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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銀杏)
勿怨歲月急(물원세월급)-세월이 빠르다고 원망하지 말라.
往來卽天行(왕래즉천행)-오고 가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
但立杏木下(단입행목하)-은행나무 아래에 서 있기만 해라.
毋問學人生(무문학인생)-묻지 않아도 인생을 배우게 되나니
고자가 된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수령이 500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위의 사진이 전등사 앞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한 은행나무는 노승(老僧)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자승(童子僧)나무로 불린다.
그리고 암컷 은행나무, 수컷 은행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반드시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지금 사진에 보이는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은행나무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제25대 철종 왕 때의 이야기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등사 은행나무의 은행열매를 매년 20가마니를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수흭하는 열매는 기껏해야 10가마 밖에 따지를 못하는데 20가마를 요구하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인근에 있는 다른 은행나무에서 따다가 20가마를 맞추는 길밖에 없었다.
20가마니를 바치라는 강화도 관리의 독촉과 압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전등사 스님들은 이 고초를 노스님께 하소연하였다.
스님, 10가마 밖에 안 열리는 은행을 20가마를 바치라고 하는데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 정말로 난감한 일이로다.
그러나 은행을 많이 받치라고 한 대해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느니라
참고 어떻게 해서라도 은행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느냐--
노스님은 말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뾰족한 생각이 없어 고민에 빠졌다.
은행 20가마를 마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청의 지시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불교를 탄압 할 것이 분명하였다.
고민 끝에 지금의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백련사에 있는 추송스님에 사정을 의논하게 되었다. 추송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난 스님이었다.
며칠 후 추송스님이 전등사에 왔다.
절 안이나 절 아래동네에서는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열매가 두 배나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추송스님의 3일기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강화도 관청 관리도 끼여 있었다.
“어떤 기도를 하기에 은행이 두 배나 열리게 할까”
“아니야, 추송스님이 제아무리 도력이 높다해도 두 배는 어림도 없지”
사람마다 궁금증은 더하여 갔다.
3일이 지나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때 갑자기 추송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든 관리의 눈이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그때 추송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지금부터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무서움에 질려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전등사의 어려운 사정을 구제하기 위해 신선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부부은행이 마주보고 정(情)을 나누니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신선이 수컷은행나무의 불알을 제거하여 수정(受精)을 못하게 했기 때문에 열매를 못 맺는다고 믿고 있다.
서울시내 방학동에 8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도 약 1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정도로 수억 년을 살아오는 생존력이 있다.
심은 후 손자 대에 가서야 열매를 맺는다 하여 “공손수(公孫樹)”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처럼 생명력이 길고 공해를 흡수하는 능력 있는 나무라 하여
서울시에서 가로수로 대체하는 계획을 세운다는 보도가 있다.
다만 은행열매의 냄새가 지독하기 때문에 열매가 열지 않는
“홀애비 은행”을 심는다고 한다.
이래저래 은행나무의 팔자는 홀애비 사주를 타고 낫는지 모른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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