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설 / 시와 삶의 합일 ' 권석창(시인)
이무식시인의 시는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을 지라도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해설의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시가 너무 쉽기 때문에 그의 시가 갖는 문학적 의미가 과소평가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에서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정형시이고 전통시에 속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말에 발생하여 조선후기까지 우리민족의 정서를 면면히 담아 오다가 개화기를 맞으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 후 육당에 의해 현대 시조로 부흥되어 민족시로서의 전통을 잇고 있다. 각 민족은 그들만의 독특한 정형시를 가지고 있다. 유럽의 소넷(Sonnet), 일본의 화가 和歌등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조는 우리에게 소중한 문학의 갈래다.
시조는 우리의 사상과 정서를 담기에 가장 좋은 그릇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현대 사회로 사회의 모습이 바뀜에 따라 우리의 시조도 고시조에서 현대시조로 그모습이 바뀌게 되었다.
시에서의 형식은 내용과 유기적 관게에 있기 때문이다. 즉, 노래로 가창되었던 고시조가 음악적인 특성이 강했던 반면, 현대 시조는 3장6구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이미지,상징,등의 표현 기교나 내용은 현대시와 다를 바 없다.
대체로 오늘의 현대시조는 형태면에서 자유시에 근접해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파괴는 정형시로서의 시조의 독자성을 손상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시조의 형식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있다. 시조의 율격적 특성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3.5.4.3)의 휘감기는 멋이다. 그의 시에는 종장의 감기는 멋이 뛰어나다.
누님의/ 창백한 기침 /흐트러진 /이 선혈(소백산운)
가뭇한/중생의 업을/ 내가 지고 /있거늘(성혈사)
한 하늘/가득한 소망/출렁이게/하소서(새해 아침에)
아직도/살았노라고/ 꿈을 줍는 이방인(옛이야기.1)
빈 가슴/내 모른다며/ 추적이는 /외로움(가을비)
견디다/견디다 못해/ 울먹이는 여인아(찔레꽃)
임의로 뽑아 본 몇 편의 시조에 나타난 종장들이다. 초장 중장에서 도도히 전개되던 흐름이 종장에 와서 소용돌이치면서 휘감기며 여운을 남긴다.
‘견디다/견디다 못해/ 울먹이는 여인아’에서 보는 바와 같이 3.5.4.3이 지니는 리듬과 시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시적 의미와 멋을 아울러 창출하고 있다.
시조가 지니는 또 하나의 형식적 특성은 4음보이다. 4음보는 3음보와는 다른 정서를 표출한다. 3음보는 가볍고 즐거운 느낌을 나타내지만 4음보는 안정되고 장중한 느낌을 나타낸다. 이무식이 4음보의 율격으로 된 시조를 선택하게된 것은 그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4음보는 유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이무식 시인은 퇴계 (退溪)의 후손으로 그의 몸에는 삼엄한 양반정신이 잔재해 있다.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월남전에 참전하고 공무원생활을 해 오는 동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일러 ‘법 없어도 살 사람’ 혹은 ‘자다가 만져봐도 양반’ 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시조라는 유교적 이념과 결부된 갈래(genre) 를 택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시가 쉬운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려운 비유나 상징 등의 못미더운 바가 있는 기교는 부리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서 충분히 소화되고 여과된 정서와 생각을 진솔하게 쓸 따름이다. 그러한 시 정신은 그의 시작활동을 통해서 나타난다. 석자 이름을 내기 위해 부심하지 않고 초연하게 생활하고 묵묵히 쓴 결과 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대산재단의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아 이 작품집을 상재하게 된 것이다.
백발처럼 이고 선/잔설이 녹고 나면
소백산 봄은 벌써/북녘으로 물러가고
화들짝/철쭉꽃들이/놀란 잠을 깹디다
헤어짐이 슬픔인 줄/제가 어찌 알까만은
산사의 초록 그늘/졸움 겨운 석탑들도
고개를 /떨구고 서서/아쉬움을 달랩디다
계절은 가면 다시/올 줄도 알지만은
다시 올 수 없는 길을/걷고 있는 이 나그넨
돌보다/무거운 뜻을/세월 속에 새깁니다.
<봄은 가고>전문
눈이오고 녹고,꽃잎이 피고 지고, 다시 초록이 물드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유한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깊이 성찰한 수작이다. 한자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탄탄한 골격을 갖춘, 시조가 지닌 안정된 정서와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이 시를 눈여겨 대하면 시적 대상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어짐을 발견 할 수 있다. 긍정적인 대상은 주로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이다. 부정적인 대상은 주로 세태나 사회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철학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자연보다 완벽한 논리를 지닌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고장을 사랑하고 고장의 풍물을 사랑한다.
