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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2. 일본 본토 공습(Air raids on Japan, 1942년∼1945년 8월)
기체 및 파일럿의 피해가 급증할 것이 명백했으나 맥나마라는 손실이 크지 않다는 분석결과를 냈고, 어쨌든 르메이는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인데다 독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당장 B-29로 뭐라도 해야 면피가 가능한 육군 항공대의 절박한 사정 때문에 르메이의 의견이 먹힐 수 있었다. 르메이도 무작정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양반은 아니어서, 일본군 야간 방공전 능력은 형편없고 그나마 있는 방공무기도 고공으로 조준하고 있으니 저공 목표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할 것이다는 이유를 들며 첫 대공습을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것도 폭격만 극대화 하려고 극단적으로 방어기총수도 내리고 기총도 떼버리고 단 1kg이라도 더 폭탄을 싣는 극한의 폭탄투하를 준비한다.
1945년 기준으로 야간방공전 능력이 가장 탁월한 나라는 독일의 야간 공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시작한 영국이었다. 1944년 1∼4월에 걸친 독일의 야간 공습(일명 베이비블리츠)에서 독일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하였고 이중 320대 이상을 손실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은 비전투 손실을 포함하여 29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나 전투 손실은 1대 파괴, 5대 손상에 그쳤다. 독일의 경우 이쯤 되면 슬슬 전력이 거덜 날 시점이라.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팜탄을 도쿄 시가지(스미다강 양안)에 뿌려댔다.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싸그리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도쿄의 건물 중 25%에 달하는 수치였다.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4월 초 및 5월 중순, 8월 초에도 수십여 기의 B-29로부터 집중폭격을 받았다.
도쿄 대공습이 일본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확인할 길이 없었던 미군도 도쿄 대공습의 성과에 크게 환호했는데 격추 14기에 손상 42기라는 생각보다 경미한 피해에다가, 항공정찰 사진 판독 결과 말 그대로 도쿄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원찮은 공습과 달리 이제서야 제대로 된 피해를 주었다고 미군은 인식한 것이다.
작전이 성공한데다, 당시 결정적 한방을 갈구하던 미국의 여론이 잿더미가 된 도쿄의 사진을 보고는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며 열광한 덕에 여론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르메이는 일본 측이 정신 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재빨리 타격할 계획을 세운다.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나고야 공습은 폭격을 가한 범위가 도쿄보다 광범위한 덕에 피해는 적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고 실제로는 5.3km²에 해당하는 도시 면적이 소각되었고 더군다나 폭격기 피해가 전무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3월의 전략폭격은 다음과 같다.
3월 9일∼10일 도쿄 : 279기 투입. 사망자 8∼10만.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km² 전소.
3월 11일 나고야 : 310기 투입. 도시면적 5.3 km² 전소.
3월 13일∼14일 오사카 : 274기 투입. 도시면적 21 km² 전소. 사망자 4000여 명, 행방불명자 500여명
3월 16일∼17일 고베 : 331기 투입. 도시면적 18 km² 전소.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3월 18∼19일 나고야 2차: 도시면적 7.6 km² 전소.
1945년 3월 9일 있었던 대공습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폭격이라 가장 유명하지만,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3월 11일 나고야, 13일 오사카, 16일 고베, 19일에는 다시 나고야가 르메이의 3월 1차 공습의 표적이 되어 총 82km² 면적이 지도 위에서 재로 사라졌다. 이로써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단 열흘 만에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중에서 3월 13일∼14일에 이뤄진 오사카 공습이 절정이었다.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상공업 거점이었던 오사카를 미군이 놔둘 리 없었고, 폭격기 274대로 소이탄 1,700여 톤을 퍼부어 오사카 항구를 포함해 약 20km²의 시가지를 파괴했다.
