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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세계 축구계에서도 뚜렷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웽거 감독이지만 아스날의 지휘봉을 잡기 전만 해도 그는 일본 J 리그의 나고야 그람퍼스의 감독에 불과했다. 물론 오랫동안 지휘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며 괄목한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말이다. 특히 AS 모나코 시절에는 리그 우승과 컵, 그리고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J 리그에서도 올해의 감독상을 비롯하여 나고야를 일본 FA컵과 슈퍼컵의 정상에 올려 놓으며 지도력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소위 말하는 빅리그에서 일궈낸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대단히 약했다. 그래서 당시 아스날의 선택은 만인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전에 오랫동안 팀을 이끌었던 조지 그레햄 감독에 비하면 상당히 네임 밸류가 낮았던 웽거 감독이었다.
96년 9월에 아스날에 합류한 웽거는 기존의 선수들을 특유의 포용력으로 잘 감싸 안았고 동시에 여러 유망주들을 영입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시즌 시작부터 팀을 맡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96-97 시즌에 바로 우승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지난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한 맨체스터와 승점 차이가 무려 19점이나 나며 리그 5위에 머문 것에 비하면 뚜렷한 성적 상승을 이루어 냈다. 아스날은 이 해, 리그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2위 뉴캐슬과 4위 리버풀과 승점이 68점으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득실 차이로 순위가 결정되었던 바로 그 시즌이었다.
문제의 사건은 시즌의 막바지에 다다르던 4월에 벌어졌다.
97년 4월 19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는 승점 차이가 다소 있었지만 산술적으로는 여전히 우승 가능성을 남겨 놓고 있는 아스날이 강등 위기에 놓여 있는 블랙번을 홈에서 맞이 했다.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양팀 모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일전이었는데 그래도 급한 쪽은 목표 달성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블랙번이 더 절실한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선취골은 아스날이 먼저 기록했다. 전 잉글랜드 국가 대표 출신으로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냈던 스타 플레이어, 데이비드 플랫이 전반 18분, 골을 성공시키며 아스날이 앞서 나갔다. 베르캄프의 정확한 크로스를 키온이 헤딩슛으로 연결시켰으나 골 포스트를 맞고 나온 공을 플랫이 제차 슛을 날려 첫 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블랙번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승점 1점이라도 쟁취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블랙번으로 하여금 더욱 터프하게 맞서게 만들었다. 아스날 홈인 하이버리에서 열린 경기였지만 블랙번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투지 있는 플레이를 보여 주어 아스날은 결코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스날이 살어름 같은 리드를 지켜 오던 경기는 어느덧 종료 시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90분의 정규 시간은 모두 끝나고 인져리 타임이 시작될무렵, 아스날의 휴우즈가 블랙번의 쉐어우드의 거친 태클로 인해 넘어졌고 공은 다시 비에이라가 잡았으나 그는 휴우즈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보고 공을 라인 밖으로 걷어냈다. 휴우즈는 결국 들것에 실려 나갔고 경기는 다시 블랙번의 ‘스로우’로 재개된다. 아스날 선수들은 블랙번으로부터 공을 건내 받고 당연히 블랙번 선수들이 압박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일반적으로 자기 진영에서(자신의 골대보다는 중앙선에서 더 가까운 위치이긴 했다) 공을 받으면 상대 선수들은 중앙선까지 내려와 수비 형태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아스날도 그렇게 예상했지만 왠걸?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블랙번의 크리스 서튼(아래 ‘*필자주’ 참조)이 집요하게 공을 쫓아가면서 공을 소유하고 있던 윈터번을 압박, 아스날 진영 왼쪽 구석으로 몰아 넣었고 그 결과, 블랙번은 인져리 타임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코너킥을 얻는데 성공한다. 서튼의 그러한 행동은 하이버리의 관중들을 흥분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다. 여기저기서 야유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라운드 위에 있는 아스날 선수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흥분, 서튼 주위를 에워 싸며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 특히 비에이라와 서튼는 서로 밀치기를 교환하여 심판으로부터 옐로우 카드까지 받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내려진 코너킥 판정이 번복될 리 만무하다.
만약 그로 인해 주어진 코너킥이 승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않았다면 어쩌면 그 사건은 조용히 일단락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유명한 레전더리 4백이라 일컫는 철벽 아스날의 수비진들도 이미 평정심을 잃어버려 평소처럼 자신이 마크할 상대보다는 서튼과 신경전에만 열중하면서 결국 플릿크로프트에게 결정적인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갈랙커의 코너킥을 그가 하프 발리로 차셔 반대쪽 톱코너의 골네트를 가르고 만 것이다. 경기는 결국 1-1로 끝났는데 그날의 무승부로 인해 아스날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리그 우승 꿈이 마지막 인져리 타임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날라가 버리고 말았다.
