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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계바늘이 자정을 가리키자 사무실 문이 열리며 주인아저씨가 밖으로 나왔다.
“잠깐 들어가 쉬어”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주유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부리나케 휴게실로 뛰어 들어간다.
진우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요즘처럼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추운 날이면 밤 근무를 서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낮과는 달리 주유를 하러 오는 차들의 수도 얼마 없어 멍하니 찬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실내에서 대기해도 될 텐데 그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반드시 밖에서 대기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주인아저씨의 철칙이었다.
게다가 일에 있어선 까다로워 정식으로 주어지는 휴식 시간이 아니면 실내에서 쉴 수도 없었다.
그나마 두어 시간 마다 10분씩 주어지는 짧은 휴식이 있어 꽁꽁 언 몸을 잠시나마 난로로 녹일 수 있었다.
진우가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유소에서 근무한지도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남들이 꺼려하는 야간 근무를 도맡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갈 곳 없는 진우에겐 안성맞춤인 직장이었다.
근무가 없는 낮 시간을 이용해 다른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밤새 주유소에서 일하고 아침에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오후엔 근처 편의점에서 일했다. 고되고 힘든 일의 연속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혁의 곁을 떠날 때 그는 철저히 빈손이었고, 학력도 지위도 없는 그가 가질 수 있는 돈벌이란 흔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진우에겐 절실히 필요했다.
그동안 수혁에게 신세진 것과 빚을 갚으려면 무엇보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빨갛게 얼어버린 손을 난로에 녹이며 진우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섭게 불던 겨울바람에 실려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온종일 낮고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더니 기어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제기랄.. 더럽게 춥다 했더니 눈까지 오고 지랄이야.”
지난주,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 돈 벌겠다며 이 주유소에 들어온 남자는 입도 거칠고 행실도 나빴다.
주유소에 딸린 작은 직원용 숙소를 같이 쓰고 있는데 진우는 이 남학생이 몰래 자신의 가방을 뒤지는 걸 두 번이나 목격했다.
달리 훔쳐갈 것이 없기에 못 본 척 눈감아 주긴 했지만 좀처럼 친해질 기회도 그럴 마음도 들지를 않았다.
옆에서 계속 욕을 내뱉으며 투덜거리는 아르바이트생을 모른척 하고 진우는 창가로 다가가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바람을 따라 휘날리던 눈발은 바닥에 채 닿기도 전 녹아 없어져버렸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는 하얀 결정체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시려온다.
그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이미 나 같은 사람은 잊어버렸겠지.
그래.. 차라리 그게 더 좋아.
나 때문에 겪은 더러운 기억들.. 이 눈처럼 하얗게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으면......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서늘해진다.
마음이 한 없이 가라앉았다.
그 때 그 사건 이후, 정민철은 두 번 다시 진우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진우가 먼저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지만 휴대전화도 이미 바꿔버린 후였다.
진우는 민철이를 움직인 게 유희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를 직접 찾아가 일의 전후를 따져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다 소용없는 짓일 뿐이다.
더 이상 따지고 캐내어 봤자 수혁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긁어 부스럼만 생기겠지.
이제 더는 수혁에게 신세질 수 없었다. 그의 앞길을 막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만나 그가 바라던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해 주는 것이 그동안 그에게 진 신세를 갚는 길일 것이다.
어떤 오해가 있든, 무슨 덫에 걸렸든 결과적으로 수혁이 자신을 만나기 전처럼 원하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언젠가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우연이라도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오해도, 서로에게 쌓인 앙금도 모두....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슴이 시리고 아파도 참는 수 밖에 없다.
이따금 비좁고 더러운 방에 몸을 누이면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수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함께 살던 집, 마주보며 식사를 하던 식탁, 서로에게 기댄 채 잠이 들던 침실,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던 거실...
부딪치며 상처 주던 일들도 있었지만 다정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무심한 듯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퉁명스런 말투 뒤엔 늘 배려가 담겨 있었다.
