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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들 건강장수비결-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선조 20)∼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현종 12)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14년 귀양살이를 이겨내고 장수한 비결은 기부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라는 연시조가 기억나십니까? 우리 국문학사에 빛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죠. 자연을 시로 승화시킨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선생은 시조문학의 대가이자 남인(南人)의 거두로서 노론의 송시열 선생에게 맞섰던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세 번에 걸쳐 무려 14년 7개월간이나 귀양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85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마지막 유배는 74세에서 81세까지의 노구에 7년이나 되었지만 잘 극복해 내고 여생을 보길도에서 보냈습니다.
윤선도 초상화. /정지천
고산의 장수비결도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였을까? 장수한 선비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청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요약됩니다. 고산도 오랜 귀양살이를 잘 견뎌내었으니 강한 정신력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청빈하고 검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고산의 집안은 전라도에서 16세기부터 지금까지 5백 년 동안 계속 이어져 내려온 대단한 부잣집입니다. 특히 1600년대 중반에 대규모의 간석지를 2곳이나 조성해 놓았는데, 전남 진도군 임해면 굴포리의 백만여 평과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의 백만여 평으로서 요즘 같은 중장비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죠. 집안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으니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최상급의 음식과 약으로 건강관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장수비결에 들어갈 것으로 여겨집니다. 집안에 내려오는 적선의 힘그런데 첫 번째 장수비결은 적선(積善), 즉 기부를 많이 한 것을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산의 고택에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가 현판에 걸려 있는데, 인근에서 관용과 적선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집안에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말이 전해 오는데, ‘세 번이나 옥문을 열어준 적선의 집’이라는 뜻이죠. 이것은 집 주변에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지역민들이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마다 고산의 고조부인 윤효정(尹孝貞)이 세금을 대신 내줘 세 번이나 감옥에서 꺼내 줬다는 일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적선은 가훈의 핵심덕목이라 할 수 있는데, 기부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편안해져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녹우당 현판 /정지천
● 강직한 성격 탓에 오랜 귀양살이를 하다.
고산은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8세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되었습니다. 그의 양부도 종가에 양자로 갔다가 자식이 없어 고산을 양자로 삼았으니 숙부가 양부가 된 셈이죠. 종손은 그 역할이 막중하기에 심리적 부담감이 커서 건강 장수에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2세에 양모를, 23세에 생모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26세에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생부의 건강이 위중해져 병간호를 했는데,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0대의 대부분을 상복을 입고 지낸 셈이니 상당히 힘들었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17세에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부부는 53년간 고락을 같이 하다가 한 살 아래인 부인이 68세로 먼저 사망했습니다.
삼개옥문 /정지천
● 고생스런 귀양살이는 강직한 성격 탓
고산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14년 7개월간 여러 유배지에서 귀양살이를 겪어야 했고, 항상 많은 정적들 틈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30세의 나이에 벼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권력실세였던 이이첨의 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음 해에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양부도 아들의 상소 때문에 강원도 관찰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죄 때문에 아비의 벼슬이 떨어졌으니 그 자식의 마음은 엄청 무거웠겠죠. 고산은 먼 길을 걸어 도착한 유배지에서도 양부의 안부를 걱정했는데, 외롭고 힘겨운 마음을 ‘울고 가는 기러기’로 표현한 시조를 남겼습니다. 1년 뒤에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변경됐는데, 다음 해에 양부가 사망했습니다. 다행히 인조반정이 일어나 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던 것이죠.두 번째 귀양은 52세 때였는데, 사도사 정(司導寺 正)이라는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보길도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에서 대궐로 돌아온 인조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났습니다. 74세 때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함경남도 삼수로 유배되었습니다. 삼수(三水)는 갑산(甲山)과 함께 우리나라 최북방의 추운 곳으로서 귀양지로 유명하지요. 늙은 나이에 그 곳에서 지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무려 5년이나 흘렀는데,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가 전라남도 광양으로 옮겨졌습니다.추운 지방인 삼수에 비해 남쪽의 광양은 지내기가 편했나? 겨울을 지내기는 훨씬 나았겠죠. 그런데 광양도 흉년으로 피해를 입었고, 남인의 영수인 허목(許穆)의 표현에 의하면 “남쪽 바다끝 바닷가로 풍토가 심히 나빠서 난환(難換)과 기괴한 병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하였으니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년이 지나 81세가 되어서야 왕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보길도에서 지내다 85세로 사망했습니다.
