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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5월 15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5-11)
"When the Counselor comes,
he will convince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실라스는 필리피에서도 박해를 받는다. 선교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행정관들은 그들을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밤이 되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은 파괴된다. 놀란 간수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바오로의 말을 듣고 회개한다. 주님의 영께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이다(제1독서). 스승님께서는 보호자께서 오실 것을 알려 주신다. 진리의 성령이시다. 그분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두려운 믿음을 밝은 믿음으로 바꾸어 주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의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많은 이가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기는 것’을 먼저 연상합니다. 계명 준수에 젖어 ‘하지 말라는 말’에 익숙한 탓입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먼저 믿으라고 하십니다. 죄는 그다음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을 우선적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신 것이 ‘용서’였습니다. 사랑은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와 연관된’ 믿음을 넘어 ‘사랑과 연관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생활이 됩니다. 죄를 피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믿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늘 아픈 이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신앙인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힘을 받으면’ 가능해집니다. 그분의 사랑은 ‘실천하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활이 죄를 넘어서는 삶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의 모습이지요.
심판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좌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죄와 연관된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연관된 심판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겁주는 예수님은 그분을 폄하하는 일입니다.
☆☆☆
오늘의 묵상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입니다.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죄와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는 암시입니다. 믿음의 길은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만큼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이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큰 죄’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면 ‘더욱 큰 죄’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은총이 감싸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기에 주님의 힘이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 역시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보답일 것입니다. 보호자는 성령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은총과 함께 오십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깨달음의 은총과 함께 오시는 분이십니다.
고집이 심하면 신앙생활은 쉽게 망가집니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말도 가끔은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고집을 신념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의 변화를 주도하셨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언제나’ 고집보다 바른 자세입니다.
★★★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공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기록된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에 대한 의무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등장은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이 잘났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수없이 감행하였고 번번이 실패하였던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민족임을 점차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의 기적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의 경직된 신앙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던 경직성입니다.
믿음의 한쪽만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타인의 믿음을 인정할 줄 모를 때 생기는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오셔서 잘못을 바로잡아 주셔야 했습니다. 관용이 고집보다 언제나 바른 자세입니다.
작고 소박한 시작
- 정순옥 수녀-
2003년 11월 한국여자수도자 장상연합회 총회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수녀들의 공동사목이 제안되어 4개 수녀회가 2004년 4월 18일 ‘국경 없는 친구들’ 상담소를 부천시 역곡동에서 열고 무보수로 더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상담소를 운영했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작이었지만 3주년이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일곱 개 수도회가 참가하게 되었다.
때마침 의정부교구에서 다문화 가정을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2007년 12월 9일 세 수도회가 분할해 의정부교구에서 ‘국경 없는 친구들 - 파주 다문화가정센터’ 를 새로 시작했다. 언제나 시작은 쉽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우리의 공동사도직은 계속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는 증표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계화의 흐름인 대형화와 물질화와 무한경쟁의 중심에 영혼을 바치라고 유혹한다. 가끔 상근자 한 명 없이 사업이 되겠냐는 물음을 받는다. 우리 센터는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 기쁘게 소외된 결혼이민자를 찾아가고 경청하면서 갈라진 세상 안에서 예언직을 살고자 한다.
의정부교구에서 우리를 초대할 때 담당 신부님은 변두리에서 작게 시작할 것이라며 미안해 하셨다. 하지만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다. 예수님도 교회를 시작하실 때 훌륭한 건물이나 재물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경쟁력 없어 보이는 열두 제자를 뽑아 당신의 정신을 담아주시어 세상에 파견하셨다. 사람이 일을 한다, 하느님의 정신으로 가득 찬 소박한 사람들이 ….
보호자이신 성령
-이준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건네십니다. 그런데 이 고별사의 문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치열한 법정의 논쟁 과정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는
본래 그리스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데 이는 ‘변호사’란 뜻으로
본문에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 전반에는 예수님과 그분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법정 논쟁의 분위기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한 우리 신자들도 매일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상,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큰 손해를 보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속삭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세상의 논리대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길이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로서 때로 세상으로부터 오해, 미움,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갑시다.