좋은 사람...
그는 스스로를 차갑고 냉혹하며 이성적이고, 무자비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천수혁이란 사람을 겪어보면 그가 좋은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진우는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애써 억누르고 있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자신은 죄인이고, 두 번 다시 그 사람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비참함과 서글픔이 밀려와 눈가가 뜨거워진다.
솟구치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며 돌아누우면 참았던 눈물이 긴 꼬리를 남기며 베개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주인이 부르잖아. 일할 시간 됐어.”
어깨를 건드리는 바람에 진우는 흠칫 놀라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수혁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몰두해버린다.
시선을 들자 눈발은 전보다 더욱 거세졌다.
날이 밝기 전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는데 눈이 많이 내려 힘든 길이 될 것 같다.
진우는 점퍼 안주머니에 든 무언가를 손으로 만져보고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큰소리로 주인아저씨께 말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
희연은 텅 빈 침대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짧은 정사를 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가 사라졌다.
밤이 깊고 밖엔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그는 아침까지 이곳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하지만 수혁이 말도 없이 가버렸다고 희연이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분노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금 전 희연은 벌거벗은 채 수혁에게 뜨겁게 안겼다.
오랜만에 그는 그녀를 원해주었고 희연은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희연은 텅 빈 침대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붉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 끝이 살 속을 파고들 정도였다.
“왜 아직도 그 천한 이름이 우리 주위를 맴도는 거지?”
어금니를 악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혐오감이 가득했다.
수혁이 아직도 이진우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자체가 기분 나빴다.
그토록 많은 돈과 공을 들여 철저히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수혁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이진우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수혁씨는 곧 나와 결혼할 사람이니까.”
식을 올리고 아이가 생기면 수혁의 마음도 자연스레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며 희연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수혁은 옷을 벗어던지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겁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아래서 그는 온 몸에 들러붙은 불쾌한 향수냄새를 몇 번이고 씻어냈다.
무기력함에 빠져 생각 없이 희연이 이끄는 대로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관계가 끝났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자기혐오와 괴로움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읊조린 진우의 이름. 그리고 깨달아버린 감정.
여자를 안으며 그를 상상하고, 땅 속 깊은 곳에 가둬둔 괴물처럼 애써 외면해 버렸던 진우에 대한 감정을 깨닫고 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섬뜩함마저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진우란 인간이 자신에게 특별하다는 건 인정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그가 곁에 있음으로 한없이 평안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감정은 너무 낯설어 두렵고 께름칙할 뿐이다.
영원히 봉인해 두고 외면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만큼 당혹스럽고 불안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웠다.
싸늘한 공기가 그의 체온을 차갑게 식혀간다.
눈을 감자 진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방에서 몇 번이나 그를 안고, 그의 품에서 잠들었었다.
살면서 그때만큼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적은 없었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따듯한 입술을 다정하게 포개면 달콤하고 행복한 감정에 물들었다.
피맺힌 한을 품고, 눈빛을 번뜩이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수혁의 삶에 진우는 진정한 위로였고, 휴식이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왜 그가 있던 그 때 빨리 깨닫지 못한 것일까.
그랬더라면 이렇게 쉽게 그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목 안쪽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응어리를 겨우 삼켜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런 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까짓 어린애 장난 같은 감정 하나로 무너지는 자신이 싫다.
사랑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을 한심하게 여기던 그였다.
진우를 향한 마음을 깨달았다 해서 지금 당장 달라질 것도 앞으로 변할 것도 없는 것이다.
어차피 진우는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굳이 찾을 생각도 없다.
그러니 그와의 인연은 끝이다.
수혁은 그렇게 시작도 해 보지 않은 감정을 자신의 마음에서 차갑게 잘라내 버렸다.
긴 밤이 지나고 수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아침을 맞았다.
간신히 잠이 든 새벽녘 기분 나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자 몸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만신창이였다.