● 정적의 중병을 고쳐준 윤선도
노년에 북쪽과 남쪽의 그 힘든 곳에서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여생을 보낸 고산의 건강비결에는 무엇보다 선생이 뛰어난 한의사였다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의학과 관련해서 고산의 기록이 최초로 실록에 나타난 시기는 인조 임금 때입니다. 인조, 효종, 현종 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의약을 위해 고산을 불러들인 것으로 볼 때, 대단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궁중의 내의원에는 당대 최고의 명의들이 있었지만 치료가 되지 못했기에 고산을 불렀던 것이죠.
한약 /조선일보 DB
정적의 중병을 고쳐준 뛰어난 의술 치열하게 당파싸움을 벌였던 정적인 원두표(元斗杓)의 중병을 낫게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원두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인물로서 고산의 반대당인 서인(西人)의 우두머리였죠. 고산이 원두표의 부당한 처신에 대하여 효종께 상소를 올려 강하게 비판하였기에 철천지원수가 되었던 것이죠.“평원부원군 원두표는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포학하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으므로,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원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잘 죽기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의 밝은 임금이 공신을 보전한 덕이고, 이러한 사람을 먼 변방으로 내치는 것은 옛날 성인이 망설이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 도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명하여 연말까지 한가롭게 놀게 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굳어지고 조정이 안정된 뒤에 그가 새로워지거든 다시 등용하소서. 그러면 종사에는 실로 억만년 끝없는 복이 되고 원두표에게도 억만년토록 얻기 어려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이런 상소를 올렸지만 원두표는 효종의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실세였던 지라 오히려 고산이 벼슬에서 파직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이였던 원두표가 위독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고산의 처방을 쓰면 나을 수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정적이고 뭐고 가릴 지경이 아니었기에 아들 원민석이 고산을 찾아가 처방을 내려줄 것을 청했던 것이죠. 그러자 고산은 두말 않고 처방을 내어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원두표의 측근 중에는 철천지원수가 지어준 약이니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원두표는 고산을 알기에 그 약을 먹었던 것이죠. 결국 병석에서 일어난 뒤에 “윤선도와 원수를 맺지 말아라. 그는 나의 은인이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고산의 뛰어난 의술이 더욱 인정받았던 것이죠
● 고산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이유
고산은 양아버지에게 직접 배우다가 임진왜란 중에는 산속의 절에 들어가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과거 공부도 했지만 역사, 역학, 산수, 풍수, 지리, 복서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고 의약도 공부하여 의학적인 배경지식까지 갖춘 만능지식인이었죠. 집안이 대체로 시서화에 능하고 유학과 경제, 지리, 의학, 음악 등에도 재능을 발휘했는데, 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잡학이라고 천시하는 의학, 천문학, 점성학 등을 대대로 공부했던 점은 특이합니다. 고산이 특히 한의학 공부를 많이 하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그가 공조참의라는 벼슬을 사직하려고 올린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라는 글을 보면 경위가 나옵니다.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여 부모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한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습니다.고산의 이런 말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였던 정이천(程伊川) 선생이 말한, “병들어서 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을 불효에 비교하니,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또한 의술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그런데 집안 분위기도 그러했습니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항상 약장을 비치해 놓고 살았을 정도로 의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녹우당에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 썼던 약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의약에 통달한 고산은 집안에서 약포(藥鋪)를 직접 운영하여 인근에 사는 병든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의학을 일종의 천한 기술로 여기던 당대의 시류와는 달리 직접 진료하고 처방전을 내려 약을 지어주었던 것이죠.