고통 절연, 행복 절연
-김찬선신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상황에서
주님과 제자들의 태도는 매우 대조됩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마치 어린 자녀를 이 세상에 두고 떠나는 어미의 마음입니다.
이에 비해 제자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데도
어떻게 되실지 주님께 대한 걱정은 않고
자기들이 어떻게 될지 근심에 쌓여 있습니다.
철부지 이기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어제는 월 피정 지도를 위해 수녀원에 갔습니다.
산보를 하면서 아침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근처 동네 사람이 수녀원에 와서 체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많은 곳 놔두고 14처 십자가의 길,
맨 끝에 피에타 상이 있는 곳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Passion(수난)을 Compassion(동병상련)하는
그 피에타 상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래서 그에게는 피에타 상으로 인해 동병상련이 일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건강만이 중요하고
그래서 거기서 그는 건강 수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독한 단절을 보았습니다.
어떤 의미도 무의미하고,
어떤 감동도 무발생하고,
어떤 표지도 무의미하고,
그래서 어떤 성사(Sacramentum)도 무발생합니다.
이런 묵상을 하다가
그 사람에게 향하던 눈을 저에게로 돌렸습니다.
나는?
어쩌면 그만큼 완전한 절연체(絶緣體)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전도체(傳導體)도 아닙니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느끼고, 받아들이고, 반응합니다.
그러다 그 선을 넘으면 마치 과부하가 걸리면 전기가 자동 차단되듯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감각을 닫아버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동결 반응-무감화(numbness)-무력감-전위.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사랑과 관심을 동결할 때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무감화에 이르고,
무감화가 계속 될 때 아무 의욕이 없는 무력화로 발전하며
무력화가 발전하여 신체화 또는 폭력이나 중독이 되는
전위(Displacement)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 복음을 읽으며
고통 절연이 행복 절연에 이르지 않을까 깊이 반성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양승국신부-
<떠남의 향기로움>
사목지를 바꾸실 때마다 후임으로 오시는 분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시는 사목자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후임으로 오시는 분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물건들도 있겠지만 후임자가 또 다시 목돈을 들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세심한 배려리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 오시는 분에게 털끝만큼의 누도 끼치기 않기 위한 그분의 모습은 "칼" 그 자체입니다. 떠나온 임지의 신자들이나 후원자들, 열성팬들이 그리도 집요하게 "딱 얼굴 한번만 보자"고 애원해도 후임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완강히 거절하십니다.
같이 지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으셨는데...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되고 맙니다.
신부님의 그런 차가운 모습, 그 이면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후임자에 대한 배려, 신자들에 대한 크고 극진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이별 앞에 서운하지 않은 사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지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목자는 교회의 주인의 아니라 나그네라는 것. 교회의 주인은 신자들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 사목자는 칼같이 자른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후임자가 새로운 분위기에 잘 적응하도록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칼 같은 사목자의 모습에서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관계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훌훌 떠나시는 예수님의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실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별로"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좀 더 이 사람들 가운데 머물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가르침도 주고 싶으셨겠지요. 그간 아웅다웅 지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는데...아쉬움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체 없이 털고 일어나십니다. 떠날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자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 훌훌 털고 떠나십니다.
인간들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떠나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당신 제자들을 유치원생 취급하지 않기 위해서, 자발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협조자 성령을 보내기 위해서 떠나가십니다.
신앙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은 떠나야 할 순간이 오면 예수님처럼 지체 없이 길을 떠나는 일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는 일, 서글픈 일이지만 결국 떠남으로 인해 삶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떠남으로 인해 사랑이 깊어갑니다. 떠남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우리의 고통을 못 견뎌 하시는 분, 성령>
성령강림이 영원히 지속되는 은총의 장(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그 강렬했던 성령강림이 매순간 되풀이되는 참으로 은혜로운 장소입니다. 매번의 성체성사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기운에 힘입어 활활 불타오릅니다.
