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 1948년경 스즈키 망언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정당한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중략)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재정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1949년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측의 공헌에 의한다.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반출'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 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리에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이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 각국도 오랫동안 일본령으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의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가지고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적 의도를 배경으로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1950년대 ■ 1953년 구보다 망언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 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 진기 :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 :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조선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 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한국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측 각 위원들 흥분한 표정으로 각자 발언한다.)
홍 :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다 :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 경근 : 천만엔이나 2천만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 태하 :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다 :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 :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다 :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 :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다 :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다 :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대 ■ 1963년 이케다 망언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 1963년 시이나 발언
(숙부 고토 신페이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이것은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 1965년 다카쓰기 망언
36년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이지만...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 1965년 사토 망언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합병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가지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조약인 한 이것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음은 굳이 제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970년대 ■ 1974년 다나카 망언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습니다만, 그 후 한국이나 그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안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1979년 사쿠라다 망언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 있다.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 교육의 결과이다.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 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1980년대 ■ 1982년 마쯔노 망언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 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1986년 7월 후지오 망언 (제1차) 그것은 전 내각에서 끝난 것이므로 더 이상의 일은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세계사에서 그같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쪽이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도 인정해야지.
■ 1986년 10월 후지오 망언 (제2차)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것은 왠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 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뿌리를 자르려고 하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 1986년 11월 후지오 망언 (제3차)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 1990년 오자와 망언 (천황폐하의 '말씀'내용은) 발을 들여놓고 들여놓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만큼, 우리가 의논할 것은 아니다. 천황폐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면 등에서) 노력하고 있다. 이 이상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있는가. 상식선도 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천황이 정치에 연루되어서는 안된다. 천황의 이름을 빌려 권위로서 사용한 것이 과거 역사의 잘못이다.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 1995년 와타나베 망언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으로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 1996년 에토 망언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습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다. 일본인이 보면 거기(조선반도)는 결코 식민지라는 의식은 없었다.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지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이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은 없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속에서 날치기 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 한국인 크게 활약하고 있다. M H, M K, I H 모두 그렇다.(주: 발언은 실명) 야구선수도 L의 사장도 모두 그렇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라. 한국사람들 뿐이다.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다. 일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모든 계층에서 한국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 2000년 이시하라 도쿄지사 망언 3국인과 외국인의 흉악한 범죄가 계속되고 있어 지진 등이 발생하면 소요사건이 예상되며 그럴경우 자위대에게 치안출동을 요청하겠다.
■ 2000년 모리 총리 망언 일본 국가는 당연히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임을 국민에게 확실히 인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활동해온 지 30년이 지났다.
■ 2001년 노로타 호세 망언 우리가 2차 대전에 참전해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을 아시아에서 몰아냈다.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일본 덕분에 독립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 ▷ 2004. 1. 9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한국의 독도 우표 발행 계획에 대해“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며 한국은 잘 분별해서 대응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