중형 한약장 /정지천
고산이 남긴 한의학에 관한 자료고산의 ‘약화제(藥和劑)’에 의하면 오선주방(五仙酒方 : 건강 약술), 선창약(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 회충약(蛔蟲藥), 해수약(咳嗽藥 : 기침, 가래 치료약), 복학신방(腹虐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 우역신방(牛疫神方 :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처방) 등이 있습니다. 다양하고 신기한 처치법이 남아 있어 의술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데, 우역신방을 활용하면 광우병 같은 것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음악과 시에 일가견이 있었던 고산
고산은 일생토록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음악과 더불어 지냈기에 귀양살이
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
산이 남긴 작품은 매우 많은데, 특히 불후의 시조들을 남겼습니다. 조선의 문학
에서 장가, 즉 긴 문장은 송강 정철이요, 단가, 즉 짧은 문장은 고산이 제일이라
는 말이 있지요. 고산의 시조를 보면 자연 속에서 안락과 평화를 느꼈던 것으로
생각되고, 정치무대에서의 비인간적인 투쟁과 욕망 등으로부터 자연에로 해방
된 속 시원함을 즐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 생활을 노래한 연시조
입니다. 고산이 65세 때(1651년)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
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었습니다. 봄, 여름,가을, 겨울
각 10수씩 40수로 되었고,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전해옵니다. 그리
고 오우가(五友歌)는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노래한 시입니다. 물의 맑
음과 끊임없는 흐름, 바위의 변치 않음, 소나무의 늘 푸르름과 뿌리 곧음, 대나
무의 곧음, 달의 보고도 말 아니함 등을 신의, 절개, 기개, 관용, 침묵 등의 인간
의 미덕과 연결한 것이죠. 이 두 작품은 고산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우리말의 아
름다움을 잘 나타낸 연시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보길도 전경 /정지천
고산은 음악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나? 고산은 남달리
깊은 시심(詩心)을 가진 데다 음악을 사랑했고 조예가 깊었던 풍류인이었습니
다. 특히 가야금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 두었는데, 당시 거문고의 명수인 권해(權
海)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감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곡과 연주도 했습니다. 고산에게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던 것이
죠. 고산은 가무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게 즐겁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
다.
고산의 글에 보면 “<예기(禮記)>에는 ‘13살에 음악을 배운다’ 했고, <소학(小
學)>의 제사(題辭)에는 ‘읊조리며 노래하고 춤춘다’ 했고, 정이천(程伊川) 선생
도 또한 ‘가르치기를 가무로써 하면 어린애들이 배운다’ 했으니, 모두 옛 성인들
의 음악에 담긴 그 속뜻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에야 음악을
할 수 있다면 성인이 어찌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이르겠습니까”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언급을 보면 고산이 음악을 하는 이유에는 ‘시가무합일(詩歌舞合
一)’이라는 동양의 유교적 예술철학인 <예기, 악기(禮記, 樂記)>의 예악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가, 무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
이기 때문에 고산에게 있어서 노랫소리와 춤의 자태는 시와 서로 같은 것이었으
며, 그것은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죠. 이는 “하루도 즐겁게 놀지 않으면 심성을 수양하며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음악을 생활화하다
“음악이 기쁨을 돕는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산은 음악으로부터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
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속(末俗)에서는 음악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기쁨
을 돕는 것인 줄만을 알고 있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번거로운 소리만을 즐겨
듣고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에 대해
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루한 사람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
는 병통인 것입니다”라고 하여 우려를 나타내었죠. 음란하고 방탕한 음악만 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야금 연주 /조선일보 DB
고산은 “소리라는 것은 천기의 유동에서 나온 것이며…
만일 주흥으로 노래하고 항상 춤추어서 방일에 빠져 돌아오기를 잊는다는
것 때문에 경계하느라 없애버린다고 한다면, 거의 목이 메인다고 밥을 먹지 않
고 국이 뜨겁다고 나물을 불어 먹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희음을 고요히 듣
고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생각함으로써 즐거우나 방일하지 아니하고 서러우나
마음 다치지 아니하며 서두르지도 아니하고 게으르지도 아니하는 뜻을 얻는다
면 그 배우는 이에게 유익함은 예나 이제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
습니다. 음악을 생활화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죠.
● 고산이 남긴 음악에 관련된 유물
고산선생이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이 뒷날 노래 부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불러
지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산유물관에는 아속가사(雅俗歌詞), 회명정
측(晦暝霆側), 낭옹신보(浪翁新譜), 고산유금(孤山遺琴) 등이 남아 있는데, 이것
은 선생이 거문고로 직접 작곡하고 연주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아속가사는 우
리나라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아악과 속악의 가사를 모아 엮어 놓은 책입니
다. 회명정측은 거문고의 제작과 사용방법을 수록해 놓은 책입니다. 낭옹신보는
거문고의 명수인 김성기의 거문고 가락을 채보한 악보로서, 김성기의 아들과 그
의 제자들이 제작한 것이죠. 고산유금은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거문고인데, 거
문고에 쓰인 글씨는 고산의 4세손인 윤덕희가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 고산과 달리 장수 못하고 48세로 타계한 증손자 윤두서
고산의 후손 중에 걸출한 문인화가였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라는 분이 있
습니다. 공재는 고산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한데, 85세
까지 장수했던 고산과는 확연히 다르게 불과 48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
다. 더구나 모친이 83세까지 장수했고, 형이 72세까지, 그리고 장남도 81세까지
살았으니 예외적으로 유난히 단명한 셈이죠.
