 살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깨어 있어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행복이요 이의 결정적 때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복음 선포는 다음 두 구절로 요약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오늘 여기 지금의 때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 이어 바오로 사도 역시 임박한 때를 예감하며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한 자유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때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 합니다.
정말 이런 때의 감각을 지닌 깨어있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의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깨어있을 때 저절로 뒤따르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각자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제자리를 벗어나 있기에 제자리를 몰라 방황하기에 삶이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회개를 통해 제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진짜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회개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회개 없이는 겸손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우선적 자세가 하느님 향해 마음 활짝 여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향해 마음 활짝 열 때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니느베 백성들의 회개는 얼마나 신속하고 기민한지요.
지체없는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회개로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 돌아서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돌아서십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구원 체험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이 회개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하고 돌아와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셋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로 불림받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보고와 요한 형제가 그 모범입니다.
이들 어부들의 내적갈망을 첫눈에 포착하신 주님은 이들을 보자마자 즉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둘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이어서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주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과 참 운명적인 만남이요 결정적 회개의 순간입니다.
영원한 도반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전과 똑같이 갈릴리 땅을 무대로 한 삶이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바뀐 제자들의 내적 삶입니다.
고립 단절된 삶에서 영원한 반려자이신 당신을 따르는 형제들의 공동체에 합류시킴으로써
주님은 보이는 반려자 도반들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만약’은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복음의 어부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현재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복된 운명의 전환점인지 깨닫게 됩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회개는 부르심과 응답으로 구체화됩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이 회개의 여정이듯,
평생이 부르심과 따름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이신 파스카의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을 따릅니다.
갈수록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이요, 함께하는 이웃 공동체 반려자들과도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동물도, 식물도 결코 우리의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려동물, 반려식물, 바로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잊었다는 반증이요, 공동체 반려자 형제자매들을 잊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외로워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져 빈인간화되었다는 반증입니다.
참 인간화의 구원은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이 아닌 영원한 반려자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답은 단 하나 우선적으로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공동체 반려자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모시는 시간이자,
서로가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 반려자들임을 새롭게 고맙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식민통치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겪는 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인 그분께서는 정통성을 의심받고 멸시받으며 소외된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15)
주님의 날, 구원의 결정적인 때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정의가 드러났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지요.
주님의 오심은 경이로운 축복이자 주님께로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코린 7,29)
시몬과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마르 1,17) 하고 부르시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1,20).
두 제자들은 자신을 '떠나'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단순히 생계도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뿌리와 습관과 경험, 자기애, 인간적인 지식 등을 버리고
삶의 중심과 방향을 철저히 예수님께로 돌린 것이지요.
그들은 근본적인 회개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려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분과 나를 동일화시키며 삶을 믿음 안에서 자기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란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용서가 인간관계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스며들도록 투신하는 것이야말로 참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떠나야 합니다.
요나의 회개 선포로 이스라엘 적국의 수도 니네베 사람들은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
그렇게 주님의 자비가 민족과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드러납니다(요나 3,1-5).
이처럼 긴박한 구원의 때를 사는 우리들도 온갖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 추종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따르라”는 부름은 수난의 선포와 밀접히 얽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모든 가치와 명예까지도 박탈당하고 철저히 버림받으셨지요.
곧, 예수님의 수난은 철저한 불명예의 수난이었습니다.
구원의 때를 사는 우리는 일상의 괴로움, 번민, 어려움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해야겠습니다.
탐욕과 거짓, 불의와 불신의 그물을 버리고, 겸손과 사랑, 평화와 기쁨을 낚아올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임을 의식해야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주님을 만날 은총의 때입니다.
따라서 지나가 버릴 세상 것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건 안에서 그분을 주인공으로 드러내는 겸손과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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