지속적으로 성령 안에, 성령의 인도아래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노력가운데 하나가 성체성사의 은총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부단히 성체성사를 내면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가르침은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전체가 향기로운 꽃밭이며 천국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가신 많은 성현들은 임종의 병상 위에서도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를 읊었습니다. 성령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자신의 하루 전체를 감사의 전례로 봉헌합니다. 전례를 통해 감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바쳐 감사를 드립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 성공, 결실, 보람,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 실패, 좌절, 부끄러움, 죄조차도 있는 그대로 다 봉헌하면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이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에 갇힌 바오로 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감금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초세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 서간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만사가 잘 풀릴 때의 기쁨이 아니라 시련과 역경 중의 기쁨이었습니다. 옥에 갇힌 상태에서의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성령께서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함을 통한 기쁨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 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 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음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문자 메시지
- 손우배 신부-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런 대화를 합니다. “문자를 받았는데, 미처 답을
못했어. 미안해.” “어제 너무 바빠서 전화를 못했어, 미안해.” “어, 내가 생일을
잊어버렸네.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 그러나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문자에 답을 보내지 않았다거나,
전화를 안했다거나, 상대방의 생일을 잊은 것이 미안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죄가 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율법서의 규칙을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지켜야 할 법규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규율에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그토록 거룩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늘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엇이 성녀를
죄인으로 생각하게끔 하였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계명을 어겼다는 것보다,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지은 죄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주신
문자에 답하지 않고, 전화를 드리지 않았던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를 믿는 종교입니다.
두려움의 바다에 나를 던져버리기
- 김태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성부께로 가신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슬픔과 고통, 비탄과 근심으로 가득 찹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믿음 하나로 부모도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랐는데, 그분이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자들은 앞으로 어디에 희망을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든든한 지도자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그분과의 작별이 몹시 슬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의 작별이 오히려 이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아무리 이롭다 하더라도 그냥 지금 이대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 새로운 무엇을 얻기 위해 손을 펴기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확실한 것을 더 움켜쥐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도 수련기 때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과 원만하게 살기 위해 싫은 것이 있어도 꾹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든 것을 모두 밖으로 내놓으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야 내게 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어려웠고 실제로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우려하던 일이 생겼습니다. 공동체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시선을 느끼며 전 형제들과 매일 전쟁을 치루듯 살아야 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주님께 몇 번이나 그만두게 해주실 것을 청했지만 주님은 침묵뿐이셨고, 저는 그 어려움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또 함께 사는 형제들까지도 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자신을 내던지는 이, 주님은 그들을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바오로와 실라스처럼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구원하십니다. 오늘도 그분만 믿고 눈 딱 감고 뛰어드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시너지효과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특별하게 화를 내면 우리끼리 “선생님, 어젯밤에 부부싸움 하셨나봐!”라고 농담을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집에서 부모님들을 보며 경험한 것으로부터 터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님이 사이가 좋으시면 우리들에게 잘 해주다가도 사이가 좋지 않고 부부싸움이라도 하고나면 그 화풀이를 우리들에게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그 감정의 변화가 두 사람의 관계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즉,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때는 날아갈 듯이 기뻐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도 좋지만, 잘 안 될 때는 모든 사람에게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학에선 1더하기 1은 정확히 2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1더하기 1은 2보다 항상 크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너지’효과라고 부릅니다. 시너지 효과란 다시 말해, 하루 일 해서 100원 버는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치면 200원이 아니라 250원 300원도 벌게 된다는 뜻입니다.
남녀가 사랑하여 결혼하면 단 둘만이 아니라 자녀를 출산하여 둘보다 커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자체 안에 번식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너지 효과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만 나타납니다. 만약 둘이 서로 미워하는 사이라면 100원 버는 둘이 함께 일해도 마음이 안 맞아 50원도 못 벌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더 증가하는 사랑의 에너지, 이것이 시너지 효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가 사랑하면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이 흘러넘쳐 자녀들을 더 사랑하게 되지만 서로의 사랑이 말라버리면 자녀들에게까지 나누어줄 사랑이 샘솟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부간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결국 자녀들에게 간다고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줄어들지만 자녀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인지,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자녀들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자신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비행 청소년들이 불우한 가정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도 없어 결국 모든 관계가 비뚤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 받고 사랑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부터 온전하게 성립되지 않으면 다른 관계들은 자연적으로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를 이 시너지 효과를 통해 이해하고 싶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지 않으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붙잡지 말라고 하시며 당신은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뒤 10일만에야 성령님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적인 거리 관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다는 뜻은 그 분과의 사랑의 거리가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버지와 떨어져 인간이 되셨지만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 일치되는 사랑의 절정을 이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초에 심지가 없으면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불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은 불처럼 뜨겁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아들과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사랑의 성령님을 보내주실 수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여 그 사랑 안에서 솟아나는 더 큰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님을 받아 먼저 예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그 누구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에너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먼저 노력해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첫 번째 온전한 관계가 되어야하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일일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하느님의 뜻대로 됨이라!