이 당시 오사카 성도 완파당했다. 다만 오사카 성은 이미 19세기에 벼락으로 천수각이 완파되어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는 당시에도 높지 않았다. 당시 오사카의 가옥 13만 여 채가 완파되었지만 도쿄에 비해 대체로 소방 방재가 잘 이루어졌고 오사카 시민들도 도쿄 대공습의 소문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사망자 4천여 명, 행방불명자 5백여 명으로 도쿄에 비해선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때 폭탄이 오사카의 육군 병기창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 2,000m 상공을 비행하던 폭격기를 고도 3,600m까지 날려 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해당 폭격기는 실속 상태에 빠져 하강했으나 조종사가 상황을 수습해 600m 고도에서 정상 비행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오사카는 종전 전까지 7차례의 대폭격을 더 당한 끝에 도시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현재 오사카 성 남쪽 경내에 있는 오사카 국제평화센터(피스오사카)에 가면 당시 사료들과 재현 모형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도시에 폭격을 퍼부은 까닭은 일본이 B-29의 저공비행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공업시설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카지마 항공기, 무사시노 제작소, 미쓰비시 제작소등 당시 일본 항공기 제작소, 부품공장들은 이렇게 대도시 주변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집중 타겟이 되었고 어찌나 폭격을 퍼부어 댔는지, 약 1주일 후인 3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나고야를 폭격한 뒤에는 잠시 폭격을 멈춰야 했다. 장병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던 소이탄 물량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도쿄 대공습 이전 정밀 폭격 작전에 쓰인 폭탄의 비율은 대략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다. 이런 폭장 비율과 폭격 소티(sortie) 수를 따져 보면 당시 르메이가 보유하고 있던 소이탄은 약 2달 동안 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르메이는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소이탄의 불길 확산을 위한 기름폭탄이라는 비범한 작전을 실시했다. 도쿄대공습 이후 10일 동안 르메이는 무려 150만발에 해당하는 소이탄 1만 톤을 퍼부어 일본의 주요 대도시를 휩쓸었다. 르메이가 “소이탄을 더 보급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 많은 양을 다 썼을 리가 없다”며 비웃었던 해군도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소이탄을 실어 날라다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4월에는 잠시 주춤했지만 공습은 계속 이어졌다.
1945년 4월 1일, 도쿄의 나카지마 항공기 엔진 공장이 B-29의 폭격을 맞았고 4월 3일, 시즈오카와 간토에 위치한 엔진 공장이 공습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야간 작전이어서 명중률이 떨어졌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4월 4일, 소규모의 B-29들이 도쿄와 가와사키를 폭격했다.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4월 7일에 있었던 작전이었는데 이오지마에서 본격적으로 배치된 P-51 머스탱들이 호위기로 동참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달려들던 일본기들은 101대나 격추되어버렸다. 이때는 요격기들을 머스탱이 상대할 수 있었으므로, 아예 당당하게 주간에도 출격해 백주대낮에 고폭탄을 주요 군수시설에 쏟아 붓는 식으로 폭격을 가했다.
4월 12일,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그 과정에서 185기의 일본기들이 격추되었다.
4월 13일, 도쿄에 또 다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무기 공장을 비롯한 3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4월 15일, 수도권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도쿄 면적 16km², 가와사키 면적 3.9km², 요코하마 면적 3.9km²가 파괴되었다. 4월 24일에는 도쿄 인근의 타치카와 엔진 공장이 박살났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방 된 5월 이후부터 공습은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5월 5일, 구레 인근의 히로 해군 항공기 공장이 파괴되었고 10일에는 이와쿠니, 오시마, 도야마의 연료 저장고가 파괴되었다. 13일에는 나고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되었고 나고야 면적의 8.2km²가 파괴되었다. 16일에 재공습이 가해졌고 나고야 면적의 9.9km²가 파괴되었다. 두 번의 공습으로 나고야 시민 3866명이 사망하고 47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되었다. 5월 19일에는 타치카와 항공기 공장을 대규모로 폭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5월 23일과 25일에 걸쳐서 도쿄에 두 번의 대규모 폭격이 이어졌고 총 58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 공습을 기점으로 황궁을 비롯한 일본
정부 기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은 히로히토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추가적인 폭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도쿄의 절반이 넘는 면적(50.8%)이 파괴되어 더 때려 부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폭격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5월 29일, 요코하마에 대규모 폭격이 이어져 18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사망했다.
당시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과 민정문관 및 일본제국 경찰과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를 포함해 약 1만 명이 소방차 40대를 동원하여 주택가가 활활 타는 약 4시간 동안 불을 끄기 위한 작업을 벌였으나, 세이덴(正殿)을 포함해 27동이 홀라당 다 탔다. 천황가 삼종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참화를 면했다. 쇼와 덴노는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고, 전쟁 끝날 때까지 계속 거기서 살아야 했다.
6월 1일, 오사카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3,960명이 사망하고 8.2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5일에는 고베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11.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7일, 오사카에 재공습이 가해져 5.7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5일에는 4.9km²가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마가사키 까지 폭격을 맞아 1.5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6월까지의 공습 기간 동안 총 12만 명 이상의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들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27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연합군이 파괴한 독일 면적보다 높은 수치였다.(200km²) 미국의 손실은 B-29 136대 손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때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 중순, 사이판에서 헨리 아놀드와 만난 르메이는 협의 끝에 대도시는 그만. 이제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6월 9일, 나라오와 아츠다의 항공기 공장들이 B-29의 공습으로 대파되었다. 아카시의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에도 공습이 가해졌지만 인근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에는 도쿄만의 6개의 공업 지대가 파괴되었다. 17일에 시즈오카의 하마마츠 그리고 가고시마, 오무타, 요카이치 지역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이 가해졌다. 15.7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고 시즈오카는 잿더미가 되었다. 19일에는 후쿠오카, 시즈오카, 도요하시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6월 22일, 대규모의 B-29들이 서일본의 구레, 카카미가하라, 히메지, 미즈시마, 아카시를 폭격했다.
