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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지 않는 은총>
이탈리아 한 마을에 장난감 만드는 일을 하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없어서 늘 적적한 마음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내 질 좋은 떡갈나무로 피노키오란 인형을 만들고 아들처럼 아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보고 “부디 피노키오가 저의 진짜 아들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별에서 푸른 요정이 내려와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나무였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달라는 피노키오의 요청에
“네가 정말로 할아버지의 가족이 될 수 있을 만큼 착하고 용기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그땐 널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생명을 갖게 된 피노키오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피노키오를 서커스를 보여주겠다면 데려갔고
그것에 정신이 팔린 피노키오는 서커스의 광대가 되었습니다.
줄도 없이 움직이는 신기한 목각인형이기 때문에 서커스 단장은 돈벌이를 위해 그를 가둬놓습니다.
어느새 푸른 요정이 나타나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이런 곳에서 울고 있니?”라고 물으니
피노키오는 혼나는 것이 무서워 잡혀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코가 쑥쑥 길어졌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코는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온 피노키오는 등굣길에 또 늑대를 만나는데
늑대는 이번에는 피노키오를 어른들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며 당나귀로 만들어 되팔아버리는 섬에 팔아버렸습니다.
담배와 술과 어른들의 문화에 심취하다보니 피노키오도 반쯤 당나귀가 되어버렸습니다.
울며불며 후회하였더니 다시 푸른 요정이 나타나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이젠 제페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난롯가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다리에 불똥이 튀어 다리가 타버렸지만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반쯤 타버린 자신의 다리를 보며 아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울어버립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빠를 찾아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피노키오는 망가진 다리에 대충 나무막대를 이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찾아 나섰다가 큰 고래에게 잡아먹혀 뱃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피노키오는 아빠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도 고래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고래 뱃속에서 불을 피워 고래가 재채기를 하게 만들어 할아버지를 구하지만 자신은 정신을 잃고 맙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무가 아닌 인간의 몸을 한 피노키오가 되어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피노키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노키오는 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린 동화입니다.
말썽장이 피노키오가 어른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을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즉 자신의 아빠의 부재(不在)였습니다.
피노키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계셨고 또 발에 붙은 불을 꺼 주었다면 피노키오는 또 늑대의 꾐에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반성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에게 가장 큰 교육이 되었던 것은 아빠의 부재였습니다.
아빠를 찾아 나서면서 참으로 아빠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고
다시는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잠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찾는 이들을 떠나시는 것이 곧 사랑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가신 곳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첫 네 어부 제자들만 부르셨을 복음 전파 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고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병을 낫게 하시어 그 부인이 당신을 시중들게 하신 것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아만이 아니라 그 가족도 보살펴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왜 낮에 데려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회당에 안식일이기 때문에 가셨던 것 같습니다.
해가 지면 움직일 수 있고 예수님께서 언제 떠나실지 모르니 계실 때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를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갖가지 앓는 질병을 다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 입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좋아할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은 의인에게서 찬미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밤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신 뒤에 이른 새벽 아직도 깜깜할 때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줍니다.
시몬과 일행이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며 그렇게 하실 것을 정하셨을 수도 있고,
또 베드로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결정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예수님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떠나야 할 때이기에 다른 고을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서도 똑같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어쩌면 이 복음은 우리가 사람들과 언제 헤어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시고는 다른 고을로 떠나셨습니다.
만약 당신을 좋아하는 이들 안에만 머무시려 했다면 참 복음 선포자의 모습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빛은 어둠이 있는 곳을 향해야 합니다.
그 곳이 다 밝혀졌다면 다시 어둠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붙들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
하고 말씀하신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는 그 사람들이 이미 당신을 찾는 것을 넘어 당신을 증언할 사람들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떠나시는 분입니다.
이는 마치 아가서의 신랑과 같습니다.
신랑이 신부와 행복한 시간을 갖다 갑자기 이유 없이 사라집니다.
신부는 신랑을 찾아 해매입니다.
옷도 엉망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 신랑의 묻다보니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초죽음이 되었을 때에야 신랑은 신부를 만나줍니다.
신랑은 신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둘이 만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만남입니다.
떠남도 하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심으로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 먼 곳까지 찾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분명 아프고 마귀 들린 이들이 남아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마지막 교육으로 어둔밤을 허락하십니다.
어둔밤은 믿음이 생긴 이들에게만 허락하시는 당신의 부재입니다.
믿음으로 그 시간을 버티면 더 높은 경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기도로 치면 관상의 첫 단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다가 자신을 완전히 버려 정화가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버리는 것도 정화를 위한 교육의 일종입니다.
