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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무모한 투자: 맹독을 마신 아들이 부활의 항체가 되기까지
2026년 가해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12,1-12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웅장하고도 뼈아픈 비유, 바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소출을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머리를 깨고, 심지어 죽여버립니다.
보통의 지혜로운 주인이라면 이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작인들을 진압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세상의 경제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무모하고 미친 결정을 내립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마르 12,6 참조).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그 살인마들이 득실거리는 죽음의 포도원으로 홀로 밀어 넣습니다. 소작인들은 쾌재를 부르며 그 상속자를 포도원 밖으로 던져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들이 죽을 것을 정말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들을 그 참혹한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하느님의 실패나 인간의 폭력이 만들어낸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낡고 병든 세상을 심판하고, 죽음을 이겨내는 새로운 생명의 세대, 즉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한 하느님의 가장 치밀하고도 완벽한 생명 공학적 설계도였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현대 의학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한 가지 위대한 과학적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혈청(Antivenom)', 즉 해독제와 항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막이나 정글에서 사람이 치명적인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청을 주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생명의 혈청을 어떻게 만들어낼까요? 놀랍게도 그 시작은 '건강하고 피가 맑은 말(Horse)'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서 출발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장 튼튼하고 훌륭한 말을 한 마리 고릅니다. 그리고 뱀에서 추출한 치명적인 맹독을 그 말의 혈관 속으로 직접 주사합니다. 독이 퍼지기 시작하면 말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생사를 오가는 진통을 겪습니다. 혈관이 타들어가고 근육이 찢어지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듭니다.
하지만 그 튼튼한 말의 몸속에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끔찍한 죽음의 독과 싸우기 위해, 말의 면역 체계가 자신의 피를 쥐어짜 내어 그 독을 완벽하게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항체'를 생성해내는 것입니다. 말이 죽음의 고통을 뚫고 마침내 독을 이겨내고 살아나면, 과학자들은 그 말의 피를 뽑아냅니다. 그 피 속에는 어떤 맹독도 박살 낼 수 있는 무적의 항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피를 정제하여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투여하면, 죽어가던 사람은 기적처럼 생명을 얻고 다시 살아납니다. (출처: 데이비드 워먼, 『백신의 역사와 인류』)
이 거룩하고 처절한 의학의 법칙이 바로 오늘 복음에 담긴 십자가 구원의 완벽한 실체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포도원, 즉 이 세상은 왜 어느새 소작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맹독으로 가득 차 버렸을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최초의 소작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원(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 하나만을 하느님의 몫으로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악과를 바치는 행위는, "이 포도원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겸손한 자기 죽음의 봉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뱀(자아)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아를 선택하고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유권을 훔쳐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한 그 타락의 순간부터 인류의 혈관 속에는 '내 것을 움켜쥐어야 산다'는 지독한 이기심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습니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를 박살 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대의 법칙이 증명되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버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며 죽어갈 때, 비로소 더 거대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복이 주어진다"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 진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는 자기 목숨을 끊어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아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도망치지 않고, 이기심을 꺾으며 기꺼이 아들을 봉헌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가 기꺼이 자아를 죽이고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느님은 그 희생의 죽음을 버텨낸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창세 22,17-18 참조)라며 더 큰 우주적인 축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버텨냈을 때 더 거대한 부활의 복이 온다는 것을 구약의 설계도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설계도를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맹독이 들끓는 포도원으로 직접 투입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밖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온 인류가 뿜어내는 배신과 증오, 살인과 교만이라는 끔찍한 독을 당신의 거룩한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셨습니다.
아드님은 십자가 위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산고를 겪으며 생사를 오가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이 죽었다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이라는 사흘간의 사투 끝에 그 사망의 맹독을 완전히 박살 내시고 부활이라는 가장 찬란한 '생명의 항체'를 생성해내셨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나도 살고 온 인류도 산다는 우주의 진리를 당신의 십자가로 완벽하게 입증해 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혈관에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피가 흐릅니다. 주님은 당신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피(항체)를 성체성사라는 주사기에 담아, 오늘 죄의 독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우리들의 영혼 속으로 직접 수혈해 주십니다. 아드님의 육신은 으스러졌지만, 그 으스러짐을 통해 우주 최강의 부활 항체가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 자신을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부르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이 내다 버린 그 핏덩어리 돌을 가져다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하느님 나라(교회)를 지탱하는 무적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짓눌림을 기꺼이 감당하셨기에, 그분 덕분에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성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훔치려던 탐욕스러운 소작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항체를 수혈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게 된 새로운 시대의 백성이자, 거룩한 하느님 성전의 일부입니다.
과거의 소작인들은 철저히 내 배만 불리려는 이기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시는 여러분은 이제 달라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부활로 새로운 치료제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진짜 축복은 편안함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의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 한복판에서,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죽어지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버텨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살리는 무적의 항체이자 흔들리지 않는 평화의 머릿돌로 완성될 것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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