열성적으로 응원을 보냈던 아스날 팬들은 일순간 망연자실해질수 밖에 없었고 정신을 차릴 무렵에는 집단적으로 야유를 보내며 경기장을 떠날 줄을 몰랐다. 아스날 선수들 역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려 퍼진 이후에도 서튼 곁으로 다가와 계속적으로 욕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까?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린 크리스 서튼의 행동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당시 무척이나 다급했던 블랙번의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서튼의 행동이 잘못된 것만은 분명하다. 축구 경기에서 그러한 매너를 지킨다는 것은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규정까지 만들며 지키기를 강요하지 않아도 선수로서는 꼭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영국에서 그 경기를 보았다. 열성적이라면 세계에서도 첫손으로 꼽히는 영국 축구팬들, 그것도 원정 경기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던 서튼, 솔직히 처음에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스날 팬들 눈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던 자체가 대단히 용기가 없으면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뒤에는 오히려 경외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 경기가 있은 이후, 잉글랜드 축구계는 적지 않은 난리가 났다. 아마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전된 상황이라면 더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팬들은 앞다투어 서튼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 됐고 언론, 축구 전문가들도 아스날팬들처럼 그렇게 강도는 높지 않았지만 분명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우회적으로 서튼의 잘못을 꼬집었다. 비록 축구라는 운동이 원래 과격한 면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신사의 나라(?), 영국 프로 축구에서 그것도 영국출신인 크리스 서튼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블랙번 팬들조차도 서튼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일방적으로 서튼에게만 잘못을 묻기가 힘든 이유도 물론 있다. 우선 전체적으로 경기를 되돌아 보면 경기 내용상, 이 상황까지 오지 않고 그전에 아스날이 승리를 확정 지었어야 마땅했던 경기였다. 전반전은 특히 아스날이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하였고 추가골 찬스도 적지 않게 만들어 냈지만 한골에 그치고 말았던 것은 아스날 스스로 빌미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즉, 최소한 2-0 이상을 이겨야 했던 경기에서 1골에 그친 아스날의 득점력이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게 한 시초였다. 물론 베르캄프의 감각적인 슈팅이 플라워 골키퍼의 선방에 막하는 등 전체적으로 골운도 뒤따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 1-0 리드를 하고 있는 팀이 후반 인져리 타임 때,무리하게 공격하는 팀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후방에서 무의미한 패스를 주고 받거나 하면서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는 아스날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 또한 ‘치사한 경기 운영’으로 충분히 매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튼이 아스날의 시간 끌기를 막기 위하여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변론도 가능하다.
어쩌면 서튼이 더 많은 비난을 받은 이유는 그 일에 있은 이후, 자신의 행동에는 전혀 잘못이 없다며 한마디의 사과조차도 거부한 모습이 더 큰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 서튼은분명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했으며 잘못이 없기 때문에 사과도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또한 조금은 지나친 비약인 듯 하지만 그 경기로 인해 아스날의 우승 희망이 다 날아갔다는 점도 서튼을 향한 아스날팬들의 비난을 더욱 부추긴 역할을 했다. (산술적으로 가능하다지만 당시 맨체스터의 전력을 고려할 때 사실상 아스날의 우승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 필자주
그렇다면 이 문제의 인물, 크리스 서튼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크리스 서튼이라는 이름은 잉글랜드 축구팬이라면 심심치 않게 들어왔던 이름일 것이다. 노르위치, 블랙번, 첼시를 거쳐 현재 스코틀랜드의 명문, 셀틱에 몸담고 있는 그는 블랙번에서 시어러와 함께 리그 우승을 일궈 낸 94-95 시즌의 뛰어난 활약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블랙번이 무려 81년만에 값진 우승을 차지했던 그 해, 시어러와 함께 이른 바, SAS 편대로 불리 우며 49골을 합작했던 스트라이커가 서튼이다.
서튼은 1973년 3월 10일 노팅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노르위치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보냈던 마이크 서튼이고 이러한 인연으로 1989년 연습생으로 노르위치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였다. 1990년 QPR 전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던 그는1992년 잉글랜드 U-21 대표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1994년 잉글랜드 U-21 대표팀의 주장까지 맡으며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는데 그의 뛰어난 활약상은 곧 빅클럽들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에게 처음 영입 의사를 나타낸 팀은 토튼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대단히 높은 가격인 400만 파운드를 제시했으나 노르위치가 거부로 무산, 하지만 결국 1994년 7월, 영국 이적료 기록인 500만 파운드에 블랙번으로 이적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적 첫해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어러와 함께 공격을 주도, 스타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 왔던 그였지만 1997년에 있은 ‘그 사건’으로 인해 그의 이미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만다. 사실 서튼의 선수 생활을 전체적으로 보면 디 카니오(?), 비니 존스처럼 악동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 틀림없다. 골 기록도 그 정도면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할 만한 뛰어난 득점력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선수들과 또 팬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을 시작으로 그에 대한 평판은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파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후에도 또 한번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마저 외면을 당하고 만다.
