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고향 풍경
올해는 추석이 너무 더워서 ‘하석’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입니다. 날이 더우니까 차례상에 오르는 밤이며 감이나 대추도 덜 익었습니다.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들만 덜 익은 것이 아닙니다. 추석이면 얼굴을 보던 친구들도 날이 더워서 그런지 어렸을 때 보던 친구들 모임도 시들해졌습니다.
충청북도는 예전에도 통행금지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사는 고향은 무주, 남원, 거창, 금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추석 전날은 밤이 늦도록 차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삼거리 버스 정류소 근처에 있는 식당에는 밤이 늦도록 술손님들이 웃고 떠들며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습니다.
삼거리에 있는 술집은 평소에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이제 막 삼거리에 내려서 십리, 이십 리 길을 걸어서 가야 할 사람들이 주로 이용을 합니다. 추석이나 설 전날은 대처에 살다가 명절을 쇠러 내려 온 20대 중 ·초반의 젊은 층들이 몰려듭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대처로 나간 친구들은 군대를 갈 나이가 아닌데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거나, 시계를 차기도 하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술집에 모이면 돈 걱정하지 말고 취하도록 마시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안주가 다양하던 시절이 아니라서, 추석 전후에 나오는 안주라고 해봤자 두부를 뜨거운 물에 데쳐서 내놓거나, 물오징어 볶음 등이며 좀 비싼 안주는 돼지두루치기 정도입니다. 그래도 마음껏 마시고, 배 터지도록 먹으라는 말에 막걸리를 몇 되씩이나 마시기도 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까 대처에서 추석을 쇠러 내려와 한턱 내던 친구들의 술값은 귀한 돈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취직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공장에 취직을 해도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으로 제대로 월급을 안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봉제공장에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일요일에 일을 해도 월급이 1만 원 넘기 어려울 정도라서, 상회나 식당 같은 경우도 명절 때나 돼야 용돈조로 얼마씩 받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추석이라고 새 옷을 입고 내려온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도 분위기를 이끌어 갑니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구경도 못 했던, 창경원이라든지, 뚝섬이며 강나루 수영장을 가보면 사람들이 개미들보다 많다는, 여자를 꼬이려면 통행금지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셔야 된다는 19금 경험(대부분 거짓말이었지만)을 듣다 보면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지경입니다.
객지에서는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에 마른버짐이 필 정도였으나 고향 친구들 앞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끼니 걱정 없이 공부만 하던 우리들은 술을 얻어 마셨으니 대접해야 할 위치가 바뀐 셈이었습니다.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대처에 나간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대처에 나가면 고생을 하든 말든 최소한 술이라도 마실 돈은 있었을 것이라는, 고향에서는 일 년 열두 달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 봤자 돈 구경을 못 한다는 자괴감의 발로입니다.
고향친구들이 대처에 나간 친구들 못지않게 돈이 풍족해지기 시작한 것은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입니다. 포도 농사를 짓기 전에는 밭작물이라고 해봤자, 콩이나 고추, 참깨나 들깨, 가을이면 김장 무나 배추가 전부였습니다. 콩 한 말 지게에 지고 장에 가 봤자, 돼지고기 한 근 사기 힘든 시절에 포도농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습니다.
우선 평당 수확 단가가 다릅니다. 땅 한 평에서 수확할 수 있는 건고추는 한 근 정도입니다. 포도는 한 평에서 100~200송이까지 수확이 가능합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포도 한 상자를 3kg이나 5kg 단위로 담지 않았습니다. 10kg 단위로 담았는데 한 평에서 3~4상자는 수확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포도는 물기가 없는 땅이 적지입니다. 산골이라서 심을 작물이 마땅치 않은 경사지가 대부분인데 그 땅이 포도농사에는 최적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너도나도 포도농사에 뛰어들고부터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당연합니다. 대처에 나가 동상 걸린 손톱이 빠져 나가도록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된 친구나, 이발소에서 손님들 머리를 감아 주는 꼬마로 이발 기술을 배워 이용사 자격증을 딴 친구들이 일 년 동안 벌어야 하는 월급의 열 배, 많게는 수십 배 이상을 버니까 돈 씀씀이도 달라졌습니다.
추석 전날 삼거리 중화요리점이나, 술집 구석방에서 두부를 김치에 싸서 먹던 입맛도 변했습니다. 동네에서는 술을 마실 만한 곳이 없다며 읍내로 나가거나, 근처 옥천, 멀리는 대전이나 군산까지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여름내 땀 흘려 딴 고추나 팔고, 콩이나 팔 때는 새우깡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친구들은 누구나 농협에 마이너스 카드가 있습니다.
포도철이 아니라도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고, 철따라 관광도 다니고, 새마을 모자만 쓰고 다니던 머리에 메이커 모자를 쓰고 다닐 형편이 되니까 대처 친구들이 내려와도 예전처럼 어깨를 껴안으며 반기지 않습니다. 마치 아랫사람을 보듯 건성 악수를 하고 "객지에서 사느라 고생 많지?" 하며 성의 없는 말이나 하니까, 대처 친구들은 고향에 내려와도 집 안에만 있다가 올라가기 일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석 풍경은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전의 추석 풍경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사람에 대한 향수가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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