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주님 십자가 길의 동반자
눈을 의심했다. 재난 영화나 AI 생성 화면인 줄 알았다. 네팔 홍수에 관련된 숫자들을 듣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럴 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늘 작은 이들이다. 통신, 전기 시설이 파괴돼서 현지 주민과는 대화가 어려운지 한국에 사는 네팔인들, 특히 피해 지역에 가족이 있는 이들과 한 인터뷰가 방송됐다. 그중 한 사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느라 고통스러워했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의 가족들이 그 만년설, 빙하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그 댐을 부수지도 않았다. 나도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엄청난 피해를 봤다. 원인은 지구 온난화다. 이제는 온난화가 아니라 열대화라는 말이 어울린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해서 더워진 건지, 지구 역사에 빙하기 있었던 거처럼 때가 돼서 그런 건지 그 원인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산업의 급속한 발전 즉 인간 활동의 증가와 무분별한 개발을 상징하는 이산화탄소 증가가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를 덥게 한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인간들 중 하나가 나다. 우리다. 돌아가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주 지적하셨듯이, 자연환경 파괴는 가난과 직결되어 있다. 인간의 무절제한 탐욕이 빚어낸,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고 재앙이고 그 첫 번째 피해자는 늘 가난한 이들이다.
오늘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그의 탄생일(6월 24일)과 함께 그의 수난과 죽음도 기념하는 유일한 성인이다. 성인이 예수님과 친척 관계라서가 아니라 구세주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예고했기 때문이겠다. 아마 그래서 예수님이 성인을 두고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라고 칭송하셨을 거다. 탄생, 선교 사명, 수난과 죽음까지 성인의 인생은 구세주의 지상 삶을 미리 보는 것 같다. 신비로운 탄생과 독설에 가까운 강력한 예언은 좋은 데, 무기력하게 당하는 수난과 허망한 죽음이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이 지닌 운명이라는 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구세주는 약한 이들을 당신 십자가 길의 동반자로 삼으신다고 한다.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이 한 몸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람이 되신 진리요 사랑이다. 진리와 사랑인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수난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다. 진리와 사랑은 박해받게 되어 있어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
예수님을 따르면, 하느님 편에 서면, 복음을 전하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박해받는다. 수난과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많이 수고하고 손해 보고 때로는 다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12) 이 약속을 믿어도, 막상 그런 현실, 예언하고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는 때가 되면 주춤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박해와 폭력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 된다. 지금 그 토사에 휩쓸리고 또 그 아래 묻혀있는 이들이 예수님 친구들이고 예수님이다. 눈물 흘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사죄(謝罪)의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 이제는 생활을 바꿀 때다. 아니, 학자들 말에 따르면 늦었다. 그래도 자연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믿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연환경 보호와 보전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들고 드릴 말씀이 하나라도 있을 거다.
예수님, 말못하는 동물들을 보살피는 거처럼 식물들도, 대지와 공기도 마찬가지임을 기억합니다. 저희를 빚어 만드시고 세상에 내신 이유가 바로 그들을 잘 보살피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힘센 자들의 횡포로 고통받는 약한 이웃들을 위로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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