1997년에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의 뛰어난 득점력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있던 호들에게 있어서는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재능이었다. 더욱이 그는 대표팀 간판 스트라이커, 시어러와 환상적인 투톱으로 명성을 떨친 전례가 있는 선수가 아닌가! 그 결과 그는 1997년 11월에 있은 카메룬과 경기에서 첫 성인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98 월드컵을 앞두고 있은 칠레와의 평가전에서 그는 잉글랜드 B팀으로 뛰라는 호들 감독의 지시에 거부 의사를 뚜렷하게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어 명예 회복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는 칠레와 평가전을 가졌다. 특히 웸블리에서 열린 본 경기는 오웬의 성인 대표팀으로 첫 데뷔 무대였다는 점에서 언론의 남다른 주목을 받았던 경기(1998년 11월 2일에 있는 본 경기를 통해 오웬은 18살 59일로 20세기 들어서-19세기를 제외한- 최연소로 잉글랜드 대표팀 발탁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스피드는 큰 위력을 발휘,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루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지만 본 경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칠레의 살라스였다. 그는 약 20-30m의 롱패스를 한번의 트리핑으로 자신의 볼로 만든 후 이어서 곧바로 발리 슛으로 골을 성공시켜 탄성을 자아낸 바 있다. 경기는 살라스의 환상적인 골에 힘입어 칠레가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였다. 월드컵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가지는 평가전이라 경기 전부터 대표팀 명단에 많은 관심을 쏠렸고 서튼도 파울러, 세링햄, 디온 더블린 그리고 신성, 오웬과 함께 대표팀 합류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호들 감독은 서튼으로 하여금 대표팀 ‘B 매치’(통상 국가 대표간의 평가전, 월드컵, 유럽 선수권 대회 등을 위한 예선전 등을 가리켜 ‘A 매치’라 부른다는 것은 일반 축구팬들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즉 ‘A’라는 알파벳이 붙어 정예의 국가 대표 선수들 간의 경기를 의미하는데 ‘B 매치’라 하여 퍼스트 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퍼스트 팀 합류를 기대할 수 있는 선수들간의 경기가 진행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즉 2진들의 경기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B 매치’가 생소한 단어라 생각되는데 특히 큰 대회를 앞두고 더 많은 선수들을 테스트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B 매치’가 가지는 의의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A 매치가 열리는 바로 전날에, 같은 상대와 B 매치를 가진다-경기장은 물론 다르다-. B 매치인 만큼 언론의 관심도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고 또 국가 대표팀 경기 출전 횟수-일반적으로 말하는 “Cab” 수-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출전을 통고했다. 사우스햄튼이 배출한 불세출의 스타, 르 티시에(매튜 르 티시에 소개글 참조)도 B 매치 출전을 명 받아 출전한 바 있는데 하물며 서튼이 이 같은 명령을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의미 없는 B 매치 출전은 필요 없다라는 말이 서튼의 대답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또 다시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이 서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는 르 티시에는 B 매치에서도 해트 트릭을 기록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 더욱 비교되었다. 결국 르 티시에와 대비되면서 서튼에게 향한 비난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그로 인해 그는 사실상 대표팀 생활과 작별을 고하게 된다.
비록 97-98 시즌을 마이클 오웬과 스트라이커와 센터백이라는 상반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디온 더블린과 함께 리그 최다골을 기록한 선수로 시즌을 마감하긴 했지만 B 매치 거부 파문으로 인해 리그 공동 득점왕에 오르면서도 칭찬보다는 비난을 더 받게 되는 특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98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은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아스날 전에서 일으킨 그 문제로 아스날 선수들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그는 결국 98년 10월에 있은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비에이라의 발꿈치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다분히 보복성이 짙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키건 감독이 유로 2000 예선, 폴란드 전을 대비해 그를 다시 대표팀으로 차출하긴 했으나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고 또 블랙번이 강등 어려움이 놓였던 시즌에 마지막 6 경기를 사타구니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며 블랙번이 강등 당하는 것을 벤치에서 지켜 보기만 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그는 시즌이 종료된 이후, 팀에 이적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여름 그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찾아 온다. 바로 첼시로의 이적이 그것이다. 맨체스터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98-99 시즌, 맨체스터, 아스날과 함께 시즌 마지막까지 선두 경쟁을 벌이며 새로운 강호를 확실한 입지를 다진 첼시로의 이적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첼시는 무려 1000만 파운드라는 팀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까지 경신하며 그에게 큰 기대를 품었으나, 서튼이 첼시에서 남긴 기록은 참담하기만 했다. 리그, 컵 대회 등, 첼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총 39번의 경기에서 그가 기록한 골수는 단 3골… 즉 첼시는 1골에 무려 6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를 지불한 셈이었다. 이로 인해 당초부터 그의 영입을 그리 탐탁지 않았던 대부분의 첼시 팬들은 당사자, 서튼뿐만 아니라 그의 영입을 주도한 비알리 감독까지 싸잡아 많은 비판을 쏟아냈다. 결국 2000년 여름 6년 계약 중, 겨우 1년만 채운 채 다시 스코틀랜드의 셀틱으로 이적하고 말았다. 첼시가 셀틱에게서 받은 액수는 불과(?) 600만 파운드, 당초 블랙번에게 지불한 액수에서 반이 겨우 넘는 액수로 근래에 첼시가 단행한 이적 중, 최악의 이적으로 꼽을만한 사례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셀틱에게 600만 파운드나 받아 낸 것 만으로도‘불행 중 다행’이라 치부할 만도 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4년째, 셀틱에서 활약 중인 그는 스코틀랜드 무대에서는 팀내 주전 선수로 무난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2001년, 셀틱이 레인저스에게서 우승 트로피를 되찾아 올 때 11골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득점력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그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중심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그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손꼽히는 ‘중량급’ 스트라이커임이 분명하다.
