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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시절 생각하면 끔찍했다. 고등학교 입시 때문이었다. 명문고등학교에 들어가느냐 못들어가느냐 삶의 갈림길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성숙한 어린나이에 감당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겪어야만 인생 통과 의례이며 선생님들도 끔찍했다. 5대 도시였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은 연합고사 체제라 기분 성적만 있으면 합격되었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추첨을 통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지역은 달랐다. 인문계냐 실업계냐 인문계에서도 명문이냐 비명문이냐 사활을 걸어야 했고 이마저 못들어가면 저 타지역으로 가거나 1년을 재수해야 했다.
당시 입시제도부터 적어본다. 고등학교 경우 대학을 진학하는 인문계고와 고등학교 졸업후 직업을 선택하는 실업계 (지금 전문계 고교)로 나누었다. 학교 명칭을 보면 인문계고교는 00 고등학교 00여자고등학교 표기하고 실업계 고교는 00상업고등학교 00 농업고등학교 00공업고등학교 표기했다.
전기고등학교와과 후기고등학교 로 나누었다. 12월 중순 전기고등학교 시험을 본다 날짜는 당시 문교부(지금 교육부)에서 정해준다. 이날 인문계 실업계 구분 없이 동시에 치루어지며 붙으면 좋고 떨어지면 1월 후기고등학교 대상 학교 지원 시험을 치룬다 떨어진디 면 1년을 재수한다거나 아니면 인근 타지역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한다. 그땐 고등학교 입시학원도 여러군데 있었고 재수생들도 많았다. 그들도 중학생처럼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모자는 일반 모자였기에 딱 보아도 일 수 있었다.
시험과목은 예외없이 전 과목이었다. 체육 경우 체력장 8개 종목으로 대체되었다. 시험점수는 체력장(20점) 포함 1문제당 1점씩 계산하여 200점 만점이었다. 과목마다 문제 문항수는 차등을 두었다. 국어 영어 수학은 각 24문제 이었고 과학과 도덕은 20문제 이었다. 나머지 과목들은 최하 6문제 (한문)부터 14문제 개관식 4지 선다형이었다.(단 수학 6문제 영어1문제 정도는 주관식. 당시 충남 기준이었고 문항수는 각 시도 교육청마다 자체 정했음) 시험시간표를 본다면 1교시 국어 한문 국사 2교시 사회 실업 기술 3교시 수학 4교시 과학 음악 미술 5교시 영어 도덕 이었다 (시험 시간표도 각 시도 교육청마다 다름) 학교마다 합격 점수 기준이 달랐다. 최고 명문고는 못해도 200점 만점에 190점 내외 맞아야 했고 학교아래순으로 점수가 낮아졌다. 시험문제는 교육청 지휘아래 출제위원을 선발 공동출제였다 물론 후기도 마찬가지
고등학교도 1류 2류 3류로 나누었고 1류라도 수재 인류고냐 우수 인류고냐 나누었다 중학교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최고 수재 일류고등학교를 지원하는게 최고의 소망있었다 조금 못해 우수 인류고등학교에 들어가도 소용없다. 중학교 평가는 수재 인류고등학교 합격숫자의 기준이었다. 아무리 전 후기 명문고 수석 입학자도 수재 인류고등학교에 꼴지로 들어간 학생보다 못헸으리라 본다. 전 후기 명문고도 크게 알아주질 않했다.
고입 학원 경우 역시 최고 명문고교 잘보내는 학원이 인기 좋았고 고입시가 끝나면 재수할 학생들 상대로 광고를 하였다. 그들은 어느 우수 고교 수석 합격 했다 최고 명문고등학교 몇 명 합격시켰다 등 적극적으로 TV와 라디오를 통해 적극 홍보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학원도 재수생만 교육 시키는 것이 아니다. 재학생들도 교육시킨다. 그들도 아침 여러 학교에 나와 전단지를 주면서 홍보를 하며 특히 3학년 올라가는 학생들에게 나왔던 전기 후기 입시 문제를 나누어 준다.
여담 2가지를 작는다 중학교 1학년 말기 학교 교지를 받았다. 졸업생들 나도 한마디 코너에서 어떤 학생이 최고명문고를 언급하며 ‘00고등학교도 단체면 할인이더라’ 적혀있었다. 누구는 1.2학년들이여 3학년이 되지마라 적혀있었다.