피곤함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눈 안쪽에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잦은 수면제 복용 탓에 몸은 천근만근 늘어졌다.
커피를 내리며 무심결에 내다 본 바깥풍경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밤새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이 지붕이며 도로에 수북이 쌓인 것이다.
낭만적인 생각 따위 떠오를 기력도 없이 차가 막히겠다고 중얼거리며 쓰디쓴 커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잠시후, 수혁은 혼잡한 도로를 피하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아파트 현관을 지나려다 우편함에 낯선 봉투가 끼어있는 걸 발견했다.
우편물이라면 지난밤 들어오는 길에 모두 수거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늦은 밤사이 배달원이 왔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우편물은 우선 경비들이 수거해 비밀번호로 되어있는 현관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야 우편함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니 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누군가가 밤 사이 들어와 저 낯선 봉투를 넣고 갔을 것이다.
수혁은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발신자의 주소도 이름도 없는 봉투에는 수혁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는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는 그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속엔 10만 원 짜리 수표가 다섯 장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작은 쪽지 한 장.
-적지만 받아주세요.
한꺼번에 갚을 순 없지만 매달 조금씩 보내겠습니다.-
쪽지를 읽은 수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수표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변해갔다.
이름이 써 있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딴 걸 보내다니...”
그는 수표와 쪽지를 사정없이 구겨버렸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런 식으로 도망쳐 놓고는 이제와 이런 걸 보내는 진우의 의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것으로 자신이 정민철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양심에 찔려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수혁을 화나게 하는 것은 어딘가에 꽁꽁 숨은 채 몰래 이런 거나 갖다 놓는 진우의 태도였다.
이런 걸로 죄값을 치루려는 것인가? 그렇게 미안함을 덜면 스스로의 마음은 편해지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볼 수 없는 나는!!!....
분노로 가슴이 타들어갈 듯 고통스럽다.
이렇게 돈을 보내며 마음의 무거움을 서서히 덜어낼 수 있는 진우에 비해 수혁은 그가 보낸 돈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분명 가까이에 있을 텐데 볼 수도 만질수도 없다.
진우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이든 미안함이든 상관없다. 그의 마음에서 천수혁이란 이름의 무게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것이 수혁은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기억해야 한다, 죽을 때 까지 .. 아니, 죽어서도 이진우는 천수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그리움이 뒤엉켜 수혁은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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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들어서던 수혁은 누군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했지만 이내 그가 정상무라는 걸 알고는 구겼던 미간을 서서히 폈다.
“출근이 늦었군.”
“죄송합니다.”
수혁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자 정상무는 손수 탕비실로 가 커피를 가져왔다.
아침에 이미 진한 커피를 마신 후라 생각이 없었지만 직접 가져다 준 차를 거절할 순 없었다.
수혁은 내키지 않는 커피잔을 들고 입가에 슬쩍 대고 바로 내려놓았다.
“안색이 나빠.”
“괜찮습니다.”
수혁의 대답에 정상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인설 상무는 회사 내에 유일하게 남은 수혁의 아군이었다. 그나마도 수혁이 제자리를 잃고 중심에서 떠밀린 상태라 정상무 역시도 회사 내에서 위치가 애매해져 있었다.
“뭔가 계획이 있어서 그러고 있는 건가? 나야 제발 그렇길 바라고 있지만”
“...훗.. 글쎄요.”
수혁은 무기력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답지 않군. 눈에서 독기가 빠졌어. 왜 그런 거지? 뭐가 자네를 이토록 맥 빠지게 만들었지?”
“... 그런거.. 없습니다.”
“그들과 뭔가 뒷거래가 있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나름대로 자네가 뭔가 계획한 게 있을 거라 생각했었네. 그게 바로 천수혁이니까.”
정인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무라듯 그를 쏘아보았다.
“상무님. 모르겠습니다. 전 지금...”
“그만. 우는 소리라면 집어치워. 어서 내가 아는 천수혁으로 돌아오게.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청해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걸 멍청하게 보고 있어야 할 지도 몰라.”