-김찬선신부-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실라는 참으로 극과 극을 오갑니다.
필리비 사람들에게 옷이 찢기고 두들겨 맞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감옥에 갇힙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한 짓만 놓고 보면
이 얼마나 처참하고 쓰라립니까?
화가 나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평상심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찬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사랑의 찬미입니다.
주님을 위해 매를 맞음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의 찬미입니다.
웬만한 불은 물 한 바가지에 꺼지지만
제대로 불붙어 활활 타는 모닥불은
물로 인해 불길이 오히려 더 타오릅니다.
어렸을 때 십리 길을 걸어 매일 새벽미사에 다녔습니다.
추운 겨울
손발은 얼어도 마음이 얼마나 불타오르는지 경험했습니다.
장마 때
물이 부른 굴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지고
옷이 흠뻑 젖어 성당에 들어가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행복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여건은 우리 목적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하게 할 뿐입니다.
가고자 하는 열망이 약하면 약한 만류에도 주저앉지만
열망이 강하면 만류가 강할수록 더 가기 위해 힘을 씁니다.
두 번째는 감사의 찬미입니다.
자신들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에 의해 감옥에 갇혀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따로 있을 것임을 알기에
인간이 나의 계획을 좌절케 해도 하느님의 계획을 봅니다.
그리고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음이
곧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 구원을 지금은 몰라도 미리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종종 나의 뜻대로 무엇이 되지 않을 때
나의 힘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인간이 방해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 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믿고
하느님 뜻대로 될 것을 미리 찬미합니다.
의로움과 심판
-이흥우-
예수님 ‘말씀’을 ‘보물 같은 삶의 지혜’에서 출발해 다시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결국 주려던 보물(말씀)을 제대로 전해 받지 못해 세상 사람들은 벌써 대가를 치르고 심판을 받은 셈이다.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결국 ‘보물’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가 아닐까?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시면 세상이 다시는 그분을 뵙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분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세상은 ‘의로움’에 대해 올바르게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씀(보물)을 접할 기회가 없어졌으니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물 자체이신 분을 더 이상 지상에서 볼 수 없게 만든 악 때문에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셈이다.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차라리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평소 의아해하던 제자들이지만 그나마 뒤에 오시는 성령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참임을 재확인하게 되고 또 죄와 정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도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유익하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지상의 삶,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정의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정의가 아들을 통해 드러나고, 아들은 그분의 정의에 ‘순명(順命)’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때, 평화와 기쁨이 깃들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매일 저녁 7시에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5월 20일(수)에는 명동성당 성모동산에서 시국미사가 있으니 이 역시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양승국신부-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산더미 같은 잡풀들을 제거하다가 참으로 특별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잡풀들 사이에 키가 훤칠하고 아주 실하게 생긴 고사리 한줄기가 숨어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오더군요.
그 뒤로 자연스럽게 잡초제거는 뒷전이고 고사리 찾기에만 혈안이 되더군요. ‘고사리 관광’하러 가시는 분들, 그래서 싹쓸이 해 가시는 분들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고 너무나 반갑고, 대견스러워 탄성을 올리실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이뤄내야만 하는 과제 가운데 첫 번째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보호자이자 협조자,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인해 우리 삶은 엄청난 변화가 이뤄집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안에서 만나는 모든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성령으로 인해 제 가치를 찾습니다. 의미가 부여됩니다. 사랑스런 존재로 변화됩니다.