동국여지도 /정지천
공재는 태어난 지 이레 만에 큰집에 양자로 가서 종손이 되었습니다.
15세에 혼인하였는데, 부인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지봉유설(芝峰類
說)>을 지은 이수광(李睟光)의 증손녀입니다. 그러니 본가와 처가 모두 실학자
집안인 셈이죠. 실제로 공재는 성리학은 물론이고 천문, 지리, 수학, 병법, 서
예, 음악, 회화, 공장(工匠), 의학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실학자였
는데, 26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리
와 그림에 재능이 탁월하여 숙종임금의 명에 의해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를
그렸습니다.
동국여지도는 보물 48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 보물 850호>보다 150년 정도 앞선 것이죠. 이 지도는 사실적이
며 채색도 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운데,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대부분 정확하
고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주변 섬들을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
로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대마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국여지도를 보면
대마도가 우리 땅인 셈이죠.
공재가 그린 유명한 그림은?
국보 240호로 지정된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묘사를 매우 정확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힙니다. 자화상을 보면 눈과 수염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초상화의
눈빛에 압도되어 똑바로 쳐다보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지요. 눈에서 강력한 기운
이 뿜어 나오는 것 같고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긴 수염이 마치 기를 내뿜는 듯
합니다.
●강한 체질을 타고난 윤두서가 요절한 특별한 사연
자화상에 눈과 수염이 강조된 이유는 뭘까요?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냥’이
라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빛만 봐도 사람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듯이 한의학의 진단에서도 눈의 진단이 중요합니다. 눈은 간
장과 연계되어 있는데, 오행(五行)에서 눈과 간장이 ‘목(木)’에 속하기 때문입니
다. 그런데 ‘수생목(水生木)’으로서 ‘목’은 ‘수(水)’의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수’에 해당하는 신장의 음기가 간장에 정기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간장
과 신장의 기가 충족해야 눈이 밝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과로하거나 큰
병을 앓거나 성생활이 지나쳐서 신장과 간장의 음기가 상하면, 눈의 정기도 떨
어져 눈이 피로하고 침침해지게 됩니다.
국보 240호 자화상. /정지천
수염도 워낙 풍성해서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와 장비의 수염을 합쳐놓은 것 같습니다. 한의학적으로는 신장의 기가 왕성해야
수염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니 공재도 신장의 정기가 강했을 것이고, 장수한 고
산의 체질과 기를 물려받은 데다 종손이라 재산도 풍족했지요. 그렇다면 분명
오래 살았어야 했는데 오십조차 넘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 공재가 장수하지 못하게 된 특별한 사연
그의 삶에 슬픔이 무척 많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22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
났고, 27세에 양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9세에는 셋째 형이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사망했습니다. 30세에는 큰형이 모함을 받을 때 함께 연루되
어 고생했고, 32세에 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37세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셨
고, 39세에는 절친한 벗 이잠(李潛)이 흉서를 올렸다고 해서 맞아 죽었습니다. 4
3세에는 친한 벗인 심득경(沈得經)이 죽었고, 45세에는 양어머니가 돌아가셨습
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죠. 46세에 서울을 떠나 아주 해남(海南)으로 내려왔더
니 이듬해에 맏형이 죽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48세 겨울에 우연히 감기를 앓다
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2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양부모, 친부모에다 형제, 부인,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
의 죽음을 연달아 겪었던 것인데, 이처럼 마음에 큰 상처가 되는 일을 연속으로
당하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므로 기운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의지가 꺾였고 명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정신과 육체
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형일체(神形
一體)’이기 때문에 ‘정신’이 약해지면 ‘형체’ 역시 강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지
요. 특히 ‘의지(志)’는 오장 중 신장에 연계되어 있기에 의지가 꺾이게 되면 신
장의 기운이 떨어지게 됩니다. 신장의 기가 허약해지면 각종 질병에 쉽게 걸리
고 노화가 빨리 진행되지요. 공재는 삼십여 세에 벌써 백발이 나타났다고 합니
다. 물론 삼년상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니 쇠약해질 수밖에 없기도 하죠.
● 고산 집안의 특별한 건강식품
고산 집안은 대단한 부호였으니 당연히 좋은 음식도 많았겠죠. 게다가 뛰어난
한의사이기도 했으니 음식도 그야말로 건강식을 먹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과
연 어떤 진귀한 음식이 전해오고 있을까요?
