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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이 글은 페이스북에 있는 팔로워 '석현장'님의 게시글에서 가져왔습니다.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미군이 행사하게 되었을까?
6.25전쟁의 2대 패전과 한국사 3대 패전을 이끈 주인공 유재흥과 현리전투 이야기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에게 패전의 역사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 중에 6.25때 왜 연합군이 북한지역에서 중공군에게 쫒겨 내려왔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6.25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가른 두개의 큰 전투가 있다.
하나는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고,
또 다른 전투가 바로 '청천강전투'(1950. 11.)이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의 주력인 워커 장군의 미 8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연합군을 휴전선 이남으로 후퇴시킨 1.4후퇴이다.
그런데, 청천강전투의 결정적인 패인이 한국군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연합군은 1950년 10월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을 신의주까지 몰아낸다.
이 때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 신의주 아래 온정리라는 곳에서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 선으로 물리게 하고 전선을 재구축한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청천강 서부 지역에는 한국군 1사단, 미군 24사단, 제1기갑사단 등을 배치하고,
천청강 상류인 덕천군, 영원군에는 한국군 제2군단을 배치한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위와 같은 병력배치를 파악하고, 전혀 주저함이 없이 1950. 11. 24. 한국군이 방
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과 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으로 공격을 지시한다.
팽덕회는 참전 이래 한국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했고, 주로 한국군 방어지역을 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7사단 및 8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었다.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심지어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비사단인 6사단을 이끌고 있던 한국군 2군단장 유재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의 예하사단인 7, 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짐에 따라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워커 중장은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소식을 접하고,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를 지시하게 되는데,
퇴각을 명할 시점에 이미 중공군 38사단이 미군의 퇴로 차단에 나서게 된다.
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 확보에 나섰고, 터키군이 용감하게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미군은 겨우 평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1950. 12. 23.에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전선을 형성하였다.
중공군의 1951 설날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1951년 봄에는 휴전선 인근 지역까지 전선을 밀어 올린다.
이 과정에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보병 3사단, 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지역에 배치한다.
1951 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지역 공격을 선택한다.
1951. 5. 16.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지역인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차단한 후 공세를 시작함으로서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유재흥 3군단장이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부하들은 남겨 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휘자를 잃은 3군단은 우왕좌왕하며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개죽음을 당하였고,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이렇게 잡힌 국군 포로 중에, 그 유명한 '조창호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창호 소위는 탈북하여 돌아 온 후
지속적으로 그 때까지 살아 있던 당시 3군단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3군단장 유재흥은 끝끝내 조창호 소위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으로 상륙하여 연대장, 사단장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백전노장 밴 플리트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에게 연락하여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및 지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으니,
지휘권을 연합군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이 '장군의 요구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내게 되는데,
이게 요즘 문제되는 '작전통제권 이양'이다.
그때 이후 한국군은 자기 부대를 통솔할 뿐, 작전도 지휘권도 없는 군대로 추락하였다.
한국전의 분수령이 된 위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한국군 2군단장과 현리전투에서 도망친 한국군 제3군단장이
'동일한' 인물 바로, '유재흥' 중장이다.
유재흥 중장은 이렇게 한국 전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패전 2건의 주역이 되었다.
현리전투 패전이후, 밴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에 나눈 전설같은 대화내용이다.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다른 보직을 알아 보시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짓을 했는데도, 유재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는 커녕, 이승만 밑에서 참모총장 대리까지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런데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유재흥은 일본군 장교 유승렬의 아들이었고, 유승열은 아들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하여 한국말 사용을 금지하였다.
유재흥은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 물론 유재흥도 일본 육사 출신이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장성 7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다.
즉, 자신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앗긴 작전통제권의 환수를 본인이 스스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치욕적인 참패로 기록될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당시 오미재 방어선은 인제 현리 홍천 정선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3군단의 후방보급로였다.
중공군 은 공세 하룻만에 오미재를 수중에 넣었다.중공군 1개중대가 이룬 성과였다.
퇴로가 끊겼다는 공포감에 사로 잡힌 3군단 병력은 5월 17일 날이 어두워지면서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3사단 소속 상등병으로 현리전투에 참여한 박한진씨의 증언이다.
"지휘부가 먼저 도주하자 지휘체계를 잃은 병력은 중대 소대 단위에서 10명규모로 뿔뿔이 흩어졌고
무기와 소총을 버린 병사도 부지기수였다.일부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달아났다.
낙오된 국군 상당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희생되고 포로로 잡혀 북한군으로 재투입돼
아군에게 총뿌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었다. 배고픔과 탈진으로 죽어간 전우도 태반이었다."고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흘간 70키로를 도망친 3군단 병력은 5월 19일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평창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하였다.
집결된 잔유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현리전투에 참패한 3군단은 미 제8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그해 5월 26일 전격 해체되었다.
유재흥 중장은 자신이 맡고 있던 2군단 60%전멸에 이어 3군단 해체라는 치욕을 겪었으나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1957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낸뒤 4.19혁명으로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5.16 군사쿠테타 성공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태국.스웨덴.이태리 대사를 지낸다.
그리고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다.퇴임후에도 대한석유공사 사장.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성우회 회장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재흥 장군의 일본육사 3년후배이다.
일본 육사 3년선배인 유재흥을 깍듯이 모신 것이다.