어느 모 TV에서 학교별로 하나의 주제로 고등학생들이 나와 이야기를 하는 ‘우리들세계’라는 프로그램을 하였다. 주로 서울 소재 고등학교 위주로 하다가 지방 고등학교를 찾아가 방영 하였다. 각 시도에 있는 고등학교들중 딱 2군데 지역대표(?)최고 명문고 명문여고만 방영하였다. 지금이라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수년전에 했었던 도전 골든벨을 그렇게 했다간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어느 고등학교 원하느냐 써서 내라기에 십중팔구는 00고등학교라 썼다. 단 자신없어 바로 아래 고등학교 이름을 적었다.
3학년이 되었다. 7개 반이었으며 교사배치 경우 1반은 공업교사(학년주임) 2반은 사회교사 3반은 영어교사 4반은 과학(물상)교사 5반은 국어교사 6반은 영어교사 7반은 도덕교사였다 교실 배치를 보면 1반부터 6반까지는 2층에 내가속한 7반은 3층에 있었고 바로 옆 반이 2학년이 배치되었다. 반이 많으면 한 교사가 전체 들어기질 못해 반을 쪼개어 같은 과목의다른 교사가 들어가서 가르쳐준다. 그런데 그땐 가급적 같은교사가 7개반 다 들어가서 가르쳐 줄 수 있돌고 노력을 하였다. 국어경우는 5반 담임이 7개반을 다들어갔고 2명의 교사가 쪼개어 들어갔다. 영어는 3반 6반 교사가 전체 7개반 다 들어갔다. 수학은 비담임 교사 2명이
7개반 다들어갔다. 사회는 5개반과 2개반으로 나누어 들어갔고 나머지 과목들은 한사람이 다 들어갔다. 2명이 가르치니 교과서 앞부분 뒤부분 나누어 가르쳤다. 물론 주당 수업시간수는 변동이 없었다. 학생들은 2개 단원을 학습하게 된 셈이었다. 가급적 전 학생이 전과목 같은 교사로 밑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형평성을 받게 해주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쥐어잡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살벌했다. 우선 2월 2학년 공업 선생님이 수업도중 교장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이런 내용을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올라가는 3학년 학생들 전원 100% 전기고등학교 합격 시켜라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한마디 선생님들에겐 스트레스였으며 학생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계획을 세웠으리라 본다.
아침에는 일찍 등교해야 했고 저녁엔 늦게 집에 가야 했다. 만일 일찍 못오거나 야간자습 시간에 딴짖했다간 얻어 맞아야 했다. 어느날 나도 다른 반 학생들과 함께 늦게 와서 교실에 들어 가려 했으나 담임에게 걸려 아프도록 맞았다.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 어느 반에서 어느 학생이 심하게 이상한 말을 하거나 행동 했다면 7개반 전체 모두가 오리걸음으로 긴 복도를 통과해 내려오는 벌을 받아야 했다. 교실 스피커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도구였다.
매일매일 공부 또 공부해야했으며 공부 못한 학생들도 일단 공부를 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화장실을 2교시마다 가라는 명을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기막힌일이었다. 어떻게 생리현상을 참으란 말인가 쉬는 시간에도 공부 하라는소리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7반이 3층에 있어 교사들 눈 피하기엔 좋다. 나 포함 일부아이들이 몰래갔다왔다. 한번은 국어선생이 니들 3층에 있다고 그렇게 했다가 걸리면 엄청 혼날줄 알으라고 하였다 . 반장이 나서서 엄청 통제를 하여 더 이상 못하였다.
3월 첫 모의고사를 보았다. 내가 맞은 점수가 생각보다 못나왔다. 담임은 학생들 1명씩 불러 이야기를 하였다. 나보고 몇 점 올릴래 생각없이 20점 올린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공부한다고 올려지나 첫시험 점수가 입학시험 올대까지 그대로라는 것을. 아무리 공부해도 그 점수에서 왔다 갔다 했고 딱 한번 조금 오른 적도 있었다. 모의고사는 1달에 1번 이상 보았다. 보고나면 복도 위에다 방을 붙인다. 전체 1등부터 148점까지 맞은 학생들 명단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번도 내 이름이 없었다. 이런적도 있었다. 대전시청 주관으로 대전시 소재 학교의 3년 학생들이 모의고사를 보게 하였다. 감독은 다른 학교 교사들이 하였다. 시험끝나고 학년주임 교사는 학생들에게 같은 동네 사는 다른 학생들에게 니들 학교 번호를 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음날 2명이 말해주었다. 왜 그랬을까 ? 여름방학도 없었다. 매일 나와 공부를 하여야 했다.
