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챙이 구겨진 모자는 되돌릴 수 없어
|
↑ 월간산]대를 이어 모자를 만들고 있는 경원A.M.T의 최훈오 대표.
| 등산장비라 하면 흔히 고가의 배낭, 등산화, 스틱, 방수재킷 등 첨단 기능성 장비를 떠올린다. 모자는 장비 목록 말미에 호명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소홀히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인류가 모자를 쓰기 시작한 기원이 오래된 만큼이나 모자는 사람에게 중요한 필수 장비다.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거나 체온을 지켜준다.
여름 산행이나 걷기에선 직사광선을 맞으며 한참 걸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만약 모자를 쓰지 않으면 일사병을 자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름 산에서 모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다.
모자는 빗물을 막아주며 잡목지대나 풀숲을 지날 때 얼굴과 머리를 보호한다. 머리에서 빼앗기는 열은 체열 손실의 절반이나 될 정도로 많다. '손·발이 시리면 모자를 써라'는 말이 있듯 체온유지에 모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보온하면 오히려 컨디션이 저하될 수 있으므로 계절에 맞는 모자가 필요하다.
모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흔히 야구 모자로 불리는, 앞에 챙이 달린 캡(cap)과 벙거지 혹은 사파리 모자로 불리는 햇(hat)이다. 등산할 때는 물론 일상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모자는 캡이다. 활동성이 뛰어나며 시야 확보가 용이하며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준다.
햇은 목 뒤나 옆에서 내리쬐는 햇살까지 고루 막아주며 비를 막는 데도 효과적이다. 최근에는 캡에도 탈부착 가능한 차양막이 있는 제품이 있어 캡의 차양 효과를 보완했다.
모자 디자이너의 모자 이야기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의 모자 디자이너인 박경미씨는 일반 모자와 아웃도어 모자의 차이로 기능성을 꼽는다. 일반 모자는 멋을 내기 위한 패션 성향이 강하고, 아웃도어 모자는 기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모자의 기능성을 중요도 순으로 나열하면 자외선 차단, 보온, 땀 배출과 통풍, 방수, 패션성이다.
자외선은 모자챙 그늘로 막는다. 소재에 자외선 차단 코팅을 하지 않아도 80%는 막아준다. 투과되는 소량의 자외선을 막기 위해 UV코팅된 소재를 쓰기도 하지만 가격이 더 비싸다. 그러나 UV코팅텍이 하나 더 달렸다고 해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기능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햇볕을 더 막고 싶으면 챙이 더 넓은 것을 택하는 게 낫다고 박경미씨는 설명한다. 그런 면에서 햇이 그늘을 많이 만들어 주기에 여름에 쓰기는 유용하다. 반면 캡은 활동성이 뛰어나 격렬한 아웃도어 활동에 더 유리하다.
|
↑ [월간산]1 여름에는 메시 소재의 모자가 땀 배출에 탁월해 인기다. 2 캠핑에 어울리는 캐주얼 캡(왼쪽)과 산행에 최적화된 고어텍스 캡. 3 모자는 기본적으로 야구모자 스타일의 캡(왼쪽)과 벙거지 모자 스타일의 햇으로 나뉜다.
| 판매율에 있어서 네파의 경우 지난해까지 70% 이상을 캡이 차지했지만 올해 여름의 경우 햇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햇이 과거에 비해 디자인이 세련되어졌고 제품의 기능성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고어텍스 소재의 방수모자는 전통적으로 판매량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한여름에는 판매량이 떨어지는데, 고어텍스가 방수기능은 우수한 반면 땀을 배출하는 투습효과는 메시 같은 소재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메시 소재의 모자가 잘 팔린다. 메시(mesh)는 이름 그대로 그물형태의 소재라 통풍이 잘되 땀 배출에 유리하다. 과거에는 모자 양 옆에 메시 소재를 쓴 것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챙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메시로 만든 제품이 인기라고 한다. 네파의 경우 햇 스타일에 분리 가능한 메시 제품(더블 햇)을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더블 햇은 모자의 헤드 부분이 분리 가능하며 분리했을 경우 헤드 전체가 메시를 사용해 땀을 빨리 배출할 수 있고, 챙의 그늘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메시는 다른 소재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것도 장점이다.
