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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임진탐매 단신 Ⅱ 다자이후텐만구 - ⑤ 시비(詩碑)들
눌인 추천 0 조회 69 12.02.21 2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탐매 단신 Ⅱ 다자이후텐만구 - ⑤ 시비(詩碑)들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滿宮)에서 본 유일한 홍매

 

 

다자이후덴만구(大宰府天?宮)에는 많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가 901년 다이자후로 좌천된 그가 집 뜰에 심어져 있는 매화와 이별하게 되자 그 이별의 아픔을 달래며 읊었다는 와카는 태재부 천만궁 입구 자연석 시비에 새겨져 있다. 앞의 글에서 소개하였기에 원문만 소개한다.

 

東風(こち)吹かば ?(にお)ひおこせよ 梅の花, 동풍이 불면 향내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

主(あるじ)なしとて 春な忘れそ 주인을 잃었다고 봄마저 잊을 손가.

 

 

본전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나가시마신사(中島神社)가 보인다.신사의 설명판 옆에 하나의 시비가 보인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1694)의 하이쿠(俳句)이다. 하이쿠를 일본어로 쓸 때는 세로로 한 줄로 길게 쓰지만 일본어로 5-7-5의 운율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번역할 때도 운율을 살리기 위해 세 줄로 번역한다.

 

梅が香に 매화 향기에

のっと日の出る 불쑥 해가 나오는

山路かな 산길이구나

 

일본의 시가는 詩歌(Shiika), 和歌(Waka), 連句(renku), 連歌(renka), 付け句(tsukeku), 俳句(Haiku), 短歌(tanka), 折り句(oriku) 등이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짧아질 수 없는 간결미와 압축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하이쿠는 한 줄의 운문으로 계절과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의 실존에 가장 근접한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신라(新羅)의 향가(鄕歌)가 일본으로 건너가 생겼다고도 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시 형태 중의 하나로, 단 한 줄짜리 시이다. 하이쿠는 일본의 정형시로 5ㆍ7ㆍ5의 음수율을 지닌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힘들 정도로 짧은 시이기도 하다. 즉 하이쿠는 17자라는 세계 최단의 형식 속에 인생과 자연의 의미를 담은 시이다. 그리고 내용에 계제(季題)라 하여 사계절과 관련된 어휘가 들어가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 하이쿠는 렌가(連歌)라고 하는 것에서 나왔다는데, 렌가는 5ㆍ7ㆍ5ㆍ7ㆍ7의 와카(和歌)를 여럿이 모여서 5ㆍ7ㆍ5와 7ㆍ7로 나누어 읊었던 공동체적인 문예 활동이었다. 여기에서 훗쿠라고 하는 5ㆍ7ㆍ5의 앞 구가 떨어져 나와서 발전된 것이 바로 하이쿠이다. 뉴욕 타임스 지는 지난 한 해 동안 뉴욕 시민을 대상으로 교통과 계절을 주제로 한 하이쿠를 공모해 날마다 신문 한 구석에 싣기도 했다.

 

이 하이쿠를 쓴 마쓰오 바쇼는 1644년 지금의 우에노 부근에서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긴사쿠, 본명은 무네후사였다. 1680년에 후카가와(深川)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오얏나무 밑에 파초 나무가 많이 우거졌으므로「파초암(芭蕉庵)」이라 이름을 붙였고, 그의 이름도 바쇼(芭蕉)라 바꾸었다. 50년 동안 주옥같은 하이쿠를 남긴 일본의 대표적 하이쿠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오사카 남쪽 후지이데라시(藤井寺市)에 위치한 도묘지 덴만구(道明寺 天滿宮)에도 그의 하이꾸 "일 찍 핀 매화(하야바이, 早梅)"가 돌에 새겨 있다고 한다.

