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년 만에 배달된 사진
왼쪽은 한양대 교수를 역임한 전성우, 가운데는 경북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윤영국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4년 윤영국 군의 자택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 어제야 도착했다. -
1980년 12월 17일, 미국에 살고 있는 남궁요안나는 북한에 살고 있을 남편 정현웅의 옛 동료 홍기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남편 명의로 편지를 보내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을 듯해서였다. 요안나의 부탁을 받고 편지를 대신 써준 사람은 아들 정유석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홍기문 선생님 귀하’
겉봉에는 주소도 없이 수신자 이름만 적었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편지가 전달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기문은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인물로 「리조실록」을 국역한 북한 최고의 문장가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1950년 9월에 월북한 정현웅의 장남으로서 현재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생사 여부라도 좀 알려주셨으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문장은 짧았지만 사연은 간곡했다.
홍기문과 요안나의 남편 정현웅은 왜정시대 때 조선일보 기자로 함께 근무한 막역한 사이였다. 정현웅은 당대 최고의 신문 삽화가였다. 정현웅이 홍기문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인 벽초 홍명희를 통해서였다. 홍명희는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왜정시대 조선문단의 3대 문인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홍명희는 조선일보에 대하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정현웅이 그 소설에 삽화를 그리면서 알게 되어 해마다 대선배인 홍명희의 집으로 세배를 다녔었다. 그러다가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년배인 정현웅과 친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명희는 1948년 월북하여 내각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었다. 홍기문은 부친과 함께 월북했고, 정현웅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9월에 월북했다.
북한으로부터 답장이 온 것은 편지를 보낸 지 넉 달 뒤인 1981년 4월이었다. 발신인은 정현웅의 부인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궁연이었다. 남궁연은 문예봉‧황철과 함께 왜정시대를 주름잡던 3대 명배우였다. 남궁연은 6‧25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도 인민배우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녀는 남한에 처자식을 두고 단신 월북한 정현웅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정현웅은 여러 고분 발굴에 참여하여 고구려 고분벽화 보존에 심혈을 기울인 공로로 미술가동맹 분과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76년 폐암으로 죽었다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던 요안나는 남편이 북에서도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게 어쩐지 우연만은 아닌 듯하여 가슴이 찡했다.
홀몸으로 네 자녀를 키우며 오매불망 남편을 그리던 요안나, 그녀는 남편의 마지막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맏아들 정유석도 흔쾌히 동의했다. 1990년 4월, 요안나와 장남 정유석은 미국 LA에서 북경까지 간 뒤 거기서 북한의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내렸다.
“왜 이제야 오셨소?”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남궁연은 초대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온 ‘형님’ 요안나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가 유석이로구나.”
남궁연은 동행한 맏아들 정유석도 반갑게 맞아주면서, 정현웅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남쪽에 두고 온 유석‧지석‧이석‧현애 4남매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애틋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생활은 곤궁하여 이역만리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 머무는 동안 사용할 침대를 마련하기 위해 귀하디귀한 ‘냉동고(남한의 냉장고)’를 팔아야 했다. 음식은 정갈하면서도 푸짐했다. 남궁연은 죽은 남편을 ‘영감님’이라고 지칭했다.
이튿날부터 ‘아랫동서’ 남궁연은 정현웅의 업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를 구석구석 안내하며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멀리서 온 반가운 손님에 대한 대접도 극진했다. 평양 시내는 물론 멀리 떨어진 곳까지 골고루 둘러보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면, 요안나는 남편과 얽힌 지난날의 추억을 반추하곤 했다. 이화여전 피아노과에 다니던 요안나는 아동문학가 조풍연의 소개로 정현웅을 만나는 순간 첫눈에 뿅 가버렸다. 사귄 지 두 달 만에 정현웅이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아버지 남궁혁도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남궁혁은 조선일보 주필인 죽마고우 이훈구를 통해 정현웅이 신실한 청년이라는 보장을 받고 미리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것이다. 요안나와 정현웅은 처음 만난 지 6개월 만에 평양에서 ‘신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정현웅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대놓고 자녀들을 사랑했다. 아이들도 ‘아빠, 아빠’ 하며 반말로 응석을 부리는 등 그 시절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父子有親’ 했다. 정현웅은 퇴근할 때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찬거리나 군것질 감을 사왔다. 남궁연은 남편을 매우 과묵하고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회상했는데, 서울에서 살 때의 남편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라 얘기를 듣는 요안나를 짠하게 했다. 서울에서의 정현웅은 저녁상을 물리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자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곤 했었다. 매일 얘기를 듣다보니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조선일보 직원들의 이름과 직책은 물론 성품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이 어떻게 처자식을 두고 월북할 수 있었는지, 그리하여 그 죄책감에 성격까지 과묵하게 변했는지, 요안나는 평양에 머무는 내내 그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요안나는 평양조선미술박물관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경험을 했다. 남편의 그림 <누구 키가 더 큰가> 앞에서였다. 그 그림은 당초 조선일보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소년」에 실린 윤석중의 시 <키 대보기>※에 그려 넣었던 삽화였다. 북한에서도 각종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그리던 정현웅은, 1963년 삽화로서가 아니라 수채화 작품으로 그 그림을 재현해냈던 것이다. 남한에 두고 온 아이들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요안나는 박물관 측의 양해를 얻어 남편의 그림 <누구 키가 더 큰가>를 촬영해 왔다. 서울로 돌아온 뒤 사진을 보여주자 윤석중도 첫눈에 그림을 알아보고 ‘예술의 환생!’이라며 크게 놀라워했다.
※ 키 대보기
윤석중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번 대보자.
올라서면 안 된다.
발을 들면 안 된다.
똑 같구나 똑 같애
내일 다시 대보자.
남궁연은 남편의 절친 이원조 얘기도 들려주었다. 1955년에 숙청당하여 옥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이원조는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으로 왜정시대 때는 형보다 더 유명했었다. 왜국의 동경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한 이원조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구 문학을 소개하는 평론가로 활동했다. 시와 소설 부문에도 조예가 있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형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동생 이원창이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근무하여 ‘3형제 기자’로 불렸다. 좌파 성향이 강했던 이원조는 해방과 함께 박헌영을 따라 월북하여 기자로 활약했다. 6‧25전쟁 때는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국장 자격으로 인민군과 함께 남하하여 승전보를 쓰기도 했다. 평양에서도 조선일보의 옛 동지 정현웅과 매우 친하게 지내며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박헌영이 숙청되면서 함께 제거되고 말았던 것이다.
감회 어린 평양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남궁요안나는 2003년 영구 귀국하여 현재는 분당에서 둘째아들인 한미약품 부회장 정지석과 함께 살고 있다. 1915년생이니 우리나이로 올해 102살인데, 생이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애틋해서인지 상굿도 정정하게 지내고 있다.
첫댓글 담긴 사연들이 참 좋네.
반세기 전의 사진을 받아보는 사연도, 남궁요안나의 사연도...
내 가슴에 따뜻하게 담기네.
모처럼의 글,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