소백산 철쭉꽃을/다 피우고 남았는가
골골마다 모인 물이/죽계천을 이뤄놓고
아홉번 휘돌 적마다/절경을 빚고 있다
초암사 목탁소리/숨어버린 적막한 골
물과 어찌 바위 뿐이랴/하늘 또한 낮게 앉아
동양화 /한 폭 그림을/내가 마쳐 놓는다
<죽계구곡.1>전문
시인이 살고 있는 고장의 명소인 죽계수의 경치를 노래한 아름다운 시이지만 이 시는 단순히 경치를 완상하는 시가 아니다. 종장 '동양화/한 폭 그림을/ 내가 마쳐 놓는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연 속에서 시적 자아를 합일 시킴으로서 비로소 온전한 자연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자연 사랑에 대한 종착역은 인간과 하나됨이다. 이러한 그의 자연에 대힌 신뢰는 <빠빠라기>연작 에서도볼 수 있다.
빠빠라기’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사모아 제도의 추장이 문명세계를 돌아 본 견문록 형식의 작품인데 이무식시인은 이를 페러디하여 때 묻지 않은 추장의 시각에서 바라 본 문명세계의 반자연적 삶을 시조의 형식으로 풍자하였다. 그는 그렇게 자연인이고 싶은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요전들을 감싸 매고
제멋에 산다는데
그 누가 말릴건가
자연이
자연인줄을
잊은 채 사는 세상
시는 고민하는 자의 산물이며 세계인식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하면 사물을 바르게 인식할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등의 현실적 이득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잠 못들고, 밤새 끙긍거리는 자가 시인이다. 철학자나 과학자는 귀납법, 연역법등의 추론의 방법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려하지만 시인은 상상력의 세계를 통해 도달하려한다. 가령 낙엽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서 인생 무상을 발견한다든지 강물을 통해서 역사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이 상상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인 것이다. 시인을 예언자로 보던 시대가 있었다.
이는 시인이 남다른 상상력으로 미래를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역설(逆說.paradox)이다. 비겨지는 두 대상 사이의 거리가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역설이기 때문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꽃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빈 곳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등이 널리 알려진 역설인 것이다. 역설은 말도 되지않는 말인 것 처럼 여겨지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흔히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귀한 말씀들 가운데는 역설이 많다.
이무식의 <역설>연작은 시행(line)에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 전체의 의미 구조가 역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편들은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그의 '부정적 대상' 에 속하는 것들이다. 임의로 선정한 몇 편의 시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물안 개구리를 속 좁다고 비웃지만, 개구리에게는 그것이 세계다.<역설.1>
풍선은 불어야 부풀지만 계속 불면 터진다..<역설.2>
위로 치솟는 분수는 보기 좋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역설.3>
과도는 과일을 깎을 때는 선이지만, 도둑의 손에 들어가면 악이다.<역설.4>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세상살이가 고독하다고 한다.<역설.5>
시간은 영원한데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한다..<역설.8>
금고를 두껍게 하는 것은 도둑을 막기 위함인데 결국 자기가 갇히고 만다.<역설.22>
가난한 시절엔 꿈이 있었지만 , 지금은 꿈이 없다..<역설.25>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설> 연작들은 대상을 역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역설 시편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갓들이 대부분이다. 왜 그는 부정적인 대상들에 대해 역설적 접근을 시도한 것일까? 우리들은 대게 사물을 대할 떄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참이라고 단정하기가 쉽다. 역설은 사물의 양면을 살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변증법적 사유의 방법이다.
중년의 세월을 넘어 첫시집을 상재하는 그를 과작(寡作) 의 시인이라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함부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참을 찾아 바르게 살기의 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생활이요, 생활이 또한 시이다. 삶과 시가 분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다.
그의 시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중심축은 '정직함' 이다. 청년 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시작을 해왔기에 많은 수효의 창작을 했을테지만 그에게는 그리 많은 수의 작품이 있지 않다. 스스로의 작가적 양심에 견주어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정직함이 바탕에 껄려있다. 그의 삶 또한 그러하다.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청빈하게 살아온 그의 모습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직함이 문학의 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사람과 문학이 일치할 때 우리는 그의 작품을 신뢰할 수 있으며 감동 또한 크다. 대개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문학과 삶의 일치를 지향한다. 그 가운데 이무식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다. 이제, 그는 당당히 문단의 공인을 받고 이 시집을 낸다. 바라건데 이후 그는 조금은 덜 견손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에게 내재된 작가적 역량이 작품화되어 우리가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