맹맹한 만남, 발전이 없는 만남을 하느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아픔을 겪더라도 조금씩 성장하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아졌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마음 아파할 필요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평생을 이 어둔밤 속에서 믿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둔밤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이제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시험입니다.
온갖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데 주님의 뜻은 알 수 없을 때 그래도 버틸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전에 만났던 모습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보일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재까지도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을 때 증명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이지 않으시는 것은 은총이 됩니다.
구약의 요셉도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완전해졌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그런 의도로 자신을 어둠 속에서 살도록 섭리하셨음에 놀라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고통과 어둠과 부재는 그분께서 더 가까이 계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교육법이기에
더 발전하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당히 우리 믿음을 증가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 순간 ‘몇 년 뒤’라는 자막이 보이면서 새로운 화면이 나오곤 합니다.
그 몇 년 동안을 잘 지냈는지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는지 남들에게 위로를 받는 불쌍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몇 년이 사람의 모습을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이러한 구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한 번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지금 모습은 몇 년 뒤에 어떻게 될까요?
남들의 부러움을 받을 만큼 잘 될까요?
아니면 엉망진창이 되어서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받게 될까요?
그 몇 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결정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 삶은 틀려먹었어. 지금의 상황은 바뀌지 않아.’ 하며 내게 그 몇 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남의 몇 년이 변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몇 년 역시 변화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멋지게 변화시킬 몇 년이 있음을,
그리고 그 몇 년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이신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몇 년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무엇이 무서울까요?
또 무엇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시몬의 장모 모습처럼 많은 이들도 세상의 각종 문제들로 힘들어합니다.
제1독서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을 지도 모릅니다(욥 7,1 참조).
그래서 나의 나날이 희망 없이 사라져가고,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욥 7,6.7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시게 됩니다.
즉, 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밤새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도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참조).
기도는 특별할 때에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우리에게 선물로 줍니다.
종종 18년째 새벽 묵상 글을 써오고 있는 저를 향해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져봅니다.
모두가 “당연하지요. 안 먹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고 묵상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밥 먹는 것이 특별하지 않는 것처럼, 묵상 글 쓰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함도 꾸준히 하니까 특별함이 나오나 봐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특별함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으신 분은 결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주님 곁에 시중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꾸준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고,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 9,16)
지금 내 자신은 주님의 손을 잡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꾸준한 기도밖에 없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연중 5 주일입니다.
추위가 누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에 유의하시길 빕니다.
<제1 독서>에서, 욥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늘 <복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1고린 9,19),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되었음” (1고린 9,22)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 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당신께서 빛이심을 드러내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아버지 성부와 친교와 유대를 이루시며,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고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장면입니다.
곧 섬김의 봉사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구절에만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마르 1,31)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지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니 우리가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유 받으면 믿을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믿음이 치유를 불러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그 구원의 손길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둘째 장면>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장면입니다.
이를 우리는 전례와 성사로 대표되는 성화를 위한 예수님의 사제직과 관련해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당신의 삶은 아버지 성부와의 친교와 유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가지 차원,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결코 기도 없는 활동이나 활동 없는 기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활동에 앞서 먼저 기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곧 활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곧 선포와 증거의 예언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것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는 당신 권능의 표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은총, 이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먼저 하느님과의 유대와 친교를 앞세우는 기도의 삶’이요,
‘선포된 복음을 영접하고 그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삶’이요,
‘형제와 이웃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아멘.
<복음 선포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질병은 육체적인 괴로움을 줄 뿐 아니라 정신마저 약하게 만듭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까지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병이 깊거나 길어지면, 신앙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큰 병이나 긴 병을 앓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한탄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열병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열병은 우리말로 홧병, 울화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서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불안과 소화불량,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쓰리고 울렁거리는 등 여러 반응이 일어납니다.
여성암 환자 85%가 홧병이라는 통계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에 쌓인 것을 풀지 못하면, 비우지 못하면 정신적 장애는 물론 육체적인 장애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낫게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이 지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보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한테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격한 부모 밑에서 늘 통제 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남을 지배하고 과시하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입니다.
이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명의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을 지니신 주님, 봉사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사하러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면서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겉모양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근원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열병이 인간을 괴롭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에서 구원에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들, 귀찮고 짐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인근 마을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만하거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이른 새벽 홀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조금 잘 나가면 자신이 무슨 큰 능력이 있는 양 으스대기 쉽습니다.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신 행동이 외딴 곳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딴 곳으로 가서 한참 기도하고 계실 때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7).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9)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하느님께 있었기 때문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떠나 당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제자들이 한 말에는 한편으로 유명해지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기가 좋으니 인기 관리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오히려 야망을 부추기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즉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심으로써 당신을 챙기지 않고 당신 백성을 보듬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늘 간직하셨습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따라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우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 행함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듯이
우리도 이런 저런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일어서서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시길 바라며
그것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늘 일치해야 가능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가신 기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도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마르6,46),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마르14,32-39).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을 때에도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루가6,12).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1코린 9,16. 19.22)
그야말로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다른 고을을 찾으셨듯이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 약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기도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앞길을 예수님의 길로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걸으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꾸 멈칫거리고 있습니다.
