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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선생님
138cm밖에 안 되는 작은 키에 까만 교복을 입고 내가 중학생이 되려던 1962년은 한국전쟁이 끝난지가 단지 7년밖에 안 되는 폐허의 조국이 화폐개혁으로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경제개발 계획으로 성장의 길로 막 첫발을 내딛으려 하려던 때이다.
내가 다니던 양양중학교는 수복지구에 있었다. (수복지구란 한국전쟁전에는 북한의 지배를 받던 지역으로 전쟁에 의해 되찾은 국토로서 시청,경찰서,우체국, 학교 등 행정기관도 제대로 없고, 파괴된 도로 교량 등도 그대로 방치되어 당초부터 남한의 지배를 받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열악한 지역을 말한다.)
나의 집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유명한 하조대에서 바다반대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는 곳인데 버스가 안다녀서 항상 걸어서 가야했다. 어릴 때는 조부모님과 집안어른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학교부지를 헌납하여 여기에 초등학교가 세워지는 바람에 편하게 다녔으나, 중학교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다.
중학교가 있는 양양읍에서 하조대까지의 거리는12km쯤 되니까 속초에서 강릉간을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30여분을 가야 했다. 지금은 승용차로 10분만에 갈수 있는 거리지만 그때는 30분에 한 대 씩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려서 타야 했으므로 꽤나 먼 거리였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학생들로 버스를 콩나물시루가 되었고 5일에 한번씩 장날과 겹치면 버스를 타는 게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관광철이 되면 이런 노선버스도 전세버스로 빠지는 바람에 버스시간간격은 제멋대로였다. 한 시간이 될지 2시간이 될지 기약이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한 대씩 오니까 앞 정거장에서 손님이 너무 많이 타서 우리 정거장에는 정차도 안하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보면 몇 시간 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지만, 버스이외에는 방법이 없던 우리들은 한마디 불평도 못하고 그저 버스가 와주기만 하면 고맙게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은 유학으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3살밖에 안된 나도 당연히 중학교 앞에 어른들이 면식이 있는 집에 부탁하여 한 달에 쌀3말씩 주고 하숙생으로 중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영어를 배우게 된다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주인집아들(당시 고2)에게 영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상하다.“ 너는 영어가 재미 있을 걸로 생각하니? ” “예, 아주 재미있지 않아요?”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냐! 재미는 없고 아주 골치만 아프단다.”
“왜요? 아주 재미있을 것같은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도 곧 알게 될거다. 내가왜 그렇게 말하는지..” 나는 그형이 하는 말이 하도 수상하여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받아온 책 중에서 이상하게 생긴 집이며, 파마머리를 한 강아지 그림과 꼬불꼬불한 글씨가 있는 영어책이 너무 신기해서 연신 펴보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얘야 밥 먹어라”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서 마당에서 세수를 하였다. 벌써 3월이지만 아직 찬물은 싫다. 집에서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하숙이니 어쩌랴.
남의 부엌에 드나들며 더운물 한 바가지 쓰려고 번거로움을 떨 바엔 그냥 찬물로 세수하는 게 낫다 싶었지만, 막상 세수를 하고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하숙집은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양조 장 집이었는데, 할머니 쪽으로 먼 친척집이다. 더 가까운 친척집도 있지만, 이집이 학교가 가깝다고 할머니가 굳이 이집에 부탁을 했다.
월요일 두 번째 시간, 드디어 기대하던 중학교 첫 영어수업시간이 되었다. 지금부터 꼭 오십년 전이지만 나는 지금도 첫 영어시간의 설레임과 영어선생님의 신비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이 다니시는 앞쪽 교실 문이 열리면서 떠들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조금 전 수학선생님처럼 검은테 안경을 쓴 무서운 얼굴에 묵직한 몽둥이를 든 선생님과 비슷한 사람이 나타날 줄 생각하고 있었다. “차렷, 경례.” 바로 전 수학시간에 반장으로 뽑힌 세동이의 구령에 맞추어 경례를 하고 쳐다보니 “아니 이럴 수가?” 너무나도 예쁘신 여자 선생님이 서 계시는 게 아닌가?
분홍색 투피스에 하얀 하이힐을 신은, 금방 하늘에서 내려오신 선녀 같았다고나 할까? 나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맹세코 이렇게 예쁜 여자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순간 상상하기를 저선생님도 우리와 같이 수저로 밥 먹을까? 화장실가서 큰일을 볼까? 하고 겨우 불경한 생각을 조금 해보고 있는데, 백묵보다 더 하얀 손으로 백묵을 잡고 칠판에“박 금자”라고 크게 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내가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 박금자 선생이다.”지금생각하면 이름이 촌스러워서 “킥킥”하고 웃는 아이도 있으련만, 그때는 그런 것은 고사하고 분위기에 눌려서 깊은 물 속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참으로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어서 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박금자 선생님은 초급대학을 졸업하고 우리학교에 처음부임하신 22세의 아가씨였다. “여러분 중에 알파벳 필기체 소문자 대문자, 그리고 인쇄체 소문자 대문자 다 쓸 수 있는 사람 손들어봐!” 몇몇은 손을 들었다.