유재흥은 2011년 사망하였고,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외교및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여 국가에 헌신한 유재흥 중장은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 5회 수교훈장 2회등 수많은 훈포장을 국내외로 부터 수여 받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자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국방부산하 전쟁기념관에 있는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에 대한 기록이다.
6.25 양대 패전의 주인공이며 한국사 3대 패전의 하나로 꼽는 현리전투의 주인공이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있다.
한국은 정말 놀라운 나라이다.
한국사 3대 패전으로 꼽는 현리전투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정리하여 편집한 내용이다.
사진 1번 6.25 전쟁 영웅? 유재흥
사진 2번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국군의 모습이다.
사진 3번 이승만과 함께한 유재흥 장군
사진 4번 이승만은 한국전쟁당시 전시작전권을 조약체결도 국회비준도 없이 미 극동군사령관에게 넘겼다
< 팩트첵크 >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미군에게 이양된 것은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부터이다.
작전통제권 이양 ㅡ대전 협정 (1950년 7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에게 밀리던 이승만 정부는 임시 수도였던 대전에서 결단을 내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도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서한을 보낸다.
"현재의 적대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이양한다"고 밝혔고,
맥아더 장군이 이를 수락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동의도 없이 조약체결도 없이 편지한장으로 전작권을 미군에게 넘긴것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대전 협정'이라고 부른다.
이후 작전권은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라 몇 차례 개정을 거쳤다.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 작전지휘권이라는 표현이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으로 수정되었으며,
유엔군 사령관이 이를 계속 행사하기로 합의했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유엔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던 작전통제권이
새롭게 창설된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겸임)에게로 넘어갔다.
3. 평시작전권의 환수 (1994년)
시간이 흘러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1994년 12월 1일 자로 대한민국 국군은 '평시' 작전통제권을 44년 만에 돌려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상시(평시) 군대 운용과 작전은 한국군 합참의장이 통제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는 '전시' 상황이 되면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한미연합사령관(미군 대장)이 행사하게 된다.
현재 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으로 완전히 환수하기 위한 기반 검증이 계속 진행 중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권을 넘긴 것은 1950년 7월 14일이다.
유재흥 장군이 겪은 참패들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청천강(덕천) 전투 (1950년 11월): 중공군의 제2차 공세 당시,
유재흥 장군이 이끌던 국군 제2군단이 덕천 지역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해 무참히 와해되었다.
이로 인해 미 제8군의 우측면이 완전히 노출되면서 유엔군 전체가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된다.
현리 전투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당시,
역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국군 제3군단이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후방 차단선이 끊기자 지휘부가 헬기를 타고 탈출한다.
군대 조직이 완전히 붕괴하며 퇴각한 참사이다.
특히 1951년 5월 현리 전투의 참패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장군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국군 제3군단의 무기력한 붕괴를 보고 한국군 지휘부의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이 패전 직후 리지웨이 장군은 유재흥 장군을 불러 강하게 질책한 뒤, 다음과 같은 전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국군 제3군단 해체
육군본부의 전방 작전지휘권 박탈 (한국 육군본부는 오직 행정 및 군수 지원만 맡게 함)
이 조치로 인해 한국군의 모든 전선 부대는 미군 군단(미 1군단, 미 9군단, 미 10군단 등)의
직접적인 지휘·통제 아래로 완전히 종속되었다.
유재흥 장군의 청천강·현리 전투 패배 때문에 작전권이 처음 넘어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군에게 "한국군은 아직 스스로 군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강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결과적으로 전쟁 중 한국군의 입지를 좁히고 미군 중심의 작전통제 체제를 수십 년간 고착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7월 14일, 임시 수도 대전에서 도쿄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서한의
영문 전문과 번역본이다. 이 서한은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하는 법적·정치적 근거가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영문 전문 (Original Text)
Dear General MacArthur:
In view of the joint military effort of the United Nations on behalf of the Republic of Korea, in which all military forces, land, sea and air, of all the United Nations fighting in or near Korea have been placed under your operational command, and in which you have been designated Supreme Commander Supreme Forces, United Nations, I am happy to assign to you command authority over all land, sea, and air forces of the Republic of Korea during the period of the continuation of the present state of hostilities, such command to be exercised by you personally or by such military commander or commanders to whom you may delegate the exercise of this authority within Korea or in adjacent seas.
The Korean Army will be proud to serve under your command, and the Korean people will be equally proud and encouraged by the presence of those gallant forces of the United Nations under your command, which have so bravely come to their aid against the Communist aggressors.
Kindly accept my warmest personal regards.
Sincerely yours,
Syngman Rhee
맥아더 장군 각하께,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 노력이 진행 중이며, 한국 내 또는 그 근해에서 전투 중인 모든 유엔 회원국의 육·해·공군이 각하의 작전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고, 각하께서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신 점을 고려하여, 본인은 현재의 적대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각하에게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지휘권은 각하께서 직접 행사하시거나, 각하께서 한국 또는 그 근해에서 이 권한의 행사를 위임하신 군 사령관들을 통해 행사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각하의 지휘 하에 복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며, 공산 침략자에 맞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용감히 달려온 각하의 지휘 하의 용맹한 유엔군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민국 국민 역시 자랑스러워하고 큰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본인의 가장 따뜻한 개인적 안부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승만
사진은 이승만과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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