하오니 이끌어 주십시오.
잃은 양, 새로운 양을 인도할 수 있도록 저를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언젠가 드렸던 말씀입니다.
스승님이 평생 아끼던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근 채 그 책을 읽곤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제일 먼저 그 책을 꺼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엔 이렇게 단 한 줄만 씌어 있었습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하라”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껍데기인지 알맹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알맹이를 만드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의 만남이 답이다 - 만남의 축복>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은혜롭습니다.
하루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을 찬양할 때 치유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서진 마음들을 낫게하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입춘이니 봄같이 따뜻하신 주님 찾아 오시는 느낌입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부서진 마음들을 낫게 하시도다."
참 재미있습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제 강론 중 가장 많은 제목을 차지하는 것이 ‘---답이다’라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답이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예수님이 답이다’, ‘기도가 답이다’, ‘사랑이 답이다’, ‘회개가 답이다’ ‘믿음이 답이다’ 등 끝이 없습니다.
지난 봉헌축일 강론 제목은 ‘봉헌이 답이다’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답은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답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하느님이 답이다’안에 다 포함됩니다.
결국은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답은 무수히 많은 듯 해도 답은 하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2월 4일 주님 봉헌 축일 날 미사 전 ‘초 축복과 행렬’ 전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변을 환히 밝히는 ‘봉헌초’가 얼마나 우리 ‘봉헌자’의 신원을 잘 알려주는 상징인지 새롭게 깨달은 날입니다.
하여 이날 강론의 서두는 미사후 다시 첨부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 아침미사 전 ‘초 축복과 행렬’ 예식 중 성전을 환히 밝히는 신자들의 봉헌초들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 하나하나 자리마다 주변을 환히 밝히는 ‘새 봉헌초’가 참으로 우리 ‘봉헌자’의 신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주변을 환히 밝히면서 사라져가는 ‘봉헌초’같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하고 감동적이겠는지요.
비단 하루로 끝나는 주님 봉헌 축일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우리 봉헌 축일’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날 제 강론 원고를 보면 봉헌이 답임을 길게 나열한 문장이 있습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감동, 봉헌의 지혜,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치유, 봉헌의 평화, 봉헌의 자유, 봉헌의 아름다움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이며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허무에 대한 답도 봉헌뿐임을 깨닫습니다.
봉헌생활 기쁨의 빛이 허무와 무의미,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봉헌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흡사 매 주일이 주님 봉헌 축일이자 우리 봉헌 축일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강론 제목 역시 ‘주님과의 만남이 답이다-만남의 축복-’입니다.
정말 봉헌 못지 않게 주님과의 만남이 답임을 절감합니다.
만남의 선물, 만남의 행복, 만남의 기쁨, 만남의 평화, 만남의 치유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대신 만남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삶은 만남이다’ 할 정도로 무수한 만남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저에겐 어제 40년 전 6학년 때, 18명 제자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큰 기쁨의 선물이었습니다.
요즘 설레는 기쁨으로 만남을 갖기는 처음입니다.
만남도 선물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좋은 만남들은 모두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들입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제자들 자랑도 팔불출에 속한대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제자들 만나기에 앞서 1977.3월-1978.2.9.일 졸업식날 까지 대학노트 네권의 일기장도 읽어봤습니다.
만 40년 전 1978년 2월 9일 졸업식날 일기중 처음 부분입니다.
‘졸업식! 4:30분에 기상, 1시간 동안 아이들 위해 기도하고 1년간 무사했음을 감사하다.
마지막 이야기 시간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내리는 눈 맞으며 졸업식, 졸업식 노래 부를 때는 눈물이 나왔다.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제자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깊어질 것이다.’
어제 40년 후 2018년 2월3일 제자들의 성의 표시의 선물과 함께 받은 편지글에도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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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칠순을 맞이하여 선생님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같은 일인 것 같아요.
건강히 계셔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저희들 작은 정성 모아 선생님께 드립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뵐 수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팔순때도 같이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세요.
선생님, 울 친구들 모두 칠순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신림초 제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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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불러준 스승의 노래는 눈물나도록 고맙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정말 주님과의 만남이 답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제자들과의 만남이 이처럼 행복했다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사랑했던 이들과의 만남은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수없이 강론에 인용했던 세기중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있었던 예화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 모든 것이 다 있었는데 하나가 없었어요.”
“그 하나가 무엇이던가요?”
