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03.03. -
문득 봄이 문 앞에 와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의 전령들이 도착했다. 봄이 오려면 폭설을 이겨 낸 바람이 필요하다. 눈과 입이 틀어막힌 채 “썩은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봄을, 바람이 달려가 “흔들어 깨”운다. 그리하여 “눈 부비며” 기어이 봄은 온다. 풀들을 일으키며 온다. 강물을 깨우며 온다. 지쳐 쓰러진 그림자들을 업고 얼어붙은 문들을 하나씩 열어젖히며 온다.
이성부의 시집 <우리들의 양식>에 수록된 이 시는 1974년에 나왔지만, 지금 우리들의 염원을 대신 노래한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벨라루스의 시인 얀카 쿠팔라의 시 ‘그래도 봄은 온다’가 떠오른다. 두 편의 시가 서로에게 말을 건다. 당신 나라도 우리의 슬픔과 다르지 않군요. 슬픔이 봄을 만들었군요. 그러니까 눈부신 봄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군요.
사방에서 배반의 먹구름이
하늘을 채워도 겁내지 마라
어둠이 마법을 걸고
휴경지 위에 까마귀가 원을 그리듯 날아도
그래도 봄은 온다
숲 구석구석 노랑 잎사귀가
떨어져도 겁내지 마라
하루 내내 새 노래가 들리지 않아도
겁쟁이 토끼만이 스쳐도
그래도 봄은 온다
초라한 밭 끝에서 끝까지
텅 비었어도 겁내지 마라
농민의 손은 운이 없어
별 수확 없이 밭매기를 끝냈어도
그래도 봄은 온다
자유로운 힘이 끈으로 묶여
잠들어 있어도 겁내지 마라
폭력이 진실을 억눌러도
죽음이 여기저기서 무덤을 파고 있어도
그래도 봄은 온다
그래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