소재는 고어텍스가 가장 비싸고 ,다음이 써플렉스와 면이며, 다음이 폴리에스테르고 메시가 가장 저렴하다. 고어텍스는 방수기능이 뛰어나며, 써플렉스는 나일론 소재로 자연스런 느낌의 소재다. 다른 나일론 소재는 싸구려 느낌의 광택이 나는데 반해 써플렉스는 자연스런 무광이라 디자인을 세련되게 연출할 수 있다. 더불어 면처럼 촉감이 부드럽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면보다 빠른 건조 기능을 갖추었다. 폴리에스테르는 일반적인 기본 소재다.
비싼 고어텍스의 기능성을 대체하기 위해 업체에서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소재를 쓰기도 한다. 네파의 경우 원단업체와 협약해서 개발한 엑스벤트를 쓴다. '기능면에서 크게 차이 없으며 가격 면에선 1만 원 이상 저렴하다'고 한다.
모자 제작에 있어 완성도는 봉제, 소재, 패턴에 의해 좌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봉제인데 바늘땀이 촘촘하지 않거나 뜯어진다든지, 버클이 쉽게 떨어진다든지 하면 제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소재가 불량인 경우는 과거에 비해 드물어졌다. 국내 브랜드의 경우 모자를 주로 국내 하청업체에서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기획제품이나 대물량의 경우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하는데 제품의 질이 떨어지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주로 국내생산을 선호하는 편이다.
모자의 색깔은 지난해까지 원색과 보색이 강세였는데 올해의 경우 자연스런 색깔이 유행하고 있다. 베이지나 옅은 파랑 등 튀지 않는 무난한 색깔이 잘 팔린다. 그러나 고어텍스 모자는 소비자들이 밝은 원색을 선호하며 겨울에는 검정색 모자가 많이 나간다.
|
↑ [월간산]1 모자 안쪽의 땀받이 부분. 산행 후 땀받이 부위만 씻어주는 것이 좋다. 2 네파의 모자 디자이너 박경미씨. 한국등산학교와 정승권등산학교를 나왔으며 네파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다.
| 최근에는 아웃도어 숍에 가면 캐주얼한 모자가 많은데, 이는 브랜드마다 캠핑라인의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캠핑라인은 기능성보다는 패션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다.
모자를 구입할 때는 인터넷으로 사기보다는 직접 매장을 방문해 써보고 사이즈가 맞는지, 어울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컴퓨터로 본 색상과 실제 색깔은 차이가 있다. 캡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햇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갸름한 얼굴은 모든 모자가 다 어울리고, 머리 둘레가 60cm 이상인, 머리가 큰 사람은 햇이 어울린다. 머리가 큰 사람이 캡을 쓰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다. 머리 둘레는 눈썹 위부터 뒤통수를 둘러 잰다. 캡은 프리사이즈다. 즉 별도의 S~M~L 사이즈 구분이 없다. 남자는 57~60cm이며 여자는 54~57cm다. 캡은 보통 뒤쪽에 사이즈 조절 가능한 벨트나 벨크로가 있어 2cm까지 조절할 수 있다. 햇은 사이즈 조절이 안 되므로 M과 L 사이즈로 구분되어 있다. 간혹 표준 사이즈보다 머리가 큰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가장 잘 팔리는 제품에 한해서 빅 사이즈가 나온다고 한다.