“기쁨이었습니다. 다 있는데 기쁨이 없었습니다.”
정말 다 있는데 기쁨이 없다면 행복도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다 있는데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기쁨, 평화, 희망 없는 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부자는 기쁨, 평화, 희망이라는 세 보물을 지닌 자들일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만날 때 참 좋은 선물이 기쁨, 평화, 희망입니다.
세상에 돈 주고 살 수도 없고 훔쳐올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기쁨, 참평화, 참희망의 선물입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 이 선물들을 받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예수님의 하루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치 복음 장면이 기쁨의 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주님과 만날 때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마침 어느 유명 정치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현장에 답이 있고, 아픈 곳이 중심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입증됩니다.
고통의 현장에서 치유의 구원의 ‘답’을 찾아내는 주님이시요,
‘아픈 곳’의 중심에 가셔서 아픈 이들에게 치유와 자유의 구원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대통령이 큰 사건이 날 때마다 아픈 곳의 현장을 찾아 나서는 일은 아주 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픈 곳의 중심,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주님과 만날 때 놀라운 치유의 기적에 자유롭고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입니다.
마치 주님의 빛 앞에 사라지는 온갖 어둠의 세력들 같습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터치하고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터치하면서 이뤄지는 치유요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입니다.
이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원천은 기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만남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활동의 중심에 관상의 샘인 기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님의 관상의 샘, 외딴 곳의 기도처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여러분도 필히 외딴곳의 기도처를 꼭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 외딴곳의 기도처는 필수가 된 세상입니다.
기도해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은 기도를 통해 활력을 얻고 사명감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 신원을, 내 사명을 새롭게 깨닫고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주님과 만나는 외딴곳의 기도처입니다.
세상의 변두리 같아도 역설적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중심이 된 외딴 곳입니다.
그러니 외딴 곳이 없는 사람은 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 거룩한 성전이 세상의 중심, 외딴 곳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확신에 넘친 복음 선포의 사명에 대한 감동적 고백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이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종의 자유인’이라는 기막힌 역설의 진리가 성립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이 각오와 열망은 순전히 기도를 통해 하느님 주신 깨달음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고 주님을 떠나 있으면 지옥입니다.
극심한 병고중에 탄식하는 욥의 절망적 상황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흡사 코헬렛의 인생 허무에 대한 탄식처럼 들리는 오늘 욥기 말씀입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그렇게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이렇게 병고나 세상 어려움에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러나 욥은 결코 절망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습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영혼은 하나 다치지도 망가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밤하늘 별처럼 빛났습니다.
기도의 끈, 희망의 끈, 하느님의 끈을 붙잡고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이, 하느님의 끈, 희망의 끈, 기도의 끈을 놓는 게 죄입니다.
바로 이런 위기가 기도하여 주님을 만나야 할 순간입니다.
욥기 7장7절에서 21절까지 계속되는 욥의 탄원 기도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은 저를 보지 못하고 당신의 눈이 저를 찾는다 하여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답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고통의 어둔 터널을 통과합니다.
사람마다 통과 기간은 다 달라도 분명한 것은 때가 되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여 욥처럼 해핀엔드로 끝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과 더불어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을 가득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온유하고 겸손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평화로이 가서 주님을 찬양하며 복음 선포의 삶을 삽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선포함>
욥은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고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는 자신을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7,1-2)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7,4)
그럼에도 그는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추십니다." (시편 147,3.6)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자비의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며 주님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곧바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키시어 병을 고쳐주십니다(마르 1,30-31).
예수님께서는 온 고을에서 온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1,34).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마귀들린 모든 이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는 치유를 바라며 '누워 있는' 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1,31).
그분께서는 질병을 앓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루카 4,40)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치유와 해방의 업적을 하느님 안에서 수렴하십니다.
그리고는 갈릴래아 온 고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지요.
어쩌면 믿는 우리는 고통을 직시하며 탄식하는 욥이나,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 또한 예수님을 찾아나서는 병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의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누워 있는 병자인 우리 각자와 사회는 침상에서 '일어나' 해방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히에로니무스)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체험하고 선사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기쁜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도록 불렸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듯이, 우리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겠습니다.'(1코린 9,19.22)
복음은 차별 없이 모두를 품어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가운데 선포됩니다.
곧바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세우는 바로 그 순간 치유와 해방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그렇게 고통 가운데서 선포됩니다.
복음은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한 부조리한 현실 한복판에서 선포됩니다.
우리도 아픔과 고통 중에서도 치유자이신 예수님처럼 열린 마음과 영혼으로 모두를 사랑했으면 합니다.
고통의 극복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며, 서로를 향해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도록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해야겠지요.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인간됨을 회복하는 복음 선포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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