출렁이는 강물, 강물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햇살, 그 햇살을 받아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들꽃들,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 이 모든 대상들이 성령으로 인해 사랑의 대상으로 변화되고, 나 자신과 한 몸이 되고, 형언할 수 없는 축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것 그저 그런 시시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야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토록 비천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란 존재가 하느님과 하나 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느님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심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은혜로운 변환이 이루어지는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문을 꼭꼭 닫아걸고 다락방에 숨어있었습니다. 한때 그렇게 기고만장들 했었는데, 이제는 기가 팍 죽었습니다. 완전히 찌그러져 구석에 처박혀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수시로 겪었던 불일치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불신과 소극성도 전혀 없습니다. 마치 꺼졌던 엔진이 다시금 힘차게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흘러넘치는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바뀔 것입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절대 왕따가 아니구나,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었구나, 나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나는 받아들여진 존재로구나, 나는 가치 있는 존재로구나, 나는 진정 소중한 존재로구나, 나의 매일 매일은 사실 축복이었구나, 내 인생길을 향기로운 꽃길이었구나, 나는 정녕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그리움을 타고 오는 성령의 사랑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에서 주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보통 우리 인간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
불필요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을 보고
차라리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이 말씀도 같은 맥락일까요?
주님의 말씀을 꼼꼼히 잘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이롭다”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은 매우 슬퍼할 것이고,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있겠지만 유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신이 가셔야지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영어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I miss you!"라는 표현이지요.
당신이 정말 보고 싶고, 그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Miss"라는 말은 무엇을 ‘놓치다’,
‘잃다’의 뜻도 있지요.
저의 추측인데,
무엇을 잃고 나서야 그리워하는
우리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야
부모를 그리워하고
잘 못해 드린 것을 후회하고
살아계실 때 못한 것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합니다.
잔소리 정도로 제쳐 놓던 것을
이제는 가슴에 담고, 뒤늦게 실천합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자식만이 아닙니다.
정말로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육신으로 떨어져 있던 그분이
이제 영혼으로 가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일찍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를 뵌 적도 없지만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습니다.
특히 사춘기 때는 아버지가 그리워
10여리 떨어진 아버지 무덤을 찾아 가곤 하였는데
열심히 사신 아버지로부터 용기를 얻고
아버지처럼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도 하고
전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곤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不在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이고 고통이었지만
不在하는 現存을 저와 우리 가족은 일찍부터 알았고,
不在하는 現存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한지를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한 마디로 일찍 어른이 되었습니다.
存在가 現存하지 않기에 依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存在가 옆에 現存할 때 依存을 하는 것인데
依存할 存在가 없으니 依存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초월적 사랑의 관계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
학비를 대주는 사랑,
김치를 담가주는 사랑,
보여지는 사랑,
만져지는 사랑,
느껴지는 사랑,
이런 사랑 없어도
사랑을 느끼고,
사랑으로 힘차고,
사랑으로 뜨겁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랑인데
성령은 이처럼 그리움을 타고 오는 不在하는 現存인 것입니다.
떠나는 것이 이롭다!
-오상선신부-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하신다.
슬퍼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지금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남의 기약이 있는 이별이고
그 다시 만날 때의 보다 큰 기쁨을 위해
잠시 이별하자고 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이별이 얼마나 쓰라리라 아픈 것인지를 잘 안다.
죽음을 통한 이별이든
살아서 이별이든
이별은 이렇게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언젠가는 이별하게 된다.
한 생을 살고 나면
누구나가 이 세상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되어 있다.
그런 안목에서 바라본다면
이 떠남과 이별은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이미 그 떠남과 이별이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저 세상(천국)에서의 다시 만남의 전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아픈 이별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만나 누리게 될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기에...>
주님의 이 말씀은
내가 집과 어머니를 떠나
수도원에 오게 되었을 때를 생각나게 해 준다.
비신자 가정 출신의 내가 수도원에 간다는 것은
어머니도 형제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형제의 정을 끊자고 매정하게 다그치시던 형님도 있었고
보내긴 해야겠는데 아쉬움에 붙잡고만 싶었던 어머니도 계셨다.