박경미씨는 최근 유럽에서 열린 프리드리히샤펜 아웃도어쇼에 다녀왔다. 외국의 모자는 신제품이 적은데 이는 유행의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매 시즌 신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두상도 차이가 있어 한국인은 머리 뒤가 납작한 편이며 서양은 뒤짱구가 많다고 한다. 또 외국 모자는 한국인이 썼을 때 정수리에서 귀까지 깊지 않아 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외국 모자 브랜드로는 OR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며 로알파인도 스타일과 기능면에서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러워진 모자를 세탁기에 돌리는 건 금물이다. 이물질이 묻었을 경우 집에 와서 바로 오염 부위만 손빨래해야 한다. 이때 10분을 넘어선 안 되면 뜨거운 물보다는 찬물이나 미지근한 물로 헹궈야 한다. 고어텍스의 경우 아웃도어 세제나 중성세제를 소량 사용해서 찬물이나 미지근한 물에 가볍게 손으로 주물러 빨아야 한다. 이때 섬유유연제는 금물이다.
모자를 보관할 때는 벽걸이에 걸어두는 것이 좋다. 서랍장에 첩첩이 쌓아 눌리게 하면 형태가 바뀔 수 있다. 햇은 안쪽에 신문지를 넣거나 마분지를 잘라 안에 둘러 보관하는 것이 좋다. 한번 구겨진 햇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산행을 위해 이동할 때도 가급적 쓰고 가는 것이 좋다. 해외 트레킹 시에는 햇 안에 옷을 넣어 머리 모양 형태를 유지한 상태로 캐리어에 펴서 넣어야 한다. 배낭에 구겨 넣거나 주머니에 넣는 등 실수로 형태가 변형된 모자는 AS를 맡기면 모자 다리미로 펴준다. AS는 보통 1년간 무상이며 이후 유상이지만 대부분의 브랜드는 서비스차원에서 2~3년이 지나도 심하게 손상된 것만 아니라면 모두 수선해 준다.
모자 공장 사장의 모자 이야기
경원A.M.T 최훈오 대표는 부친에 이어 2대째 모자를 만들고 있다. 그가 모자를 만든 지 20년이 되었다. 모자 공장을 운영하는 그는 K2, 아이더, 살레와, 카리모어, 라푸마, 코오롱, 네파, 마운티아 같은 브랜드의 아웃도어 모자를 만들어왔다. 고어텍스를 사용해 모자를 만들 수 있는 라이선스를 1998년 국내 최초로 획득했다. 현재 고어텍스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국내 모자 공장은 세 곳뿐이다.
IMF 외환위기 때 모자 주문이 끊겨 회사가 쓰러지게 되었다. 그때 거래처를 돌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는데 밀레 한철호 사장이 일으켜 세워줬다고 한다. 에델바이스에서 1년간 근무하도록 했으며 고어텍스 라이선스를 획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고어텍스 모자 매출에 힘 입어 현재까지 회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
↑ [월간산]1 제품 출시 직전, 프레스로 모자의 모양을 잡아준다. 2 고어텍스 봉제선을 심테이프 기계로 붙이고 있다.
| 모자는 본사 디자인 작업으로 시작된다. 디자인을 바탕으로 주문이 오면 경원에서 샘플을 제작한다. 이 샘플을 다시 본사에서 살펴 출시 제품을 선택한다. 경원에서 제단 작업이 이뤄지고 봉제를 한다. 거기에 자수나 턱끈, 사이즈 조절밴드 등을 넣어 최종 검사 후 완제품 포장을 한다. 고어텍스 모자는 제작이 더 까다롭다. 다른 소재는 봉제를 잘못했어도 새로 하면 되지만 고어텍스는 한번 봉제하면 되돌릴 수 없다. 제작에 있어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소재다. 봉제선 안쪽에 방수 테이프를 바르는 것도 고어텍스 모자만의 특징이다.