순간 수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네가 술과 수면제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부사장 쪽을 쭉 조사하고 있었지.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 지금은 어느 기업이든 내수에 기실을 다져야 할 때야. 그런데 부사장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더군. 대규모 해외 리조트 사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할 계획을 하고 있어.”
“그런 기획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으니까. 나도 겨우 알아낸 정보야. 부사장 쪽에서 비밀리에 기획팀을 구성하고 운영해 왔더군. 최근엔 여기저기 은행에서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는 모양이야.”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무모한 프로젝트를!!”
“그러니까 정신 차리란 말일세. 자네가 이렇게 흐릿한 얼굴로 허송세월할 때가 아니야!”
수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인설 상무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그야말로 위기상황이었다.
얼마 전 지방도로 정비사업의 수주를 따낼 때도 그들은 무모한 자금을 쏟아 부어 로비를 벌였었다. 이젠 그도 모자라 위험성 높은 해외 리조트 사업에 뛰어 들었다.
기간이 짧은 만큼 사전준비나 시장성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성공한다면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하면 회사 전체가 흔들린다.
정상무가 나간 후 수혁은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급히 약을 찾아 물도 없이 삼켰다.
두통은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는 정인설이 남기고 간 리조트 사업 관련 기밀서류들을 하나 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자료를 천천히 읽어내리면서 수혁은 부사장과 천이사가 왜 그토록 자신의 결혼을 추진하려 안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리조트 사업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다. 제1금융권인 은행에서의 자금조달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제2금융과 고이자의 대부업체까지 끌어들였다.
그래도 예산에 차질이 생기자 그들은 모자란 금액을 유회장의 기업에서 끌어올 계획을 세운 것이다.
수혁이 희연과 결혼을 하고 두 집안이 사돈을 맺으면 그만큼 그쪽 자본을 빨리 유입시킬 수 있다.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사업을 계획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동안 까맣게 모를 수 있었는지 자신의 아둔함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아무리 머리를 박으며 어리석음을 자책해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사업으로 청해그룹을 세계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다는 부푼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하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도박보다 더 확률이 낮은 미비한 성공률에 모든 걸 걸고 달려들기엔 청해는 아직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만약 한 번이라도 은행의 어음만기일을 놓친다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기한이 지날 것이고 도산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은 마치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무리한 길을 가기 전에 여기서 멈추고 돌아와야 한다.
은행권 대출을 정리하고 건전하지 못한 거래는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로 돌던 자금을 돌려 계열사들의 내실을 다지고 탄탄한 기업구조를 만들어야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멍청한 것들!”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아예 무시하고 도박하듯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그들의 행태가 가소롭기 그지없다.
“억지로 빼앗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청해를 말아 먹으려고 하는군!”
분노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대로 청해그룹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조바심에 좀체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기랄!!!”
수혁은 크게 욕을 내뱉고는 들고 있던 자료를 던져버렸다.
뭐라도 해야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무한에게 찾아가 당장 이 사업을 중지하라고 말해봤자 코웃음이나 칠 게 뻔했다.
과욕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입바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크윽!...”
괴로움에 몸을 웅크린 채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한참을 있자 가슴이 옥죄듯 답답해진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자 주변이 온통 안개에 싸인 듯 뿌옇게 변했다.
그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며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수혁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 힘없는 미소가 걸린다.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용서해주지...”
실체 없는 환영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주변은 안개로 뒤덮였다.
+++
정상무의 방문 이후 수혁은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밤이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던 술도 끊고 잠시 뜸하던 일에도 전보다 더 매진했다.
그와 동시에 천이사와 부사장이 몰래 추진하던 해외리조트 사업안을 공론화 해 임원들과 전 계열사에 유포했다.
물론 수혁은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정상무가 대신 총대를 메고 중심에 섰다.
당연히 회사는 발칵 뒤집어졌다.