나로서도 이러한 정 때문에
훌훌털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 헤어짐과 이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가족을 떠남은 가족과의 이별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의 약속이라고...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가거라!>
하신 어머니의 애절한 말씀에 순종하여
산소에 들린 후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 일어서면서
쏟아지는 하염없는 눈물은
그 애틋한 정 때문이었으리라.
내 생애 가장 많이 흘려 본 그 눈물은
분명 슬픔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가슴저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나는 것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더 유익하리란 믿음과 확신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아직 20살 밖에 안되었던 나에게 어찌 그런 확신이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렇다!
때론 내가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더 유익해 보이는 자리라 하더라도
때가 훌쩍 떠남이 큰 공백으로 여겨지겠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더 큰 유익을 위해
마련하시는 계획이라고 생각하자.
그분이 떠남도 우리에게 더 큰 유익,
즉 협조자를 보내 주시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떠남도 우리 가족, 우리 형제들에게
때론 더 큰 유익을 위한
잠시의 아픔이라고 생각하자.
오늘 특별히
연인과의 아픈 이별을 해야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남편, 아내와 사별해야하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나야 하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지만
떠나보내야만 하는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실 말씀을 전해주고 싶다: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멘.
성령을 품고 사는 사람
-김동하 신부-
스승께서 떠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떠나가서 제자들을 이롭게 할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분이라 하십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밝혀주신다고 하십니다. 떠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가장 깊은 마음 안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고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려는 것은
깊은 곳에 계신 성령께서 이끄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바라며 온힘을 다해 생각하고 온힘을 다해 지금을
살아갑니다. 설령 지금의 어려움이 아무리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밝혀주시고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힘이란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밝혀주신 뜻으로 살아가는 힘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윤영수 수녀-
가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참으로 경건한 자세로 생활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저는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더욱 좋아지실 것 같은데 그럴 맘은 없으세요?"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지만 거의 공통된 것은 "신앙이 좋다는 건 아는데 충실하게 주님 뜻을 따르기에 부족하고 아직 그럴 자신이 없어서 좀더 살고 난 후에 생각해 보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을 생각만으로 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음으로 셈하지 않으면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간혹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 탓에 믿지 않는 이들이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는 상반된 세상의 그릇된 법칙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고 사는 삶이기에 믿지 않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를 아주 잘 아십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의존성과 눈앞에 보이는 것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무지함을 깨우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대신,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마음 깊숙이 스며드실 수 있는 동반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섬세하게 배려하시며 보내주신 성령께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로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을 귀한 사랑의 삶 안으로 기꺼이 초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윤정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제자들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더니 또 어디를 가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어쩌라구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독여 주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지 못하신다"(7). 예수님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때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스스로)를 가르쳐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합니다.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보여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스승이 된다는 것,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어버이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지만, 요즘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아예 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높이 교육'이 강조되고 학생이 원하는 데로 가르쳐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물론 그 책임까지도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역할도 그렇지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생각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말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들 말이지요. 숨 쉴 공기나 마실 물과 같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예컨대, 건강이나 돈,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 아니면 평생을 투신할 직업, 자신이 믿는 종교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혹은 존경하는 선생님 등등 꼽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님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쇠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사도 16,26). 그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그를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탈옥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세상의 가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사도 16,33).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8)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묻혀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독서> :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와 찬미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
복음을 전하던 바울로는 점귀신이 붙은 어떤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낸다. 여종은 자신의 힘으로는 악령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악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악령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악령이 나가기 전까지 여종은 얼마나 악령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이제 악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여종이 악령에 사로잡혀 점을 쳐줌으로써 돈을 벌었던 주인은 바울로가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로와 실라를 박해하고 고발한다.
오늘날에도 여종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며, 그들을 통하여 돈을 벌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포주가 아닌가? 그처럼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0-12) 하고 말씀하시며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불행이 닥쳐올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시련과 고통은 악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행복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다.
바울로와 실라는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다. 밤, 밤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이요, 특히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시편 119,62 참조).