체육 즉 체력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체력장 경우 20점 만점이었고 특급 1급 2급 3급 4급 5급으로 나누었다. 8개 종목이었다. 100m달리기 왕복달리기 윗몸일으키기 윗몸앞으로 굽히기 멀리뛰기 수류탄던지기 턱걸이(여자는 철봉매달리기) 1000m달리기 였다 종목당 세부 기록을 나누어 점수를 정했다. 예를들어 턱걸이 경우 20개가 만점이었고 적게하면 할수록 점수는 낮아졌다. 체력장 점수는 8개 종목에서 받은 점수를 합산하여 정했고 기준치를 정하여 특급 1급 2급...을 정했다. 특급은 20점 1급은 19점 2급은 18점이었다 9월 중순경 몇 학교를 지정하여 1주일 내내 하였고 각 학교는 지정된 날에 가서 하였다. 체육시간은 살벌했다. 체육교사는 학생들을 몽둥이로 조져댔다. 체력장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고 오후 시간 내어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해야만 했고 여름방학땐 아침마다 하였다.
교사들 역시 체력장에 관심을 두어야했다. 만일 공부잘하는 학생이 특급대신 1급 19점을 받았다고 할 경우 1점 부족하므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험을 잘 보았더라도 불합격 되기쉬우며 실제 그렇게 떨어진 학생이 있었다. 학교에선 체력장이 가까워지자 반에 관계없이 성적기준 우수학생 준우수학생 보통학생 못하는 학생. 아주못하는 학생으로 분류했다. 지정된 학교에 가서 체력장을 하였다. 지금생각하면 이해 못하는 일이었다. 현장에선 종목당 채점 기록관과 감독관 2-3명이 있었고 반칙 감시와 기록을 직접 재어 기록했다. 선생님들은 가끔 그들에게 특정 학생이 점수 잘 나오도록 간단한 물품 주며 구워 삶았다. 난 던지기를 못해 1급으로 갈 수 있었으나 담임의 묘수로 20점 맞았다
학부모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자기 자식이 어느 고등학교에 가느냐 최고 관심사이다.학교에선 3월 학부모들을 부른다. 어미니도 가셨다. 자기 자식의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없다 말하면 학부모들 표정은 다야했다. 어머니는 나에대해 관심을 쏟으셨고 괴외공부도 시켰다. 원서쓰기 직전 학부모 전체 불렀지만 살벌한 만남이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쓰게 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서로가 으르렁 거렸다. 어느 학부모는 교사에게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여러번 학교에 갔었고 담임이 직접 오시어 아버지랑 대화를 나누었다.
학교에서는 비상식적인 일을 하였다. 비밀과외였다. 대전 어느곳에다 방을 잡아 놓고서 학생들을 모아 교사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새벽1시2시까지 공부하고 다음날 아침 집에 가서 아침식사 하고 학교로 다시 등교하게 하였다. 물론 교사들도 같이 잠을 잤다 어느날 담임이 어머니에게 소개 시켜주어 공부를 하게 하였다. 비밀과외장소는 세월이 흘렀지만 건물 그자체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 해체가 되었고 내가 속한 반과 다른반 즉 2개반만 어느 학생 집에 모여 몇 명이 모여 저녁마다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하였다. 물론 비밀이었다. 영문과 다니는 대학생이 와서 지도를 해주었다. 그러나 끝가지 가질 못했다.
각 반 담임들은 자기반 학생들의 일탈하는 행위에 엄청 통제를 가하였다. 우리반에는 굵고 길다란 몽둥이가 칠판옆에 걸러져 있었다. 몽둥이는 학생들을 통제하는 도구였고 만일 학생들이 공부 않하고 떠들면 번호순으로 모두 나와 5대씩 엉덩이를 때렸다 그렇게 해서 몇 번 맞있다. 그 몽둥이는 다른 반 담임에게도 빌려준적 있었다. 어느날 가을 지금의 공군 항공고등학교가 대전에 있었고 신입생을 일찍 선발하였다. 같은반 학생이 지원하였고 그 학생은 일단 입시라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담임은 그 학생에게 명을 내렸다, 그가 키가 커서 뒷자리에 앉았겠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시간 이건 자습시간이건 엉뚱한 행동 했으면 그 학생이름을 적어서 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저녁 종례전 맞아야 했다. 나도 한번 얻어 맞있다.