봉제선으로 물이 스며들 수 있으므로 심테이프를 기계로 붙여 완벽한 방수가 되도록 한다. 심테이프를 붙일 때도 씹히지 않도록 정확히 붙여야 한다. 실수할 경우 물이 스며들게 돼 고어텍스의 장점을 잃게 된다. 고어텍스를 붙이는 심실링 기계가 따로 있어 순간적으로 700℃의 열을 내 테이프를 붙인다. 심테이프를 붙인 후 모자 안쪽에 망사를 붙이고 사이즈 조정 작업을 한다. 다음 챙을 붙이고 땀받이와 버클 등을 붙이고 프레스 작업으로 모자의 각을 잡고 포장한다.
모자 스타일은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한 게 없다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소재다. 1998년 이전에는 하이포라와 면 소재를 썼는데 지금은 고어텍스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기능성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또 절개선과 봉제선이 다양하고 복잡해져 소비자가 쓰기에는 편해졌고 제작은 까다로워졌다. 고어텍스는 꾸준히 주문이 들어오지만 여름에는 주문량이 줄어든다. 대신 메시를 사용한 통기성 좋은 모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여름 모자의 경우 6개월 정도 먼저 생산하므로 지난 12~1월에 제작이 끝났다.
아웃도어 브랜드 모자의 추세를 보면 과거에는 브랜드별 개성이 뚜렷해서 디자인만으로도 어느 브랜드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개성이나 정체성이 없어져 모자가 다 비슷하다고 한다. 모자 디자이너들의 동종 업계 이직이 잦고 히트 친 제품은 바로 모방한 제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AS를 신청하면 모자 공장에서 수선한다. 심하게 훼손된 것도 많고 접촉부가 떨어져서 오는 것도 있고 챙이 틀어져서 다시 모양을 잡아달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그는 챙이 변형되면 공장에서 모자 프레스로 다시 잡아주지 않는 한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자는 관리가 중요하다고 한다. 가장 주의할 것은 배낭이나 호주머니에 모자를 구겨 넣으면 안 된다. 요즘은 잠수복 소재인 네오프렌(neoprene)을 챙으로 쓴 구겨도 되는 모자가 나오기도 한다. 이 모자 또한 둥글게 말아 넣어야 한다.
차 안에 직사광선이 닿는 곳에 모자를 장시간 방치하면 안 된다. 모자의 기본기능이 햇볕을 막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이 쓰고 활동할 때 기능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장시간 뜨거운 열을 받으면 변형되므로 쓰지 않을 때는 안쪽에 신문지를 넣어 그늘에 보관해야 한다.
고어텍스 소재나 일반 아웃도어 모자 모두 세탁기에 돌리면 모자를 버리는 것이라 얘기한다. 그는 사실 세탁을 권하지 않는다. 이물질이 묻었다면 흐르는 물에 살짝 닦아주는 정도를 권한다. 땀을 흡수하는 이마와 닿는 땀받이 부위만 씻어주는 게 좋다고 한다. 부분 세탁 후 모자를 말릴 때 빨래집게로 걸어 햇볕에 말리면 변형이 일어나므로 그늘에서 자연스럽게 말려야 한다.
|
↑ [월간산]모자 재단 후 봉제가 이뤄지는 생산 라인.
| 두 전문가의 공통된 이야기
최훈오·박경미 두 모자 전문가의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자는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 배낭에 구겨 넣거나 호주머니에 넣으면 챙이 변형되어 AS를 맡기지 않는 한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늘에 구겨지지 않도록 보관할 것. 세탁기에 돌리는 건 금물. 이물질이 묻은 곳만 손빨래 할 것. 여름에는 메시 소재 모자가 시원하고, 고어텍스는 땀이 빠지지 않아 통기성이 약하다는 것. 기능성에 있어서 햇이 캡보다 여름에 유용하며, 활동성에 있어선 캡이 햇보다 유용하다는 것. 구입한 지 1년이 지나도 대체로 무상 AS 가능하다는 것. 인터넷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써보고 구입할 것. 이것들만 알아도 아웃도어 모자 상식은 마스터한 셈이다. 이제 첨단 기능성과 세련된 디자인을 갖춘 아웃도어 모자와 함께 여름을 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