고산의 고택에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가 현판에 걸려 있는데, 그 유래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고, 또 ‘집 뒤의 비자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흡사 비
오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녹우당 뒤에는 비자나
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데, 이 숲은 천연기념물 24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
다. 이 집안의 건강 음식은 특별히 귀한 것이 아니라 비자열매를 이용해 만든 것
입니다.
고산 고택 뒤의 천연기념물 비자림. /정지천 비자열매는 어떤 약효가 있기에 그
런 부잣집에서 음식 재료로 사용해 왔나? 비자(榧子)는 남해안과 제주도가 산지
인데, 열매가 한약재로 쓰여 왔습니다. 비자나무 열매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중간 성질로서 폐와 대장 경락으로 들어가 작용을 나타냅니다. 옛날부터
구충제로 사용해 왔는데, 살충 효능이 있어 회충으로 복통이 있는 사람에게 특
효약입니다. 옛날에는 회충을 비롯한 각종 기생충이 많아 문제가 됐었는데, 이
집안사람들은 비자로 만든 음식을 늘 먹어서 기생충으로 인한 장애가 적었기에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자나무 열매는 응어리를 삭여주며 건조한 것을 윤택하게 하는 효능도 있습니
다. 그래서 건조한 기침, 변비, 치질 등의 치료에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노
년기에 흔하게 생기고 고질병처럼 오래 가는 기침과 변비에 좋은 약이므로 노인
의 건강관리에 좋은 음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비자열매를 많이 먹으면 장
을 미끄럽게 하여 설사를 일으키므로 주의해야 하고, 열을 도우므로 열이 나는
기침에는 쓰지 말아야 합니다. 비자 열매는 향이 진한 까닭에 여름에는 모기향
으로 써도 좋다고 합니다.
비자 열매 사진. /정지천
● 비자나무 열매를 이용해서 만든 음식
대대로 비자강정을 만들어 먹은 것이 유명합니다. 가을에 비자가 다 익으면 저
절로 떨어지는데, 이것을 주워서 씻지 않고 그대로 항아리에 넣어 삭입니다. 비
자는 향이 진하기 때문에 근처에 벌레 같은 것이 없어 깨끗하다고 합니다. 일주
일 정도 지나면 껍질이 삭아 없어지고 땅콩껍질 같은 알맹이만 남게 되는데, 이
것을 햇볕에 보름 정도 잘 말립니다. 그것을 다시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흘 정도
더 말리는데, 흔들어 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나면 잘 말려진 상태라고 합니다.
비자가 나지 않는 다른 지방에서는 어떤 음식으로 구충 효과를 얻었을까? 우리
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가운데 기생충을 없애주는 효과를 가진 것이 많습니
다. 대표적인 것이 매실입니다. <소설 동의보감〉에서 황해도 지방에 번진 역병
(疫病), 즉 전염병을 물리치게 했던 약재였죠. 항균작용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살충 효과가 있어 회충으로 인해 배앓이를 하는 경우에 좋은 약이죠. 은행도 항
균, 살충 효과가 크고, 살구도 그렇습니다. 유근피(楡根皮)도 살충효과가 큰데,
느릅나무껍질이죠. 그리고 마늘이 항균 살충효과가 크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
고, 그밖에 양념으로 먹는 고추, 생강, 산초도 살충효과가 큽니다. 호박에도 살
충효과가 있습니다.
비자열매를 대신할 기침과 변비에 효과가 있는 건강음식 재료로는 살구, 호두,
잣 등이 있습니다. 살구는 기침을 그치게 하고 천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고,
대변을 잘 나오게 하는 작용도 있어 노인성 변비에 좋습니다. 씨를 약으로 쓰는
데, 행인(杏仁)이죠. 행인은 기침, 천식의 치료에 쓰이고, 기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생긴 변비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늘 가래를 뱉어내면서 숨이 차고
변비로 고생하는 노인에게 좋은 약입니다.
호두는 약효가 아주 많은데, 허약해서 생긴 기침, 천식에 탁월한 효과가 있을 뿐
만 아니라 위와 장에 윤기를 주어 부드럽게 하므로 변비에도 좋습니다. 잣은 신
선이 먹는 음식이자 가난한 선비들이 몇 알로 한 끼니를 때웠듯이 영양과 약효
가 큽니다. 폐에 윤기를 주어 부드럽게 하므로 폐가 건조해서 생기는 마른기침
에 좋고, 장에 윤기를 주므로 허약한 노인의 무력성 변비에 좋습니다. 물론 살
구, 호두, 잣은 모두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도 아주 큽니다.
살구(왼쪽부터), 호두, 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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