“앗 불싸!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외워둘걸.”양양국민학교에 다니던 도회지 아이들은 벌써 영어책을 얻어서 알파벳을 외워둔 모양이었다. 나도 그날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외웠다. 선생님이 좋으니까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할 판인데, 그날 숙제는 음악노트(5선지)같이 생긴 영어노트(4선지)에 알파벳을 10번씩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간단한 문장을 배우게 되었다. 선생님은 분 홍 투피스에 하얀 하이힐로 단장하시고 줄이 잘 맞추어진 책상사이를 앞뒤로 오가면서 책을 한 줄 씩 읽으면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읽었다. 맑고 고우며, 낭낭한 선생님 영어 읽는 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나는 맑게 갠 하늘을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봄날에 교실 앞 화단에 핀 복숭아꽃과 선생님의 투피스의 색깔이 참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생님이 나를 지적해서 읽으라고 하셨다.
나는 정신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읽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는데, 다행이 옆에 앉았던 김형진이가 알려 줘서 조금 더듬거렸지만, 무사히 읽고 앉았는데, 그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창가 제일 뒤에 앉은, 우리반(1학년의 A,B,C반중 A반)에서 제일 힘센 김경수 가 호명되었다.
아마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아이들을 지적하는 모양이었다. 호명을 받은 경수가 일어서기는 하였는데 도무지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는 김경수는 19살이라고 했다. 나이로 치면 대학생인 셈이다.
나보다는 6살이 많은데, 덥수룩 수염이 난 턱이며, 복숭아 꽃 몽우리 같은 여드름이 얼굴에 가득 난 경수는 어른보다도 덩치가 크다. 변성기가 지났는지 목소리도 꼭 아저씨 같다.
그런데 경수가 책을 읽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번에 책을 읽으면서 더듬었는데 아이들이 웃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가느다란 회초리로 경수의 손바닥을 정말 아프게 때렸다.
여자선생이라고 깔보는 듯 한 경수를 꺾음으로서 우리 반 전체를 제압하려는 선생님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 다음시간 부터는 차례대로 한줄 씩 읽었는데 그때마다 경수는 읽는 대신 손바닥을 맞았다.
수요일 영어 시간에는 선생님이 읽으라고 이르켜 세우니까 이번에는 말더듬이 경수가 선생님을 한참 처다 보다가 “ 아이 러브 유!”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 반은 순식간에 약속이나 한 듯이 “하, 하, 하” 하고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아직 1학년인 우리도 이 뜻만은 알고 있었다. 교실이 그만 난장판이 되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신 선생님은 회초리로 교탁을 내려치며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다시 조용해 졌다. 그리고 회초리는 또 경수의 손바닥에서 춤을 추었건만, 경수는 시종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종료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다급해진 선생님은 수업을 마친다고 선언하였고, 반장의 “차려경례”소리에 절을 받는둥 마는둥 황급히 교실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경수는 웬일인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화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이 되었다. 영어는 일주일에 월, 수, 금 이렇게 3시간이 들어있다. 그 날도 선생님이 큰소리로 읽으면 우리가 따라 읽었으나, 시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참 뒤에 옆에 있는 형진이의 손가락을 따라간 내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의 눈을 의심했다.선생님의 그 고운 투피스 등에 잉크가 뿌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엨스자로 아주 크게.. 당시는 옷 한벌을 맞추려면 6개월 정도의 월급을 모아야 했다.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수업도 집중할 수 없었다. 다들 말을 못해도 누가그랬는지는 다 안다.
곧 학생들이 술렁거렸지만 눈치를 못챈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5분이 지났을까? 이번엔 검은테 안경을 쓴 수학선생님이자 우리반 담임 김택기 선생님이 화가 잔뜩나서 불그락 푸르락한 얼굴로 묵직한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셨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상상에 맞기겠다. 하여튼 그 일이 있은 뒤로 박금자 선생님은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우리의 영어시간은 체육시간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체육시간이지 배구공하나주고 나가서 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우리는 모두 2학년이 되었으나, 영어실력만은 1학년에 머물러 있었다.
새 학기가 되자 새로 나타나신 선생님은 칠판에 “명재호”이렇게 썼다. 그런데 영어선생님은 책읽기를 꺼린다. 축농증이 심해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은 본인이 읽는 대신 우리들에게 읽게 했다. 그리고는 본문을 모두 외우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읽을 수도 없는 우리들에게 본문을 외워오라니, 단어가 아니고 문장을, 그것도 통채로? 나는 엄두가 나지 않고, 또 거부감마저 들어서 외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오시더니, 외울 수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겨우3명이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외울 수 있는 사람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이들이 겸연쩍어하며 앞으로 나가자 이들을 교단 옆에 세우고, 선생님 말씀이 이어졌다.
