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주님,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창원 가서 짧은 시간 간증할 때
저희 부부의 입술에 주님 예비하신 말씀을 넣어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 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본문 주해)
오늘 본문은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과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쓴 비탄시이다.
자신의 친아들과 절친으로부터 배반당한 다윗의 쓰라린 심정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부르짖는 탄식이다.
1~11절 : 자기의 곤핍한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함
2절의 ‘내게 굽히사’는 나의 간구에 귀 기울여 달라는 의미이다.
6절의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은 ‘누가 나에게 날개를 줄 것인가?’의 뜻으로서,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도 모반의 위험, 즉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화급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이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애처로운 신세를 한탄할 뿐만 아니라 오직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피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9절의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는 그들의 모반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15:31)
아히도벨이 출중한 모사였음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삼하16:23)
다윗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모반 계획이, 마치 바벨탑을 쌓던 인류의 계획이 무산된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무산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결국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믿음과 신의를 지킨 후새에 의해 아히도벨의 계략이 압살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고,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결하고,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 의해서 패퇴되고 만다.
12~15절 : 마음이 더 찢어지는 이유
압살롬의 모반사건이 다윗에게 있어서 마음이 더 아픈 이유는 그 압살롬을 도와서 이 모반을 주도하는 아히도벨이 자기 자신의 모사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이 상황에 절친한 친구였던 아히도벨이 합세한 이 현실 앞에서 다윗은 마음이 찢어진다.
12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14절을 통해서 아히도벨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얼마나 다윗과 가까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함께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하나님의 집을 사람들과 어울려 드나들던 너라니!”(표준새번역)
15절은 대적들의 파멸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무력하게 되기를 간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간구이다.
(나의 묵상)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히도벨은 현실에서 다윗보다 압살롬 편이 되는 것이 자신의 권력 유지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아히도벨처럼 굳이 권력욕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신의까지도 저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학창시절, 어떤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 놓고는, 상황이 급박해지자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뒤집어씌운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에 담대한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그 친구는 유독 민감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못 견뎌하며 이리저리 자기만의 방도를 구하는 친구였다.
결국에는 은근히 내게 다 뒤집어씌울 말들을 흘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가 없는 많은 이유들.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윗은 이 상황 앞에서 자신의 처신에 대해 많이 회개했으리라.
압살롬이 이렇게 아버지인 자신에게 멀어지게 된 것이 ‘암논과 다말 사건’을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에 비롯된 것이며 이미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절친이었던 아히도벨의 배신으로,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토설치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생각이 많았으리라.
나는 25살에 결혼함으로 교회에 발을 디뎠다.
그러니 그전에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하는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복음 생명을 알기 전에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이다.
물론 기도해야 한다고는 배웠지만 늘 속을 부글거리며 하는 기도라는 것이 정말 기도다운 기도가 되었을까 싶다.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마음과 행동이 요동친다.
복음 생명을 알고 난 후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왜냐 하면 내가 주님 앞에 너무도 완전한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격적으로 나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믿음의 인물들이 눈앞에 수두룩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오십 보 백 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서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존재이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이 땅에 보내신 그분, 예수님은 언제나 한결같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주님은 내 죄를 깨끗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요동치는 이 세상으로부터 안전한 도피성인 십자가를 주셨다.
세상의 죄악의 물결에 시달려도 내가 달려갈 곳 십자가가 있음이 너무도 감사하다.
그 누군가의 배신에 너무 아파도 나는 십자가로 달려가며, 누구를 배신하는 잘못을 저질러 너무 아파도 십자가로 달려간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찬88장)
(묵상기도)
주님,
나의 친구가 되어주심을 감사합니다.
한결같은 친구가 좋다고 이렇게 말하지만
저는 틈만 나면 배반의 길을 기웃거립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이 땅 위에는 비길 것이 없는,
완전한 친구로 곁에 계셔 주심을 확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요!
말씀으로, 기도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웃고 행복해하는 남은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