바울로와 실라는 자신들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박해 중에 더욱더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도와 찬미, 찬양을 들으시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울로와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감옥 안이나 밖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자 간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가 그를 찾아와 격려하자 틀림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14,11.15 참조). 그래서 간수는 자신이 신들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바울로와 실라는 그에게 중요한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바울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끌어주시고, 기도와 찬미,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양승국신부-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제목이 있었지요. 무엇이든 한번 잡으면 끝까지 꽉 잡고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나 대중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쇠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바입니다. 아직 잘 나갈 때, 그나마 인기가 남아있을 때, 사람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퇴물’이란 소리 듣기 전에 스스로 내려오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언젠가 유럽 한 본당에 사목을 도와주러 갔었는데, 그쪽 교구 인사 시스템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본당에 발령을 받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은퇴할 때 까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좋은 측면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큰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간의 문제가 없으면 괜찮겠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목자, 혹은 신자들과 한 평생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 꽤 피곤한 일 같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정기적인 사제 인사 방식은 꽤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좌 신부님들은 1-2년, 주임 신부님들은 4-5년 만에 한번 씩 순환되니, 사목의 일관성, 지속성 면에서는 취약점이 생기겠지만, 다양성, 변화나 쇄신 측면에서는 아주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동 때 마다 하게 되는 제 작은 체험입니다. 떠날 때 마다 남게 되는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인사이동이 발표되고 나서도 걱정이 큽니다. 내가 떠나면 저 불쌍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내가 떠나고 나면 저 아이들이 입게 될 상처가 만만치 않을 텐데, 내가 떠나고 나면 기껏 안정시켜놓은 이 시스템은 어떻게 되나? 누가 후임자로 올 것인가? 그가 나보다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단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지나가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 발전했으면 발전했지 특별히 잘 안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몇일 보고 싶어 하겠지만,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 잘 잊어먹는다는 것이 또 아이들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들어 저는 ‘인사이동’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한 3년 지나면, 즉시 직면하는 어려움이 강론 밑천이 바닥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은 소리 반복합니다. 또 모든 주변 상황에 익숙하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변화나 쇄신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작년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쇄신이나 발전,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좋은 처방약은 인사이동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나게 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요.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될 때 그 사람과 함께 새로운 바람이 유입됩니다. 공동체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바람이신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생활에 대한 아쉬움으로 제때 떠나지 않으셨다면, 그간의 인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자꾸 공생활을 연기하셨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속 사업은 그만큼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성령의 도래,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에 들어있던 기본 골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부모님들께서 두 분 다 멀리 여행을 떠나실 때, 걱정들이 대단하지요. 그러나 결과를 두고 보면 서로를 위해 훨씬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개구쟁이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정작 부모님 부재 시에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잘 해야 되. 부모님 안 계시는 동안 우리끼리 똘똘 뭉쳐 잘 한번 해보자. 그분들 걱정 안하시게 열심히 하자!’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척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챙겨주실 때는 딴 짓 하고 정신 못 차리고 그랬었는데,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나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의 육적인 눈이 서서히 정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고 나신 후에야 그분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제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협조자 성령을 보내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했던 믿음이 완전해졌습니다. 희미했던 예수님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 제자들은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령께서 오시도록 다시금 길 떠나길 바랍니다. 협조자께서 오시도록 우리 자리를 내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떠남으로 오시는 성령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의 역점은 예수께서 떠나야 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즉, 떠남이 없이는 성령의 오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업무(業務)를 밝히신다. 아울러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머물러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신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사실 모두에게 중요하다. 예수께서 ’가신다’는 암시는 공생활 중에도 여러 번 하신 바 있다. 초막절을 맞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경하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내가 아직 얼마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7,33)고 가르치셨다. 또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고 난 뒤 "나는 간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찾을 것이며, 내가 가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 없다"(8,21)고 하셨다. 이 두 경우는 예수께서 곧 가시게 됨으로써 세상에 남아 있는 시간의 절박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로서 예수께서 아직 머무는 동안 세상의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사(13-17장)에서도 ’나는 간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최후의 만찬을 마련하셔서 고별사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예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하셨다. 공생활 중에 언급한 말씀들이(7,33; 8,21)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목전에 다가와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데(16,5), 사실은 제자들이 두 번이나 질문을 했었다.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의 새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13,36) 라고 질문을 했으며,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셨을 때 토마스도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일까?