우리들의 영어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내가 고심 끝에 극약처방으로 우리들을 살려 보려는데 이렇게 협조를 안 하니 화가나기 앞서 너무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 외에도 영어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에 치유방법이라면서 친절하게도 한사람씩 몽둥이로 찜질을 해주셨다.
찜질은 수업종료 종 이후에도 한참 계속되어서, 외우겠다는 아이들의 외울 시간도 없었다. 앞에서 매질을 당하는 아이들을 걱정스럽게 처다 보다가 드디어 내차례가 되었다. 다섯 번의 매질이 내 엉덩이에 떨어질 땐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그제서야 불이 붙는 엉덩이를 만지며, 나는 후회했다.
이럴 바엔 나도 외운다고 할 걸.(외울 걸이 아니고). 그러나 이런 수업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선생님이 축농증 수술을 한신다면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에 있는 학교의 발령을 기다리는 기간에 잠시 오셨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또 영어시간은 또 체육시간으로 대체되고 우리는 1학년 영어실력으로 3학년으로 진급했다.
또 새 학기가 되고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는데, 이번엔 아주 젊잔은 중년신사 한분이 군복색의 양복 같이 생긴 수선된 옷을 입고 오셨다. 군복을 약간 손질을 한 것 같았다. 칠판에“ 오윤근” 이라고 쓰신 선생님은 자신의 전직을 통역장교였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읽게 하였으나, 제대로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선생님은 극약처방이라며 뭔가 들고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그저 말로만 듣던 야외전축이라는 것이었다. 말이 전축이지 요즘으로 치면 애들 장난감 같은 레코드 플레이어였다.
접으면 들고 다니기 좋게 손잡이가 있으며, 레코드판크기의 원형의 오렌지색 플라스틱으로 된, 어찌 보면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것이었다. 건전지로 돌아가는 전축에서는 신기하게도 교과서를 읽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전축에 교과서가 녹음 되어 있다니..그저 우리는 감탄만 하였다.
지금도 생생하다.“오픈 유어 북 엣 페이지 원 헌드레드 나인티쓰리.”우리는 신이 나서 따라했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선생님도 발음이 좋은데, 미국사람이 직접 하는 발음을 저렇게 까지 정성들여 들려주시다니, 우리에겐 그게 그건데..
“우리가 이제 제법 문화적인 혜택을 받는 구나”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선생님은 영어시간마다 매번 야외전축을 들고 반마다 수업하시느라 애쓰시는 걸 보면서 고맙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가 혹시 우리도 영어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기대까지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너무 무리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전축이 고장 난 것이다.
선생님도 그 이후엔 더 어쩌시지 못하시고 그냥 우리에게 적응 하실 때 쯤 에는, 우리의 영어실력은 제자리를 맴돌고,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졸업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영어 수업이 끝났다. 그래도 그중에는 나중에 좋은 대학을 나와서 성공한 친구들도 많이 있다.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과정(삼척공업전문학교)에 가서도 변변한 영어문법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틈틈이 혼자 익힌 영어로 부족함이 없이 살지만 가끔씩 북한에서 온사람처럼 남들이 다아는 기본적인것을 나만 모르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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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라비님 미소가 절로 지어지네요.
"가끔씩 북한에서 온사람처럼 남들이 다아는 기본적인것을 나만 모르는 때가 있다."
저는 요기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너무 솔직하시고 소탈하신 성품이 느껴져서
표현은 그러셔도 아마 지식이 많으실 것같아요.
오라비님의 지난 시절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상상도 해보고 저의 추억속에서 짠한 기분도 들었어요.
아직도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실 것같아요.
제가 얘기 듣는 거 무자게 좋아하는디...
아껴감서 천천히 감상할게요.
요렇게 좋은 이야기 올려 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감사합니다.스칼릿을 생각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리 가 생각나요.
이야기를 많이 써놓고 특히 잠이안올때는... 혼자서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한답니다.
나의 과거에도 스칼릿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다음에는 고생한 얘기를 올려 볼까요?
ㅎㅎ제가 그 이름 빌려 온거라요.
이야기 보따리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기대 만땅이예요~~~ㅎㅎ
@스칼릿 이런 이야기는 잠이 안올때 마다 하나씩 써놓은 것입니다.
보잘것 없는 글이지만 이런글도 왜 그런지 한밤중에만
써진답니다. 그때는 잠이안오는 긴긴 겨울밤에
귀뚜라미소리를 벗삼아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날이 새곤 하였지요. 그런데요즘은 바빠서
써놓은거 정리도 힘들답니다.
쓴걸 다모으면 책한권도 더된답니다.
@오라비 대단하시네요
잘 모아서 정리하면
정말 좋은 책이 될 것같아요. 강추!^^
@스칼릿 재미없는 얘기를 누가 읽어 주겠어요?
스칼릿님이 재미있게 읽어주시니까
저는 신이나지요.
님께서 혹시 재미없는 부분을 코멘트해 주시면
재미있게 고쳐서 책으로 만들수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