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마저 사라져가는 세태
지난 5월 대학원생 논문 심사를 마치고 심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이 학교 근처 베트남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한데 음식을 주문하기 전 저마다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열심히 무언가를 입력하더라구요. 한 동료는 거동을 거의 못 하시는 친정 부모님을 위해, 또 다른 동료는 재수학원에 다니는 수험생 아들을 위해 저녁을 주문하느라 바빴던 겁니다. 저마다 배달 앱 사용 시 꿀팁을 공유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와중에 “제 휴대폰에는 배달앱이 하나도 안 깔려 있어요.” 했더니, “어머나, 선생님 댁은 배달이 안 되는 오지인가 봅니다.” 해서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휴대폰으로 부모님 저녁 식사도 챙겨드리고 아들 녀석 끼니도 척척 해결하는 모습을 보자니, 20년도 훌쩍 지난 일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이화여대는 중국의 연변대학교와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었습니다. 그 덕에 연변대학교의 조선족 교수들이 6개월~1년간 이화여대 초청을 받아 방문교수로 와서 기숙사에 머물곤 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기에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꽤 높았습니다. 조선족 교수들의 특강 자리에 청중이 몰려들곤 했으니까요. 주로 중국의 여성 및 가족을 주제로 한 발표가 이어졌는데, 강연 후 질의 응답시간에 단골로 올라오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중국에 두고 온 신랑 밥은 누가 챙겨주나요?” “밥을 와 챙겨줍니까? 본인이 알아서 챙겨 먹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질문이 이어집니다. “시댁이 가까이 있습니까?” “시댁은 기차로 10시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동문서답이 이어지곤 했지요. 시간이 지나 조선족 교수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 속 밥이 단순한 밥이 아니라, 집에 두고 온 남편을 누가 돌봐주느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요. 요즘이라면 남편 밥걱정하는 우문(愚問)을 던지진 않았을 테지요.
박완서의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는 '집밥'의 의미가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던 남자의 간청에 못 이겨 그와 결혼을 합니다. 남편이 된 남자가 아내가 된 여자에게 기대했던 건 단 하나, 바로 집밥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그 여자는 결혼생활 내내 한 번도 집밥을 해주지 않는 것으로 소소하게나마 복수(?)를 하고야 맙니다. 집밥을 그토록 갈망하던 남자의 절망감이 지금도 아프게 느껴질 정도랍니다.
박완서의 또 다른 에세이에선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은 남편 삼시 세끼 차려주는 것이 고달프기도 하고 솔직히 싫기도 해서, 아침 먹고 나면 멸치 한 봉다리 산다고 분당에서 제기동 경동시장까지 장보러 다니는 여고 동창생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남편 집밥 차려주는 것이 왠지 귀찮고 서글펐던 이유는 단순히 밥 때문이라기보다는 평생을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참 바보처럼 살아왔다’ 싶은 자괴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번도 ‘내 편’이 되어준 적 없었던 ‘남(의)편’을 향한 원망이 더해졌을 테구요.
저는 거꾸로 집밥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제가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던 날, 유학생활 중 가족처럼 지내던 대학 동창이 저를 위해 집밥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때 상에 오른 메뉴가 바로 구절판이었답니다. 미국식 퓨전 구절판이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귀한 밥상이었습지요.
저는 지금도 매식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름난 맛집 음식도 두어 번 먹고 나면 별로 당기질 않습니다. 음식 가려본 적 없고 입이 짧은 축에 들지 않음에도, 그렇습니다. 서울살이 시절, 아파트 실내 수리를 하는 동안 아무래도 부엌 사용이 불편해서 길 건너 가정식 백반집도 다녀 보고 안동국시집도 가보고 비지찌개집도 들렀는데, 닷새도 안 되어 완전히 질려버렸습니다. 상 위에 김치 하나만 올려놓고도 집밥을 먹는 것이 제일 개운했답니다.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집밥, 그 집밥이 사라져가는 세태가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차리는 추석상, 식구들이 함께 오순도순 빚던 송편, 솔솔 기름 냄새 풍기며 부치던 대구전 호박전 동그랑땡, 돌아가신 친정/시어머님 손맛이 밴 잡채와 갈비찜이 그리운 걸 보니, 저도 나이가 꽤나 들었나 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