반장 부반장은 공부를 너무 잘했고 담임의 명에 잘 따랐고 아이들을 잘 조져댔다. 어느날 여름 담임이 그날 나오질 않했다. 어느날 오후 아이들이 자기 통제에 잘 따르지 않아 엄청 화를 내었고 모두들 엎드려 뼈치게 하여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옆반 담임이 잘한다 말하고 지나갔다. 한 아이가 잘못맞아 큰일 날뻔 했다. 요즘 그렇게 했다간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학교인지라 인성교육도 하였다. 학교에서는 건전가요부르기 무시험감독 아침명상을 하였다 건전가요부르기는 여러 건전가요를 모아 아침 조례시간에 불렀으며 어느 교사는 수업시작전 부르게 하여 분위기를 잡았다. 무시험감독도 하였으며 걸렸다면 징계를 받아야 했다. 아침명상 아침마다 스피커로 음악소가 흘러나오고 여선생님이 교훈적인 글귀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은 눈을 감고 조용히 들었다.
학생의 품위 유지와 활동도 통제하였다. 도시락 혼분식 검사를 받아야 했고 어느날 수업전 발을 잘 닦았나 못닦았나 발 위생검사를 하여 시커먼 발인 학생들은 얻어 맞았다. 나는 씻고 다니기에 맞질 않했다. 식목일 각 담임들 모두 도구 가져 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삽으로 엉덩이 2대씩 때렸고 나도 가져오지 않아 그 몽둥이로 얻어 맞았다. 학교 앞이 호남선 철도가 있어 육교를 건설하였으며 바로 개통 직전 있었다. 나포함 학생들은 등하교로 다녔기에 기합받고 얻어 맞아야 했다.
그러나 학생들도 사람이다. 아무리 통제 당하더라도 당근을 받아야 한다. 당근은 소풍과 체육대회 뿐이었고 중학생으 마지막 가을소풍 장소는 동학사였다 그때 등교용 학교버스가 있었다 학교버스타고 이동하였고 교장선생님이 오시어 함께 해주었다. 마지막 당근이었고 다시 원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에게 별명을 붙여주어 은근히 심리적 반항을 하였다. 내 담임은 장닭 국어선생은 야웅이 어느선생은 입에 담지못할 별명인데 노XX (남자 성기 비유) 불렀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2학기 선생 변동이 생겼다. 국어교사가 허리가 아프다고 몇단간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아야 했다 미술선생님이 시집 간다고 한다. 국어가 문제 생겼다. 겉으로는 2명이 들어오니 문제 없는 듯 보였다. 들어오는 나머지 1명이 문제였다. 이 사람은 성의없이 가르쳤다 . 작은 소리고 자기 혼자 공부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은 듣던 말던 상관 없었다. 나도 도저히 안되
국어 문제지 꺼내 풀었다. 그는 나에게 와서 문제지 보더니 가버렸다. 그런데 학생들이 도 넘은 일탈행동엔 묵과하지 않했다. 공부 좀 하는 학생이 공책엑다 여자 나체 그렸는데 보더니 가져갔고 종례때 담임에게 얻어 맞았다. 또 5명의 학생이 심한 행동에 뒤에 나가라 하고서 망치로 교복 단추를 향해 여러번 때렸다. 책가방 검사 까지 하였고 이름 적었다 역시 종례때 혼이 나야했다. 11월 수술받은 교사가 출근하기 시작 했지만 정상적으로 수업은 하질 못했다 가끔 들어와 가르쳤다. 미술시간 되기 직전 우리반 학생 한명이 미술선생 이름을 말했다 김xx씨 들었던 모양이었다. 엄청 화가났고 누가 내 이름 말했냐고 학생 1명이 나와 여러개 먼지털이개를 묶어 종아리를 엄청 맞았다. 미술은 남자교사였는데 00대학교 강사가 와서 성의있게 잘 가르쳤다
12월 전기고등학교 원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시험일은 14일이었다. 시험전 학년주임은 반 전체 스피커를 통하여 전기고교 특성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고 제일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가는 00상고에 대해 말하기를 시험장서 상대 학생에게 컨닝하도록 보여달라고 위협하라고 하였다.
