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336장 (구 383장) / 사도행전 7 : 51 - 60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336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7장 51절 – 60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멘!
우리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범은 가죽을 남긴다.” 그렇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개!” 하면 그 사람에 대한 Image가 그려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좋은 이름으로 지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좋은 이름보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설사 이름이 안 좋아도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면 그 이름이 저절로 좋은 이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됩니까? 출애굽의 영웅, 그리고 구약 시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종, 정말 훌륭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름이 본래 무슨 뜻입니까? ‘물에서 건져낸 사람’ 이란 뜻입니다. 그 유래를 알면 이름치고는 평범하다 못해 유치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영광스런 이름, 아름다운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사십시오. 혹시 평범하거나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아름답게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이 나중에는 하늘에서 빛나는 이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스데반 집사님은 그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 빛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 - 면류관’ 이란 뜻입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심판 때에 승리한 성도들에게 씌워주시는 관을 의미합니다. 그의 부모가 아들을 낳고 “얘야,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서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스데반”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소원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좋다고 지금 스데반의 이름타령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스데반이 인생을 엉터리로 살았다면, 그 이름은 우스꽝스런 이름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조롱했을지도 모르죠. “뭐, 스데반? 웃긴다, 웃겨! 면류관은 커녕, 개털 모자도 못 쓰겠다!” 아마 이랬을 겁니다. 다행히 스데반은 그 이름이 어울리는 이름대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스데반집사님은 정말 그 이름 그대로 ‘면류관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의 최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독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순교는 신앙인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순교자를 통해 큰일을 행하십니다. 2천년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순교의 피로 세워져왔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만한 부흥을 이룬 교회는 유례가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초기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번 왔다가 어차피 한번 죽는 법인데, 천국이 있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게 확실하다면 순교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그렇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입니다. 공회의원들이 스데반 집사님의 십자가와 부활 설교를 듣고 발악을 하지만, 정작 스데반집사님은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여러분! 한 인생이 왔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그런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불신자들은 정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아멘! 마태복음 16:27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아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스데반집사님은 이 목표를 갖고 살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상을 받는 세 가지 기준을 가졌습니다. ① 성화된 인격 : 하나님은 고난과 환란이 많은 세상에서 인내하며 성화된 성도들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스데반집사님을 보십시오.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고 있는가! 그가 공회에서 설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그를 돌로 쳤지만,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59절, 6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드렸던 기도를 드리며 순교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님에게 면류관이 주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 받는 기준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받은 대로 실천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주고받는 조건적 사랑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을 초월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이웃에게 실천해야 됩니다.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일일이 기억하셨다가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냉수 한 그릇이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한 것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주십니다.
세 번째 상 받는 기준은 복음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감당할 사명은 복음 증거입니다. 나를 구원한 십자가 복음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을 주십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양육한 성도들을 ‘자랑의 면류관’ 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설 때 내세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오직 우리의 증거로 천국에 간 성도들이 나를 위해 면류관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스데반집사님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게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 55절 말씀에 보면 그 원동력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 ”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이런 성령 충만 삶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모두 스데반 집사님처럼 성령 충만해서 하늘의 면류관을 쓰고,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이름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처럼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천국에 입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