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280장 (구 338장) / 사도행전 9 : 1 - 19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280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9장 1절 – 19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모든 시대를 살아간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을 뽑는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천거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주저 없이 바울 사도를 천거할 것입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불신자이었다가 신앙인이 되는 장면에서 그의 회심은 가장 대표적인 상징성을 갖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없는 분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사건을 가르쳐 기독교 신학에서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회심을 급진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급진적 회심의 대표로는 바울을, 점진적 회심의 대표 유형으로는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에도 ‘바울 형 회심’ 을 한 사람들이 있고 ‘디모데 형 회심’ 을 한 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 자라면서 점진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받아드린 경우를 우리는 ‘디모데 형’ 이라 할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믿게 된 경우를 ‘바울 형’ 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된 경우에도 그 체험은 꼭 같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동반된 바울의 체험들을 열거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인 사건, 그가 땅에 엎드려 지면서 들었던 음성, 그런데 그 소리를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한 일, 그리고 그가 땅에서 일어나며 발견한 실명의 경험 등등, 그러나 과연 이런 체험들이 동일하게 있어야 누군가의 회심이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회심 사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회심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 회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본문의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는 그에게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먼저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은 그 빛 가운데 엎드려져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던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면 회심도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초청의 단어가 ‘오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아멘! 그러므로 “주 예수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고, 문을 두드리면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있는 모습 그대로 오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회심의 첫 단계입니다.
회심 사건의 두 번째 본질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또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치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오늘 본문의 바울도 거룩한 빛에 둘러싸여 땅에 엎드려지며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는 순간 이미 성령은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가 만나고 있는 분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의 전도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러야 구원받음을 전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이 고백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가 통치하는 모든 곳에서는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나면 인사가 “로마황제 가이사가 나의 주님이십니다.”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인사를 받습니다.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로마황제 가이사이십니다.” 그런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황제 가이사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는 인사를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이 인사, 이 고백 때문에 신실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고발되고 체포되었고 원형 경기장 같은 곳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주가 되셨다면 회심한 것입니다.
회심 사건의 세 번째 본질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바울이 다음으로 보인 반응이 사도행전 22장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저는 진실하게 예수를 주로 받아드린 모든 이에게서 반드시 있어야 할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이제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부터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이 있는 사람의 회심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된 바울의 변화를 한 성경학자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왔다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제거하러 왔다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이었다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박해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변화입니까? 이 한사람 바울을 통해 이제 복음은 시리아로, 소아시아 터키를 넘어 로마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과연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고백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마지막 요소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참으로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변화의 흔적,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니면서 무신론자 친구의 영향으로 이신론자가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과정 대학을 3년에 졸업하고 졸업 여행을 떠났다가 시골 여인숙에서 옆방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 그 옆방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대학 시절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어린 시절에 찬양하던 예수님 앞에 돌아옵니다. 회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처럼 즉각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 그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방금 결혼한 신부와 데리고, 미국이 버마로 파송한 최초의 침례교회 선교사로 떠납니다. 그가 바로 아도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이라는 버마 선교사입니다. 그가 죽은 후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던 버마에는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한 가족이 그리고 한 공동체가 한 민족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 이제부터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주님께 묻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