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Louis XVI]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774~1792).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황태자 루이의 셋째 아들이다.
1770년 16세로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하고,
1774년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량하고 성실하였으나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며,
정무에는 열심이었으나 난국을 타개할 만한 기량이 없었다.
국정의 개혁을 도모하기 위하여 면세특권을 폐지하고 과세의 평등을 실현하려 하였으나,
사제와 귀족 등 특권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1787년 2월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여 재정개혁을 단행하려고 하다가 ‘귀족혁명’이라 부르는
고등법원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1789년 6월 국민의회의 성립을 의결하고 7월에는 그 명칭을 헌법제정의회로 바꾸어
절대왕정에 대신하는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추진하던 중,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의 막이 올랐다.
더 큰 문제는 루이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 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수익은 별로인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망한 재정을 더 말아먹었다
그래도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맏형인 왕세자가 결핵으로 죽자 왕세자가 된 것이었고,
원래 이름인 오귀스트를 루이로 개명해야만 했다.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근데 이건 루이 15세도 그렇잖아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
10월 6일 왕은 파리 시민에 의하여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져 완전히 민중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1791년 6월 왕은 일족과 함께 파리를 탈출, 국외로 도망하려다 바렌에서 체포되었다.
비너스의 방
1791년의 헌법 성립과 동시에 입헌군주제의 원수의 지위가 보장되었으나,
결국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1792년 4월),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끝으로 달려갔다.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왕정을 정지(8월 10일)시켰고,
혁명정부의 제 1공화국이 출범했다(9월 21일). 루이 16세는 그 해 11월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카페"로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출처:두산백과)
루이16세는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간수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내에 있어서의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였다는 평가가 있다.
평화의 방
르브랜이 유럽이 평화를 되찾은 장면을 천정화로 그렸고 벽난로위 그림은
루이 15세가 유럽에 평화를 나누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르 므완느의 작품이다
단두대 앞에서, 그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갑도 차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으려고 했으나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받아들였다. 다만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왕만이 타는 금장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실려갔다.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백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루이16세 처형장면
황태자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안토니아)는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인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나이 10세 때 앙뚜아네트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등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다. 그녀는 유독 프랑스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는 동안에도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리는 경우가 여러번 지적되곤 하였고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 일조했음이 분명했다.
베르사이유 장미-앙뚜아네트
왕의 침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여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부부는 취미나 기질 등이 달랐으나 (앙투아네트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화려한 성향이었으나 루이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사색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그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수많은 보석을 부여받게 됐다.
루이의 성(性)적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나 치료를 받아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여느 왕들과는 달리 루이는 정부도 두지 않았다.
왕의 집무방
루이14세-16세 왕비들이 왕자와 공주를 낳았덩 왕비의 침실
귀족의방-왕비가 귀족부인들을 만나는 방
왕과 왕비의 식사방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교에 몰두했다. 여러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절대 왕정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 물들어 있었다.
이는 결국 루이 16세 재위에 이르러, 재정이 바닥나는데 일조했으며 신고전주의로 변화를 이끈다.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이들 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있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
더구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은 한적이 없지만
혁명군들은 이말을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언비어들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가중시키며 마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출처:위키백과>
참수처형
콩코드광장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뚜와네트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출처:위키백과>
마리 앙뚜아네트 아이들 그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왕이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당한 뒤
왕당파에 의해 제1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
루이 샤를로 불린 그는 대혁명 발발 직후인 1789년 6월에 8살 위인 형 조제프가 죽으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1792년 8월 10일 민중봉기로 군주제가 전복된 뒤에는 파리의 탕플 감옥에 다른 왕족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프랑스 망명귀족들은 즉시 그를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포했다.
1793년 7월 3일 그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앙투안 시몽이라는 한 구두장이의 보호 아래 들어갔으나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뒤 다시 탕플 감옥에 갇혔으며(1794. 1),
가혹한 수감생활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결국 감옥에서 숨졌다
우리나라 단종과 같은 불운한 왕세자와
다를바 없다.
<출처:다음백과>
첫댓글 참 불행했던 여인의 일생인것 같습니다..
굵게 짧게 살았다고하더라도 ....
꼭 단두대로 보내야했는지..여론이 무섭다는생각을 해봅니다..
그후 아이들은 어찌됬는지~~전 그것이 참 궁금한데..
아이들에 대한 예기는 알려지지않는거 같아요..
그곳에 갔을때 참 좋았던 시절이었던거 갔습니다..ㅎㅎ 오래전 이니까요..
다시한번 필름을 돌려 회상할수있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뒷쪽에 있는 정원의 아름다움..생전에 그녀가 살았던 베르사이유궁전!!!!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곳입니다..
그곳에 갔다오셨군요^^
위 맨아래 추가글입니다
앙뚜아네트 아이들 어땠나 찾아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