Case 2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아스날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첫번째 케이스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아스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란 점이다. 물론 뒤에 상황 설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첫번째 케이스와는 달리 이 상황을 전적으로 아스날의 잘못으로 돌리기에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도 첫번째 케이스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1998년 아스날은 기어코 맨체스터를 물리치고 역사적인 더블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윈터번, 아담스, 딕슨, 볼드, 키온 등으로 이루어진 철벽 수비진, 상대 미드필더 진을 가차없이 유린했던 프티와 비에이라 조합의 중앙 미드필더 라인, 일년 내내 환성적인 플레이로 공격을 이끈 오베르마스, 베르캄프와 이안 라이트 그리고 새롭게 팀의 주 득점원으로 성장한 아넬카까지, 이러한 선수 구성으로 그들은 리그와 FA 컵 우승을 동시에 일궈 낸 것이다.
그렇게 아스날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97-98 시즌을 뒤로 한 채, 98-99,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 시작 전부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아스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파전으로 전개될 것이라 예상했다. 리그 챔피언 자리를 사수하려는 아스날과 다시 챔피언 자리를 되찾아 오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여기에 신흥 강호로 부상하기 위해 수년간 지속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해온 첼시까지 우승을 넘볼 수 있는 전력을 갖추면서 98-99 시즌은 어느 해보다도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맨체스터가 그 빡빡한 경기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스날을 승점 1점차로 따돌리며 우승 트로피를 되찾았고 첼시는 막판 뒤심 부족으로 인해 맨체스터에게 4점 뒤진 리그 3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우승팀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팀이 바로 토튼햄이었다는 점이다. 우승 후보, 아스날과는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북런던 더비 라이벌이고 첼시와도 같은 런던을 연고로 하는지라 남다른 경쟁심을 지니고 있는 토튼햄 핫스퍼, 그들은 주어진 임무를 100% 완수 해내며 그 치열했던 타이틀 레이스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앞서 35, 36 라운드에서 웨스트 햄과 리버풀에게 잇따라 패배를 당했던 토튼햄이 가장 중요할 때에 고춧가루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만 것이다. 그것은 33 라운드,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1-3으로 참패한 것에 대해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한 것과도 같았다.
먼저 37 라운드에서는 지놀라의 그림같은 골로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첼시의 우승 꿈을 완전히 무산 시켰고 시즌 마지막 경기인 38 라운드에서는 올드 트래포드로 원정을 가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우승팀을 가려 내는데 일조(?)를 했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스날은 홈에서 아스톤 빌라를 맞이 하여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맨체스터 역시 아스날이 승리를 거둔다는 전제 하에서는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지만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아스날로서는 그들의 의지가 아닌 그들에게 있어 절대 앙숙인 토튼햄의 의지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는 상황을 맞이 한 것이다. 한마디로 토튼햄에게 칼자루를 집어 준 꼴이었다. 물론 홈경기 승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지라 상대가 누구든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토튼햄’이라는 점이 이런 비약도 가능케 한 것이다. 이제 아스날 팬들은 자기팀뿐만 아니라 토튼햄도 열렬히 응원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것은 실로 이런 상황이 아니면 두번 다시 보기 힘든 대단히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아스날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맨체스터도 토튼햄을 상대로 똑같이 승점 3점을 추가했기 때문에 단 1점 차이로 우승 트로피를 내주고 말았다. 이것으로써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가서야 우승이 결정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던 타이틀 레이스가 마감되었다.
