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尙友(12) 조선의 유학자(1)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정약용은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었다. 4살 때 천자문을 공부하고 7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짓고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엮었다.
하루는 실학의 4대가로 불리는 이서구가 대궐로 들어오다가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당나귀에 서책을 가득 싣고 북한사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서구는 10여 일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그 소년을 다시 만났다. 소년은 당나귀에 서책을 가득 싣고 북한사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하는 녀석인데 글을 읽지 않고 돌아다니느냐?”
“책을 읽고 절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소년이 공손하게 대답 했다.
“당나귀에 실은 책이 무슨 책이냐?”
“강목(綱目)입니다.”
소년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주자가 편집한 방대한 중국 역사책이다.
“강목을 어찌 열흘 만에 다 읽을 수 있다는 말이냐?”
“읽은 것이 아니라 외웠습니다.”
이서구가 깜짝 놀라 시험 해 보니 다 외우고 있었다. 읽기도 어려운 책을 다 외웠다는 것은 정약용이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약용은 1789년 정조 13년 봄에 성균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식년시에서 갑과 2위로 합격하여 정조 때에 기재(奇才)라고 일컬어졌다.
초계문신으로 있던 정약용에게, 11월 어느 날 ‘태평만세’라는 말을 넣어 시를 지어 올리라는 어명이 내렸다. 정약용이 응제시를 짓자 정조는 “담배 피우는 사이에 붓을 놀려 금방 쓰니, 어찌 기재(奇才)가 아니냐!”고 평가 했다. 며칠 뒤의 응제시 에서도 다시 ’기재‘로서 포창을 받았다. 정조가 정약용을 기재라고 포창한 것은 정약용을 높이 등용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1795년 윤2월 9일에는 병조참의로 있던 정약용이 군호를 잘못 정했다는 것을 이유로 아흔아홉 번이나 개정을 명하여 특별한 사랑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죄를 속량하려면 ‘폐하수만세(陛下壽萬歲) 신위이천석(臣爲二千石)’이라는 시제로 100운 1400언의 칠언배율〈왕길사오사(王吉射烏詞)〉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정약용이 불과 세 시간 만에 장편시를 지어 올리자, 정조는 “이런 참된 재주는 다시 보기 어렵다.”는 어비(御批)를 내렸다. 규장각 제학 심환지도 정약용을 ‘문원(文苑)의 기재’라고 칭송 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급서하고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년이나 긴 유배생활을 하고 그 후에 다시는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500여권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 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정약용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다산을 가장 존경한다.
다산이 왜 그리 긴 유배가 해배되지 않고 해배된 후에도 18년이나 살았는데도 조정에 등용되지 못했다. 다산 같은 뛰어난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고 그리고 조선은 기울어지고 제국주의 틈바귀에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다산이 다시는 등용 되지 못한 것은 남인이 몰락한 원인도 있지만 서용보라는 사람과의 약연이 있었다. 다음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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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동상
☞ 정약용(丁若鏞)의 호
⦿ 다산(茶山)
강진 유배 18년 동안 가졌던 호. 다산은 유배 당시 처음에는 강진의 주막의 주 모 집에서 거처하다가 그 후 윤박의 별장에서 기거하였는데 산 주변이 차가 심 어져 있어 茶山이라 하였다.
⦿ 여유당(與猶堂)
여유당은 당호(堂號)이다. 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대목으 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네 이웃을 두려워하듯 이” 의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을 조심하여 살아간다는 뜻.
· 老子 제15장 顯德의 章
與兮若冬涉川( 여혜약동섭천) 조심하기를 겨울에 언내를 건너듯 하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신중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라.
정약용은 정조가 갑자기 서거한 후 낙향하여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초 천(다산의 생가 앞을 흐르는 조그마한 천)에서 與와 猶의 첫 글자를 따 여유 당이란 방을 짓고 은거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닥쳐올지도 모르는 천주교 박 해 등 세태에 대한 다산의 심정을 호에 이입 시킨 것이라 생각 된다.그러나 결 국 18년 이라는 긴 유배 길을 피하지 못했다.
· 猶는 고대의 원숭이과 동물로 매사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웠다고 전해지고
· 與는 豫가 변형된 것으로 고대의 덩치가 큰 코끼리과 동물로 매사 조심스럽고 신중했다고 전해진다.
⦿ 삼미자(三眉子)
삼미란 눈썹이 셋이라는 뜻으로 정약용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이 때 눈썹에 흉터가 남아 마치 눈썹이 세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삼미자라는 호 를 사용하였다.
⦿ 사암(俟菴)
당시의 현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정약용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후손들의 평 가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뜻에서 지은 호이다. · 俟(기다릴 사)
⦿ 열수(洌水)
열수란 조선시대에 한강을 이르는 말이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 바로 한강변이 다. 그래서 정약용은 그 곳을 이르는 뜻으로 지은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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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 생가 여유당(與猶堂)에서 (20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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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생가
첫댓글 송암님 강의 잘 청종 했습니다 우리 5070 때 다산선생님 생가도 갔던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역사에 연구가 이신 박사님 같습니다 탑만 연구하신 줄 알았는데... 훌륭하신 우리 송암님 같으신 동문님이 친구? 임이 자랑 스럽습니다 여유당앞에 여유있개 앉아계신 사진 뵈오니 건강도 좋아 보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늘 선비 같은 그대 속 깊은 강연에 매일 취해유 '남은여생' 여유롭게 지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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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속에 다산 정약용 같이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분의 업적을 널리 알려준 친구야 고맙다. 감사
다산선생께서 어려서 기재셨겠지만, 독서에 빠지신것이 결국, 조선조 최고의 학자에 이르신 연유로군요, 좋을 글 감사
다산의 왕펜(?) 송암! 어쩌면 송암님의 멘토가 아닌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