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 이정연
결혼하고 처음 남편과 크게 다툰 것은 함지박 때문이었다. 가로 팔십 센티, 세로 오십 센티쯤 되는 큰 것이다. 시골집에서 대를 물려 쓰던 재래식 다리미, 도자기 찻주전자, 바디, 베 맬 때 쓰는 커다란 솔, 호롱, 어머니의 비녀, 반지, 화롯불쏘시개, 놋국자 등의 물건을 이 함지박 속에 넣고 두꺼운 유리를 덮어 탁자가 없어 허전하고 불편하던 소파 앞에 놓았다. 이제야 무엇인가 자리가 잡히고 그 곳에 작은 화분까지 하나 넣었더니, 차를 놓아도 좋을 만큼 근사한 탁자가 되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예쁜 커피 잔에 차를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아 빈 잔을 이리저리 놓아보고 설레며 기다렸다.
그 함지박을 보고 ‘당신 참 좋은 취미를 가졌군!’하며 좋아할 줄 알았던 남편의 표정이 싸늘해지면서 이젠 더는 못 참는다며 당장 이 신혼집에 안 어울리는 물건을 치워 버리라는 것이었다. 내 표정만 봐도 충분히 짐작될 일에 그렇듯 심하게 말을 해서 나도 화가 났다. 친정에서 애지중지 쓰던 물건들이 그렇게 싫으면 내가 싫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오늘 처음 이 함지박을 거실에 놓았는데 뭘 더는 못 참는다는 말인가. 나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남편은 작은 방에 있는 그 물건과 함께 당장 치우든지 내일 누구에게 주어버리든지 아니면 제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좀 치워달라는 것이었다.
작은 방의 물건이라면 신랑 신부가 입던 전통 혼례 복장이다. 경북 상주지방에서 쓰던 마을 공동 물건으로 혼례가 있으면 삯을 내고 빌려 쓰던 물건인지 ‘세稅 ; 백원’이라는 붓글씨까지 적혀 있는 것이다. 전에, 병원 경비실에 근무하시던 분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며 주어서 담뱃값을 드리고 내게 오게 된 물건이다.
시집은 새색시가 남편보다 그 의문의 상자를 애지중지 기름걸레로 닦아 넣어 두는 모습에 저것이 무엇일까, 늘 궁금했던 남편이 혼자 그 상자를 열어본 모양이었다. 사모(紗帽) 넣을 자리가 위로 볼록 솟았고 단청처럼 알록달록 칠한 것이 색이 바래져, 보기에 따라서는 상자만 봐도 유쾌할 리 없는데, 남편이 더욱 혼비백산한 것은 원삼 위에 길게 놓았던 달비 때문이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긴 머리채가 세월의 흐름에 견디다 못해 바스러진 것을 본 남편이 기겁을 한 것이다.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이 한 집에 기거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섭섭해 하며 거실 가운데 놓인 그 함지박을 한 걸음 물려서 구석진 곳에 밀쳐 두었다. 크게 실망한 내 모습을 본 남편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고 남편이 그렇게 깜짝 놀랐던 혼례복 상자는, 책상 위, 가급적 남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나도 남편을 충분히 이해했다. 집안 구석구석 옻칠한 굽이 달린 제기가 즐비하고, 놋그릇이 여러 벌, 작은 함지박, 촛대, 바디가 수두룩하니 신혼살림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하물며 무지갯빛 단꿈으로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어지는 신혼 때임에랴.
서로가 한 발 물러서서 이해를 한다 해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잠시 싸우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 언제고 내가 없을 때 누굴 주어버리든지 하겠다는 말에 조마조마해서 “저걸 없애버리면 난 절대 참지 않을 거야.” 하고 엄포를 놓아 보다가 그래도 난심이 되지 않아 “이거 대단찮은 물건 같아 보여도 지금 시가로도 수천만 원이 돼요. 그러니 당신 이거 함부로 주거나 버리지 마요.” 하고 단단히 덧붙여 두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의 시세는 한 번도 알아본 적이 없다. 친정어머니가 어릴 때 쓰다가 시집을 갈 때 가져 오셨고 오빠가 쓰다가 다시 내차지가 된 달창난 작은 놋숟가락에 대한 애착을 어찌 끊을 것인가. 보리밥알 몇 톨을 올려놓고 어머니께 투정부리던 내 어린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그 숟가락의 추억에 어찌 값을 매길 것인가. 세월을 거슬러 수많은 신랑 신부의 사랑의 약속이 담긴 이 혼례복을 누가 금전으로 환산할 지혜를 지녔겠는가. 지금 이런 물건들을 다시 만들 수도 없고 세월을 거슬러 소박한 서민의 모습이 지니는 정감을 부여할 수도 없다.
남편에게는 이 물건들이 지니는 금전적 가치를 몇 배나 부풀려 말했지만 실은 나는 이 물건들을 보며 오히려 욕심을 잊는다. 내가 꼭 가지고 싶은 좋은 물건도 잠시 내 소유일 뿐, 도무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 혼례복마저 어찌어찌 내 손에 와 있는 생각을 하면 물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 그렇게 하찮게 쓰이던 물건들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모진 풍상 견디고 아픔 삭히니 지금 얼마나 큰 가치로 빛나는지 헤아려지는 까닭이다.
어느 스승이 있어 한 문건이 지니는 상반된 교훈의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겠는가. 계절이 바뀌니 아파트 앞에 멀쩡한 새 가구들이 즐비하게 버려져 있다. 아직 쓸 만한 물건도 많고 비록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지만 예술성이 있어 보이는 것도 적지 않다. 나는 가급적 가구를 사지 않는다. 처녀 때 쓰던 책상을 그대로 가져왔고 초등학교 때 오빠가 선물로 사준 빨간 필통을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쓰고 있다. 내게 필요치 않는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은 미덕이지만 기능에 관계없이 더 화려하고 좋은 물건을 갖기 위해 버리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소박한 물건도 멀지 않은 세월이 지나면 그리움과 정감이 넘치는 골동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