반대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천이사의 로비가 있었는지 의외로 찬성하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일단 지금 현 상황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건 부사장 쪽이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다수가 그쪽으로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부사장측이 유회장에게서 부족한 자금을 끌어오지 못했다는 거였다.
유회장은 치밀한 사람이니 결혼이란 끈끈한 결합이 없이는 좀처럼 자금을 대지 않을 것이다.
수혁은 여차할 경우 그걸 빌미로 결혼을 파기해 자금을 끊는 걸로 해외 리조트 사업안을 무산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려운 것이 부사장쪽이 언제든 수혁의 약점을 들어 결혼을 협박할 지 모르기 때문에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다행히도 조심성 많은 유회장이 결혼을 서두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뀌어 식을 올리자고 할 지 모른다.
일단 두 집안이 결합하면 자금의 이동은 당연한 결과였고 부사장은 주저없이 모든 예산을 투자해 해외사업을 추진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수혁은 나름대로 이 결혼을 깨뜨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다만 성과는 미비했다.
“아빠 생각을 알 수가 없어. 대체 왜 우리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거지? 난 내일이라도 함께 살고 싶단 말야.”
눈치도 없이 주말 아침부터 수혁의 집으로 쳐들어온 희연은 마치 제 집 마냥 거실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 그냥 오늘부터 여기서 살까? 결혼 안 시켜주면 동거하면 되잖아.”
철딱서니 없는 여자의 막무가내 애교에 수혁은 지친 듯 빈속에 두 잔째 커피를 들이부었다.
바깥 날씨는 여전히 사나웠다.
며칠째 이어진 한파와 틈틈이 내린 눈이 얼어붙어 도로도, 골목길도 모두 빙판이었다.
사람들은 살을 에는 바람을 피하려 두꺼운 옷으로 온 몸을 감싼 채 잔뜩 웅크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오늘도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흐리고 스산한 바람이 뿌연 구름을 빠르게 이동시킨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다가온 희연이 수혁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등에 살며시 뺨을 기댄다.
“당신 뒷모습 정말 근사한 거 알아요?”
희연은 수혁의 곧게 뻗은 등과 허리라인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여자의 손길이 애무하듯 스쳐도 수혁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듯 유리창 너머 쓸쓸한 바람이 부는 먼 어딘가로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 교외로 드라이브 갈까요?”
희연의 제안에 수혁은 내키지 않는 듯 피곤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나가요. 응? 아니면 나 주말 내내 여기있을거야.”
이틀 연속으로 희연에게 시달리기 보다 오늘 하루 봉사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고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더 이득일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외투를 입고 함께 차에 올라 아파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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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휴게실 문을 나서던 진우는 반대로 들어오던 가게 직원과 부딪치고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제 거의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팔의 상처는 이렇게 문뜩문뜩 쩌릿한 아픔을 주고는 한다.
“다 나은 거 아니었어?”
부딪혔던 직원이 눈썹을 찌푸리며 묻자 진우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괜찮아. 그냥 가끔 아플 때가 있어서...”
잊으려 애쓰다가도 이렇게 한번씩 통증이 느껴질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뭐하고 있어? 얼른 나가봐. 이제부턴 내 휴식시간이야.”
“아, 미안..”
진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던 우울한 기억을 재빨리 한 쪽으로 치우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눈이 자주오고 길이 미끄러운 탓인지 요즘엔 주유소에 손님이 뜸했다.
주중엔 야간근무를 서지만 주말에는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근무를 해야 했다.
숙소에서 공짜 잠을 자는 처지이니 주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주말 24시간 근무를 하는 것이다.
몸은 피곤하고, 추운 날씨에 감기기운이 있었지만 진우는 싫은 내색 없이 일을 했다.
늦은 오후가 되며 잠잠했던 하늘에서 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젠 너무 자주 봐서 눈이라면 지겨울 지경이었다.
주유소 마당에 쌓인 눈을 끝없이 쓸어내야 했고, 간혹 주유하러 온 차량 유리에 낀 얼음까지 제거해 줘야 했다.