타겟이 된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4일에는 오사카와 나고야 인근의 공업지대에 폭격이 가해져 4개가 대파를 입었고 26일에는 혼슈와 시코쿠의 공업지대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지만 구름으로 인해 명중률이 떨어져 피해는 적었다. 28일, 모지와 노베오카 그리고 오카야마와 사세보시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7월 1일, 구마모토와 구레, 시모노세키와 우베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3일에는 히메지, 고치, 타카마츠, 도쿠시마 지역이 폭격을 맞았고 6일과 9일에는 아카시, 지바, 고후, 시미즈 기후, 사카이, 센다이, 와카야마가 소이탄 공습으로 초토화 되었다.
7월 10일에는 도합 2천 대에 이르는 폭격기가 동원된, 개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합동폭격이 결행되었다. B-29 500대 이상이 오사카 근교 와카야마현과 사카이현, 나고야시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센다이를 차례로 폭격했다. 함재기 1천여 대는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으며, 300대는 큐슈의 비행장을,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
12일에는 이치노미야와 츠루가, 우츠노미야에 공습이 가해졌고 16일에는 히라츠카, 쿠와나, 나마즈, 오이타가 폭격을 맞았다. 19일에는 초시, 후쿠이, 히타치, 오카자키에 공습이 가해졌다. 26일에는 마츠야마, 오무타, 도쿠야마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도쿄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 간 미국은 9만 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도시 26개, 총면적 330km²를 초토화했다. 건물 250만 동이 소실되었으며, 산업생산량은 1944년에 비해 약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석탄생산량은 절반, 정유량은 15%, 항공기 엔진은 25%, 총포, 화약은 45%, 알루미늄은 9%로 생산량이 떨어졌다.
그 동안 약 5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반딧불이의 묘처럼 옥외생활 및 식량부족 때문에 죽은 사람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대 사망자가 100만 명대로 추산되기도 한다.
일본이 항복을 안하자 8월 1일, B-29 836대가 동원되면서 2차 대전 중 가장 많은 항공기가 동원된 공습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단순히 폭격기의 숫자만 따지만 밀레니엄 작전 당시 영국이 실시한 쾰른 폭격에 투입된 폭격기가 868대로 더 많기는 하지만 이들 중 4발 중폭격기의 비중이 높지 않고 빅커스 웰링턴 같은 물건까지 포함된 수치라 B-29로 836대를 동원한 것에 비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밀린다고 봐야한다.
다수의 폭탄과 기뢰가 부설되었고 하치오지, 미토, 나가오카, 토야마가 초토화되었고 특히 토야마는 99.5%의 건물이 파괴되는 수준의 문자 그대로 지도상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8월 5일, 이마바리, 마에바시, 니시노미야, 사가에 공습이 가해졌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인 8월 14일에는, 아키타시에 B-29 134기가 동원되어 전쟁 마지막 대단위 공습을 가했다. 아키타의 소규모 유전과 정유시설을 목표로 한 공습이었고 유전, 정유시설, 항만이 완전 파괴되었고 이에 인접한 시가지가 모조리 전소되었으며 250명 이상이 폭격과 이로 인하 화재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도 몇몇 도시들은 이상할 정도로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교토, 니가타, 고쿠라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일본 제4의 도시였던 교토와 군수공업 중심지였던 히로시마가 멀쩡했던 까닭을 많은 사람들이 무척 궁금해 했다.
일본인들 뿐 아니라 미군의 커티스 르메이 역시 교토를 포함한 이 도시들을 폭격하지 않는 까닭을 따지고 들었다.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여간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행운(?)의 도시들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야 그 숨은 까닭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 직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돌린 다음 그동안의 전과를 분석하며 추가 작전을 준비했다.
4월 동안에는 미군이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일본의 항만도시에 만 2천여 개의 기뢰도 부설하였다. 그 결과 종전 직전까지 기뢰에 의해서만 백만톤이 넘어가는 일본의 수송선단이 침몰 당했고, 기뢰를 피하려다 잠수함에 당해버린 배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일본의 원자재 수입량은 80% 이상 감소하였다. 이는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군수 산업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 버린 조치였다.
언급된 도시만 봐도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모조리 공격받았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와 일본령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섬 남부) 정도였다. 대신 홋카이도는 아래 따로 서술할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폭격과 전함부대의 포격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부산이나 제주, 원산, 함흥 등에 소규모의 폭격을 받았다. 가라후토의 경우 경제적 가치가 전무했고 미군 기지로부터 거리가 매우 멀어 폭격을 받지 않았기에 이 소문을 들은 적잖은 일본인들이 가라후토로 피신했는데 몇 개월 후 B-29 폭격기 못지않게 무서운 손님이 찾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