시즌 전체를 돌아 보면 아스날이 못했다기 보다, 분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너무 잘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아스날 팬들에게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아쉬운 시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중에는 바로 ‘카누’의 합류가 조금이라도 더 빨랐으면 하는 것도 분명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 당시 상황 설명이 너무 길어진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이 ‘두번째 케이스’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지리아가 배출한 스타, 카누이다.
카누는 따로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도 유명한 선수이다.
94-95, 95-96 시즌 아약스는 2년 연속 챔피언스 컵(現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당시 맴버들을 살펴보면 훗날 유럽에서도 일류 선수로 통하는 선수들이 즐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라이베르트, 로날드와 프랭크 드 부어 형제, 시도르프, 피니디 조지, 보가드, 리트마넨, 오베르마스, 반 데 사르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엄청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였다. 카누도 이들과 함께 유럽을 호령했던 그 화려한 맴버 중 한명이었고 또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조국 나이지리아가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수상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며 또 한번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선수이다.
이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여 더 큰 부와 명성을 얻으려 했던 그였지만 심장병으로 인해 선수 생명마저 위협 받게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라운드를 벗어나 있었던 그였기에 회복이 되었다는 의사 판정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인터 밀란에서는 완벽한 적응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아스날이 영입하기 위해 나섰다. 몸상태가 완전치 않아 보였고 출전 경기 수가 적었다는 점 때문에 그리 많은 이적료를 지불하지도 않고 웽거 감독은 정상급의 테크니션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스날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한명으로 자리 매김을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적 초반, 주로 후반 교체 맴버로 출전하는데 고비 때마다 그는 뛰어난 활약상으로 아스날을 구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르캄프 또는 아넬카가 빠져도 그 공백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출전 횟수가 많이 적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아스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선수 중 한명이었다. (1999년 10월 23일에 있은 첼시와의 원정 경기에서 2-0으로 뒤진 후반전, 종료 15분을 남겨두고 해트 트릭을 달성하며 경기를 뒤집은 것은 카누의 활약상 중 백미로 꼽을 만 했다. 특히 슈팅 각도도 나오지 않는 사각에서 성공시켰던 골은 묘기와도 같았다)
전문가들에게 있어서도 카누의 영입은 시즌 성적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주 훌륭한 전력 보강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연한 몸놀림과 뛰어난 발재간, 창의성을 두루 갖춘 그가 아스날에 합류한 것은 맨체스터와 첼시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고 아스날이 또다시 리그 우승을 안겨 다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맨체스터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때 아스날은 그것을 전혀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누의 영입 시기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work permit 발급 등 이적이 최종 결정에 이르는데 소요 시간이 적지 않았다)
아무튼 그가 아스날 유니폼을 입고 처음 출전한 경기는 세필드 유나이티드와의 FA 컵 5라운드였는데 후반 약 25분을 남겨두고 디아와라의 교체 선수로 하이버리를 찾은 홈팬들과 첫 대면을 했다. 경기는 전반전 비에이라와 마르셀로의 골로 1-1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약 15분을 남겨 두고 그 균형이 깨졌다. 그리고 문제의 상황은 바로 이 골이 성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아스날의 PK 진영에서 그라만디(디펜더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 등 여러 포지션에 능했던 프랑스 출신, 그 역시도 웽거 감독이 낮은 가격에 영입하여 활용을 많이 한 선수 중 한명이다)의 수비로 세필드의 공격수, 모리스가 넘어졌고 아스날 진영에서 벗어난 공은 세필드 골키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베르캄프가 그 공을 뒤쫓았고 세필드의 골키퍼, 켈리는 다급한 마음에 공을 골라인 밖으로 걷어 냈다.(최소한 필자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러고는 약간의 레프리 타임이 주어진다. 팀닥터가 올라와 넘어진 모리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부상이 심각했는지 그는 포드로 교체되어 나갔고 경기는 아스날의 ‘스로우’로 속행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때 세필드 선수들은 당연히 자기들에게 스로우를 할 것이라 여겨 평소처럼 수비 형태를 갖추지 않고 아스날 진영 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울러의 스로우를 카누가 받아 중앙으로 크로스, 그 크로스를 오베르마스가 골로 연결된 것이다.
경기는 결국 2-1 아스날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세필드 감독, 스티브 브루스는 경기 종료 이후 TV 인터뷰에서 이것은 아스날이 스포츠 정신을 훼손시키며 속임수로 승리를 거두었다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웽거 감독은 그에 대해서 세필드 측이 원하면 재경기를 치룰 용의도 있다고 답하였다.
자, 사건 자체는 사실 의외로 간단한데 그것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우선 필자가 영국에서 TV로 직접 본 기억을 더듬어 일련의 사건들을 알기 쉽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세필드의 선수가 넘어졌다. -> 세필드 골키퍼가 그 공을 걷어냈다. -> 넘어진 선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레프리 타임이 주어졌다. -> 약간의 공백 이후, 아스날의 스로우로 경기가 재개된다. -> 그런데 그 스로우를 카누가 잡아서 바로 역습으로 전환, 결국 결승골로 연결 지었다.