학부모들을 불렀으며 어머니도 가셨다. 그러나 기준치보다 낮은점수로 원하는 고등학교에 내질 못했다. 아버지는 7살에 학교 들어갔으니 1년 재수를 시키겠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과외까지 시켰는데 요모양이냐고 나무랐다. 결국 같은 울타리안에 있는 고등학교에다 원서를 썼으며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선 부추겼다. 후기명문고등학교 써보라고 과거에 그렇게 해서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졸업식날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임에게 다시 원서 쓰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거절 당했다.
전기고 입시 끝나고 학교에 갔다. 표정이 다양했다 붙은 학생들은 좋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그렇질 못했다. 수업은 없었고 그냥 시간 때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2명의 학생이 가출을 하여 담임을 힘들게 하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었지만 떨어졌다. 나중에 등교 하였지만.... 졸업은 다음해 1월11일에 하였고 후기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학생들 말고 뿔뿔이 헤어졌다. 내가 들어간 고등학교는 설립한지 불과 4년 밖에 안된 학교였고 대전에서 알아주질 못했고 후기고교 였다. 그러다가 3년 지나 전기로 전환 되었다. 그당시 대전 지리 기준으로 볼 때 학교 위치는 변두리 농촌지역이었다. (지금 갑천이 대전시 경계) 지금의 대전 서부교육청(당시 대전시 교육청)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개발의 바람이 시작 되었다 6년간 다녀보니 꾸준히 변화 되었고 완전 도시로 변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재단 같은 교장인지라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 학생들을 많이 유치했다. 같은 반 학생하나는 가난하지만 공부 잘해 장학금 주는 조건으로 지원하야 합격했다
졸업과 동시에 모든게 분해가 되었다. 동창회도 없다. 보이지 않는 후유증이 남았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인간관계가 갈라졌다.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도 학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떠나갔으며 어디서 무얼하는지 모른다. 물론 나머지 동창들도 모른다.
1학년 3월 어느날 명문 00고등학교에 들어간 동창들이 모교 중학교에 왔다. 생활기록부를 떼러왔으며 교실에 들어가서 후배들에게 어떻게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동창하나 마주쳤지만 인사가 없었다. 아무리 같이 어울렸다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반가운게 아니라 그들은 명문 고등학교 나왔다고 으스대었고, 나머지 고등학교 나왔거나 시골에서 오는 학생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그런데 말이다 시험 결과 나보다 성적이 낮은 동창들도 여러 있었다.
여담이지만 같은 동아리 회원 동기가 술먹으면서 읍소재지 충남 00고등학교 나왔다고 무시했을거라고 했다고 뜬금없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전서 알아주는 언론인이 되었다.
그들 지금 어디서 무얼하는지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 지금 어디 어디 고등학교 나왔다고 자랑해봐야 소용없으며 오히려 팔불출 소리 듣는다.
당시 고입시제도는 내 뒤 뒤부터 연합고사체제로 변했다. 50년전 이야기이지만 생생한 기억이 남아있다. 성숙하지 못한 어린나이에 명문고 못 들어가면 인생이 곤두박질 당하는가 인생은 끊임없는 마라톤이다. 몇 년전 모교 개교 50주면 기념행사에 갔다. 우리 동기와 선배님들 사회에서 역할을 하며 성공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모교는 대전서 알아주는 학교이며 그 고교 나왔다고 절대 후회하질 않는다.
나를 아껴주었던 담임선생님. 직장잡고 스승의날 되면 축전을 보내주었고 어느날 연락이 왔다. 90년대 아들 결혼식때 찾아뵈었지만 마지막 만남이었다. 담임은 교장으로 퇴직하셨다.
오래전부터 대물림한 잔인했던 방법 고등학교 3학년때보다 더 끔직했던 시절. 지금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믿어줄까. 그당시 교사들 살아계시거나 고인이 됬을 것이다. 설령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기억 하실려나. 지금 중학생들에게 이렇게 했다간 난리 나며 학부모 언론은 가만히 있질 않는다. 이젠 흘려보내고 싶지만 흘려보내질 못하니 안타깝다. 과거에 메인 사람이 되기 싫은데 말이다. 남은 삶 의미있게 사는게 더 중요하다.

첫댓글
청우우표 님
긴 지난 날의 추억의 한페이지에
늦은 마중길입니다
11월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