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의 2차 고별사(15-17장)를 추가로 편집할 때 앞서간 1차 고별사(13-14장)의 내용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결국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가시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주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가심’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심’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동시에 유익한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조건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이다.(8절) 성령은 바로 이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협조자’이시다. 예수께서 오시는 성령을 협조자로 계시하심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협조자로서의 성령계시는 오시게 될 성령이 제자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단순히 제거해 주실 것임을 알아들으라는 학습(學習)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하여 기쁨과 신뢰심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실제(實際)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는 곧 현장감(現場感)을 의미한다. 따라서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실제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이고,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서 세상의 죄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선언하실 것이며(9절), 예수께 대한 불신(不信)을 유죄(有罪)로 판결하실 것이고(10절), 세상의 권력자, 즉 예수님을 팔아 넘긴 자와 죽인 자들을 오히려 죄인으로 판결하심으로써(11절), 예수님의 부당한 재판을 다시 세워 그분의 의로움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렇다고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처럼 이런 업무들을 수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업무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수행된다. 제자들과 교회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한 검증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풀밭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시계는 보이지 않고 풀만 보이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찾아보니 풀은 보이지 않고 시계만 보이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호자가 오시면'
-유광수 신부-
보호자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와 정의와 심판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죄와 정의와 심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인지를 알려면 보호자(성령)가 오셔야 알 수 있다.
보호자가 오시면 우리가 그 동안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죄로 드러날 것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어떤 것이 정의인지 그리고 심판이 올바른 것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그리고 올바른 판단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오셔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보호자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복음을 통해서오신다. "보호자가 오시면"이라는 말은 나의 삶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무엇이 죄이고 정의이었는지를 심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묵상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짓고 있어도 죄를 지은 것인지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그런 잘못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볼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도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자기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같은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 고백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인들은 매일 매일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했던 "막가파"사건이 떠 올랐다. 막가파들을 취조하던 한 형사의 고백을 일간지 칼럼에서 읽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한 형사가 그들을 취조하던 중 설렁탕 집에 데리고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젊은 이가 설렁탕을 먹다가 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던 젊은 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서도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다. 형사님이 사주는 설렁탕이 자기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 것을 받아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그래도 자기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이 고마워서 운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몇 년전 그토록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던 젊은 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는 형사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고마움에 설렁탕 앞에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폭악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눈물을 흘렀다면 그 젊은이는 얼마나 순수하고 나약한 존재이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누군가가 사주었을 때 그 고마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나는 우리 사랑에 메말라 있는 이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의 사랑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를 살인마로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이고 그 책임은 그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우리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43)라는 말씀을 묵상하였다면, 사랑에 굶주려있는 이들을 그렇게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고 말씀했던 대로 우리 자신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빍혀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요,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그토록 사랑을 외쳐대면서 과연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무슨 사랑을 베풀었고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증거하였단 말인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이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판단하고 의롭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심판한 것이 있는가? 정말 복음의 빛으로 나의 삶을 되돌아 본적이 있는가?
나는 소그룹 복음 묵상을 몇 그룹 지도하고 있다. 매주 복음 묵상을 나눌 때마다 울음바다가 된다. 복음을 북상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와 심판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어느 자매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을 고백하였다. 정신적으로 약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4살 되었을 때 너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손으로 떼리고 그것도 안되어 빗자루가 다 망가지도록 떼렸다는 것이다. 그 때 심정같아서는 아들을 죽이도록 미워했고 죽여서도 자기 속이 풀리지 않을만큼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엄마 엄마하고 울고있었는데도 그냥 떼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어느 날 피정을 갔었는데 옆 사람을 꼭 안아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을 안아주면서 아들 생각이 나서 한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즉시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꼭 안아주면서 얼마나 귀한 아들이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아들은 하느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울었고 묵상 나누기하던 자매들은 그 자매의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울었다. 어쩌면 자기들의 잘못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죄를 보게 되기 때문이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 4, 12-1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속 마음을 보게 해주신다.
우리는 말씀에 빛을 받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죄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을 보게 된다.
우리가 게으름, 이기주의, 무관심, 불성실함, 미움, 판단, 탐욕 등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와 정의와 심판을 말씀해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다.
자기가 잘못된 생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