우선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면 위가 같아 아스날이 전적으로 잘못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중간 중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몇몇 있다. 먼저 세필드 골키퍼가 공을 라인 밖으로 걷어 낸 것이 과연 모리스(세필드 공격수)가 넘어진 것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베르캄프의 대쉬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는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인 동시에 이 문제의 핵심이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당연히 세필드 측이 주장하는 데로 스포츠맨쉽을 무시하는 처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상황을 보면 과연 이 경우가 전자였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후자의 경우로 이해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더욱 자연스러운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파울러가 스로우를 할 때, 세필드 선수들뿐만 아니라 몇몇 아스날 선수들마저도 전자로 이해했는지, 수비 위치로 내려가는 것이 TV로 보더라도 역력했다. 그러나 몇몇 아스날 선수들이 세필드 선수들과 같은 생각으로 행동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레프리 타임으로 인해 약간의 시간 공백이 생기면서 그 앞의 상황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단순히 세필드 선수들이 자기 진영으로 오고 있으니까 단순 반응으로 수비 위치로 이동한 것으로 보여졌다.
그리고 또 한가지 쟁점은 파울러가 스로우를 할 때, 그들과 이러한 문제로 세필드 선수들과 의사 소통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실 파울러가 공을 던진 방향도 애매한 감이 없진 않았고 또 보기에는 카누가 세필드 선수 쪽으로 던진 공을 중간에서 가로 채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것을 카누로부터 시작되는 역습으로 이해해야 할지 아니며 순전히 카누 혼자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인지, TV 화면만으로는 그것을 구분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후자의 경우로도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카누는 본 경기가 아스날 유니폼을 입고 처음 출전한 경기였다. 그래서 선수들과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하는데 아직 완벽하지 못해 이러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는 점이다. (또 오베르마스의 대쉬도 대단히 늦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도 카누가 공을 잡고 역습을 하기 때문에 뒤늦게 공격에 가담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이 두가지 쟁점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알 수 있다면 본 문제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선수 본인만 알고 있을 뿐이고 그밖에 사람들은 단지 눈에 보여지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레프리 타임으로 비롯된 약간의 시간 공백, 아스날 선수들의 착각(확실치는 않지만)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쟁점 등, 여러 복합적인 변수들이 한데 엉켜 이러게 복잡한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짧은 필력으로 인해 TV로 보여졌던 장면을 글로 설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 글을 읽는 분들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옭고 그름의 판단은 역시 글을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둬야 할 듯 하다.
그러나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는데 바로 이 경기 이후 아스날의 대처 방법이 그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 경우에서 이제서야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경기를 통해 깨끗하게 승부를 가렸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브루스 감독의 불만에 대하여 웽거 감독은 재경기를 할 용의를 있다고 밝혔다. (그와 같은 발언으로 그날에 있은 BBC 방송의 Match of the day-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축구 하이라이트/중계 프로그램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이 프로의 메인 mc인 데스몬드 라이넘은 대중적으로 대단히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에서는 웽거 감독을 ‘Man of the Day’이라 추켜 세우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건이 점점 커질 기미가 보이자 이 문제는 FA로 넘어가서 최종 결정이 내려지게 되고 결국 웽거 감독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같은 경기장에서 재경기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1999년 2월 23일, 우여곡절 끝에 하이버리에서 재경기가 펼쳐지게 되었고 결과는 첫번째 경기와 같은 스코어인 2-1, 아스날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어떤 논란 꺼리도 없이 공정한 흐름 속에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특히 베르캄프가 기록한 두번째 골은 오직 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별한 골로 기억된다. 대다수 팬들은 그와 같은 경기 결과에 대하여 당연히 이겨야 하는 팀이 이긴 결과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즉 ‘정의’가 이겼다는 뜻이다.
Case 3
이번에 예로 들을 사건은 사실 시간 순으로 보면 가장 먼저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리고 이번 역시 아스날과 관련이 있는데 상대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라이벌, 바로 토튼햄이었다. 아스날로서는 한 시즌에 두 번(case 1을 포함하여)이나 비슷한 경우를 당하여 누구보다도 억울한 입장이었는데 이 사건도 아스날-토튼햄이라는 ‘북런던 더비 매치’라는 특수성 때문에 적지 않은 파문이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먼저 이 북런던 더비 매치에서 알아보자.