바람은 너무 차가웠고, 손과 발 끝에 감각은 이미 예전에 없어졌다.
짧은 휴식시간을 이용해 몸을 녹였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주유하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져 쉽사리 시간이 나지도 않았다.
날이 어둡고 밤이 되자 진우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들락 말락 하던 감기도 기어이 걸리고 말았다.
기침이 계속 쏟아지고, 이마가 뜨거웠다.
주인아저씨는 진우의 상태를 보고 다행히 야간근무는 빼 주셨다.
대신 자정까지는 보충 인력이 없어 일을 해야 했다.
밤이 되자 눈은 그쳐지만 기온은 더욱 내려갔다.
두꺼운 점퍼로 무장했지만 마치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 춥기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온 몸의 열기가 머리로 몰리는 듯 이마에선 열이 끓었다.
숙소에 감기약이 있던가? 잠시 생각해 보다 그런게 있을리 없지라고 체념한다.
그냥 따뜻한 방에서 이불이나 푹 쓰고 한숨 자면 괜찮겠지 스스로를 위로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주유소를 찾는 차들의 수도 줄었다.
이만 끝내고 들어가 볼까 하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데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주유소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진우는 급히 차가 멈춘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운전석 쪽으로 달려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카드를 내밀던 운전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진우는 그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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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모두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세요!!!!!!!!!!!!!!!!!!!!!!!!!!
첫댓글 우와..첫 뎃글 이에요 ~!! 마지막 감동 의 물결 ~~~~~ 제 예상이 맞다면 좋을거 같아요 !!! 저 몇분 전에 데코님께 쪽지 보냇는데 통했나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글 올리자마자 쪽지 보고 저도 깜짝! ^^ 답장했는데 보셨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럴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 성탄절 즐겁게 보내세요~
어휴 작가님 센스!! 크리스마스 선물인가요?? 매일 눈 빠져라 기다린 끝에 큰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ㅋ.ㅋ 어쨌거나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넘 기뻐요 ㅠㅠ 다음편 궁금해서 미칠지경이네요 ㅋㅋㅋ 작가님 메리크리스마스~
감사해요~ 소녀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제 글이 선물이 되셨다니 기뻐요.
드디어!!! 만난거죠 ㅠㅠ 어떻게 어떻게..! [저 윗쪽에.. 글세요→글쎄요]ㅎㅎ 데코님도 메리크리스마스!! 성탄절 잘 보내세요^^
아..하...하..;; 오타 죄송해요^^;; 항상 확인을 한다고 하는데도 꼭 한두개가 발견되서 민망해요. 감사합니다아!! 해피크리스마스~
아..... 이럴수가 중요할때..... 작가님... 제발 빨리 올려주세요... 매일 기다리는 맘좀 알아주셨으면 너무 궁금해요ㅜㅜ
크리스마스 잘보내시구요.. 진우처럼 감기 걸리지 마시구요.... 행복한 하루되세요
중요할 때 끝내야 담편도 봐주시죠. ㅜ^ㅜ 매번 너무 늦어져서 진짜 죄송해요. 좀 더 시동을 걸고 열심히 써볼게요! 메리크리스마스~
꺅꺅꺅꺅 수혁이랑 진우가 다시 만나는군요
ㅠㅠ 크리스마스 이브 선물로 이렇게 깜짝 선물을!! 게다가 분량도 빵빵하군요!! 크리스마스가 데코님때문에 더 행복해지는것 같습니다 ㅜㅜ 그런데 이런 중요한 곳에서 데코님의 절단 신공을 보여주시다니 ㅠㅠㅠ... 아휴 다음편이 궁금하기만 하네요 ㅋㅋ 데코님 그럼 주말 연휴 즐겁게 보내시구요 다음 편 빨리 올려주세요 ㅎㅎ
우와 이렇게 만나다니!! 다음편 너무 궁금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