 

早梅の 일찍 핀 매화

片はなびらを 조각 꽃잎을

立つるあり 날리고 있네

 

 

 

마쓰오 바쇼 동상

 

다음에 주목해야 할 비석은 일본의 역사가·비평가·언론인·수필가인 도꾸도미 소호(德富蘇峰;1863. 3. 14 ~1957. 11. 2 )의 시비(詩碑)이다. 본명은 도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로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후손인데, 조상의 업적을 기린 숭모비인 셈이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86세였던 1948년 3월에 간행된 저서 『패전학교(敗戰學校)』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일본의 모든 정치인들에게

내 자신에 있어서도 애국심에 있어서는 감히 제(諸) 선배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가는 사실을 사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의 앞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자존심까지도 희생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 가장 불유쾌한 사실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의 학자나 정치인 등 지도층들은 자존심 때문에 ‘패전(敗戰)’이란 말을 안 쓰고 ‘종전(終戰)’이란 말을 잘 쓰는 편이다. 이에 반하여, ‘패전학교’라는 말을 쓴 그는 일본 지식인들 중에서도 아주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지한 주요 문필가로 군국제국주의 일본의 괴벨스로 일컬어지는 극우 리더였다. 교토에 있는 그리스도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 : 지금의 도시샤대학]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으며 중퇴한 뒤에는 언론인이자 문인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1887년에 '민유샤'[民友社]라는 출판사를 차렸고, 이 출판사는 일본 최초의 종합지 〈고쿠민노토모(國民之友)〉라는 영향력있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민유샤는 1890년에 〈고쿠민 신문 國民新聞〉이라는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신문은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서양식의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이 일본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뒤 몇 십 년 동안 제국주의 일본을 지지하는 호전적 국가주의자로 활동했다. 특히 1920~30년대에는 일본에서 제국주의를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917년 사이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경성일보(京城日報)〉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小? 『불여귀(不如?, ほととぎす)』단편집 ?시젠토진세이(自然と人生)?로 유명한 작가 토쿠또미 로까 (?富蘆花; ? ~1927)가 그의 형이다.

 

이곳에 있는 비석의 글을 읽어 보자.

 

儒門出大器 유문에서 큰 인물이 나오니 じゅもんたいきを出だし 

?擢?台司 대사로 발탁되었네 ばってきさられてだいしにのぼる 

感激恩遇厚 크나큰 은덕에 감격하여 おんぐうのあつきにかんげきして 

不顧身安危 일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았다네 みのあんきをかえりみず

一朝罹?構 하루아침에 참소를 입으니 원망을 삼키며 いっちょうざんこうにかえり  

呑寃謫西涯 서쪽으로 귀양을 갔다네 えんをのんでさいがいにたくせらる 

傷時仰蒼碧 마음이 아플 때 푸른 창공을 보았다네 ときをいたんではそうへきをあおぎ 

愛君向日葵 군주를 향한 마음 해바라기 해를 향하는 듯 きみをあいすることこうじつき 

祠堂遍天下 사당은 천하에 널려있고 しどうてんかにあまねく 

純忠百世師 순결한 충성은 백세의 스승이 되었다네. じゅんちゅうひゃくせいのしたり

       昭和 二十九年 蘇奉 菅原正敬 齡 九十二歲    (1954년 후손이 92세 고령에 쓰다)

 

그의 비석은 1940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세워진 적이 있었다. <덕부소봉시비(德富蘇峰時碑) 제막식(除幕式)을 거행>이라는 <동아일보> 1940년 5월 29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소봉회 조선지부(蘇峰會 朝鮮支部)에서는 덕부소봉(德富蘇峰)씨의 시비(詩碑)를 건설하고저 이래 활동하여 왔는데 이에 준공되어 작 28일 오후 3시 부내 청운정(淸雲町) 작소거(鵲巢居)에서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식장에는 각방면의 유지들이 다수 참석으로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권등사랑개(權藤四郞介)씨의 인사가 있고 소봉의 노령으로 식에 참열치 못하여 그대로 중도사(中島司)씨가 감사의 답례인사가 있은 뒤 조은총재(朝銀總裁) 송원(松原) 염원(鹽原) 의 축사가 있은 후 폐회하였다.

제막식을 마친 시비(詩碑)에 새겨진 시는 다음과 같다.

 

淸風溪上白雲洞

洞裡幽綠傍水去

老樹當門門擁石

鵲巢高處是吾家

 

 

그 외에의 비석들은 사진으로 소개한다.

 

 

 

천만궁에서 이번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滿宮) 탐매여행에서 얻어온 자료들 중 소개할 것이 많이 남았으나 이것으로 마치겠다. 너무 자질구레한 것까지 소개하여 미안한 감이 든다.내일 저녁 도꾜에 탐매여행을 떠나려 한다.도꾜 여행 자료도 찾아야하니 더 이상 시간이 없다. 혹 다시 한번 갈 기회가 생긴다면 보완 소개하겠다.  2012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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