축구의 본고장 잉글랜드의 경우,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더비 매치가 많다. 리버풀-에버튼 간의 ‘머지사이드 더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간의 ‘맨체스터 더비’, 뉴캐슬- 선더랜드 간의 ‘북동부 더비’ 등이 있고 런던만 고려한다고 해도 아스날-토튼햄의 북부, 첼시-풀햄의 남서부 더비 등이 있다. 스코틀랜드로 넘어가 보면 그 유명한 올드 펌 더비(레인저스-셀틱)가 있으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도 밀란 더비, 로마 더비, 마드리드 더비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도 관심이 높은 'Super Clasico', 즉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클래식 더비 등이 있다.
잉글랜드에서 벌어지는 더비 중 아무래도 그 관심이 가장 높고 또 유명한 더비라 하면 바로 이 아스날-토튼햄 간의 ‘북런던 더비 매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와 토튼햄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 구장은 지하철로 불과 두 정거장 거리이다. (‘아스날’ 역에서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핀스버리 파크’에서 빅토리아 라인으로 갈아타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세븐 시스터즈’이라는 역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화이트 하트 레인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렇게 두팀의 홈구장이 대단히 가깝다는 점에서 북런던 더비의 특별함이 있다.
토튼햄이 화이트 하트 레인을 홈구장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이고 1913년에 아스날이 하이버리로 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더비 매치이겠는가! 굳이 이들 더비 매치의 역사를 하나하나 적지 않더라도 두팀 간의 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근래에 들어서 아스날에 비해 토튼햄의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또 단순히 종이 위에 적힌 출전 선수 명단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북런던 더비 매치’인 것이다.
북런던 더비 매치의 특별함은 이 정도로 설명하고 사건이 일어난 1996년으로 돌아가 보자.
1996년 11월 24일, 대중의 관심은 모두 하이버리에서 열리는 아스날-토튼햄 전으로 쏠려 있었다. 경기는 아스날이 배출한 당대의 스타, 이안 라이트의 PK골로 아스날이 1-0 리드를 잡은 채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가게 된다. 여전히 1-0으로 진행되던 후반, 아스날의 비에이라가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공을 잡고 있던 아스날의 골키퍼 루키치는 심판이 비에이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그 공을 라인 밖으로 던졌다. 그 후, 약간의 시간이 흘러 비에이라의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토튼햄의 스로우로 다시 경기가 속행될 때, 토튼햄은 완전히 뒤통수를 때리는 공격을 한다.
토튼햄의 닐슨은 공을 다시 아스날에게 넘겨 주는 대신 문전으로 ‘롱스로우’로 공격을 감행했고 캠밸(당시 토튼햄 소속), 키온, 볼드의 머리에 바운스 되면서 흘러 나온 공은 PK 에어리어 라인 근처에 있던 토튼햄의 신톤에게 연결되었다. 미처 신톤에게 까지 마크를 하지 못한 아스날은 그에게 슈팅 찬스를 제공해 줄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주저 없이 슈팅을 날렸다. 신톤의 발을 떠난 공은 골 포스트를 때리고 말았지만 리바운드된 공이 몸을 날려 막으려 했던 루키치 골키퍼의 어깨를 맞고 다시 골문으로 들어가 기어코 동점골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아스날에게 있어 2번째 불운이었다. 기록상으로는 루키치 골키퍼의 자살골로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분명 토튼햄으로서는 큰 행운을 누린 셈이다. 그러나 아스날 입장에서는 루키치의 불운보다도 신톤에게 슈팅 찬스를 주게 된 그 과정이 더욱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 앞서 설명한 북런던 더비 매치와 이 사건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아스날 팬들 관점에서는 말이다.
아무래도 더비 매치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던 팀이 토튼햄이고 또 그렇다고 경쟁심마저 아스날에게 뒤처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잘만 이용하면 두번 다시 오기 힘든 동점 찬스였으니 엉뚱한 방향으로 승부욕이 작용한 경우(아무리 그래도 아스날 홈구장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다니, 실로 무서운 승부욕이 아닐 수 없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토튼햄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면 과연 토튼햄 선수들은 무사히 경기장이라도 빠져 나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상상도 하기 싫은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경기는 후반 종료 2분을 남겨두고 아담스와 베르캄프의 연속골이 잇따라 터지면서 아스날이 3-1로 이겼다.
Conclusion
위에서 예를 들었던 3가지 사례 외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3가지 사례가 아마도 90년대 이후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발생한 파문 중 가장 대표적인 3가지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여파가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럼 결론을 내려보자.
그 의도가 가장 악의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세번째 사건일 것이다. 아스날과 토튼햄이라는 빅매치에서 첫번째 케이스처럼 절박함도 없었고 두번째 케이스처럼 상황 판단이 어렵지도 않았는데도 토튼햄 선수들은 과감하게 ‘속임수(?)’로 득점에 성공했다. 그것도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에서 말이다. 물론 첫번째 경우도 개인적으로는 쉽게 용납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해 줄 수 있는 여지라도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경우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고 아스날의 이후의 대처에 대해서는 분명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시간상 흐름으로 나열하면 세번째- 첫번째- 두번째 케이스 순이다. 그리고 아스날은 항상 이 세가지 경우 모두에서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두번이나 피해자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 그 어느 팀보다도 ‘피해자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경기’라는 결론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아스날이 강팀이고 세필드 유나이티드가 약팀이라 해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더욱이 리그 우승을 목표로 하는 팀이 일정에도 없는 경기를 굳이 치뤄 가며 괜한 어려움을 자초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날의 결정은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이고 또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기준으로 통용될 것이기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서 아스날의 이 같은 결정을 받아 들여 융통성 있고 또 현명하게 운영을 해 오고 있고 잉글랜드의 축구 협회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얼마 전, 한국 K 리그를 결산하는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이번 시즌 관중이 엄청나게 감소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부정확한 심판들의 판정과 팬들의 그라운드 난입 등으로 인한 경기장 폭력이라 하였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 예를 들었던 3가지 경우 중 하나라도 국내 프로 경기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을 문득 가져본다. 특히 두번째 케이스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가정한다면 협회와 감독들의 대처가 자못 궁금하다. 과연 담당 감독이 재경기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또 만약 그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하더라도 협회도 그와 같은 결정을 받아드릴 수 있을까?
아무튼 아스날의 대처 방법은 그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며 비록 강제 조항은 없지만 꼭 ‘스포츠맨쉽’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 또 ‘스포츠맨쉽’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만 하다.
FIFA의 블래터 회장은 지난 12월 23일, FIFA 공식 홈페이지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서 내년 2004년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는 송년사를 게재한 바 있는데 그 자리에서 2004년, 새해를 ‘페어플레이의 해(a year of Fair Play)’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약물 파동 및 경기장 폭력 등 그 동안 세계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들 큰 사건도 당연히 없어져야 할 것들이지만 ‘상식’적인 플레이도 앞으로 계속 지켜져야 할 것이다. 이런 상식적인 플레이를 꼭 지켜야 한다는 강제 조항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테지만 상대방을 배려 해 주는 그 마음이 바로 ‘페어플레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상황 설명에 있어 다소 미숙한 부분이 있는 점, 이해를 바라고 각각의 사건에 대한 최종 결론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덧붙여 특정 선수 또는 팀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도 밝혀 둔다.
- 사커라인 김범석 -
약간 친 아스날 성향이 드러나는 글이기는 하지만 좋은 글이라 생각해서 올려 둡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는 3번째 사례에 대한 아스날의 민감한 반응이라 생각되네요....
저도 집에 ESPN이 나오지 않는지라 동영상이라도 찾아 봐야 알겠지만, 에보우에가 진짜로 일어날려다가 상황보고 시뮬레이션 한거라면 스포츠맨쉽에 어긋난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첫댓글 동영상 보시면 아실겁니다..튼햄은 잘못없고요..욜감독의 잘못이겠죠...그것도 그 경기자체가 비매너라기보단 경기후에 자신은 선수가 쓰러진걸 못봤다고 거짓말한게 비매너죠..분명 캐릭에게 플레이!라고 외쳤으니까요..3케이스는 비에이라가 자기 혼자 넘어진건가요?? 그리구 걷거낸거도 같은팀이죠? 이번거처럼 A팀끼리
넘어져서 찬스가 오는 순간인데도 B팀이 걷어낸 그런 케이스는 없네요...케이스가 달라서 별루 좋은 예라고할순 없지만 대충 스포츠맨쉽정리는 됩니다만..이번 스날-튼햄전에 대해선 제생각에서 별루 변화가 안되네용 혹 이번케이스 같은 일이 옛날엔 없었는지요..
흠 역시 이 카폐에도 이런 논의가....... 제가 활발히 활동할때만해도.. 우리 한국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기 전이라 순수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 응원하는 분위기.(물론 이때도 험악해질때도 많았죠)..
박지성 선수와 이영표 선수가 각각 맨유와 토튼햄에 간 이후로는 맨유와 토튼햄을 무조건 옳은 쪽으로 해석하는 분들을 보면 한숨....... 슈랜님도 마찬가지인듯.... 허접감독님이 올린 글을 제데로 읽기나 한건지.......
흠 상당히 애매모호한 상황이지만 결코 당당하게 아니다 맞다라고 해석할수 없는듯... 개인적으로는 근 1,2년 동안 본 가장 치사한 플레이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원래 다비즈가 그런 선수.. 엄청난 운동량과 더티플레이, 악착같은 마크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글겠죠..다비즈만의 장점이기도 하고
전 시어러옹을 사랑하는 뉴캐슬팬으로....... 갑자기 증가한 토튼햄과 맨유팬(맨유팬들은 원래좀 있었죠)의 공공의적인 아스날이 불쌍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