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숙 생활
선친은 일제 말기에 일본의대 예과 시절 동경에서 하숙을 하셨고, 모친은 포항고녀 1회생으로 청도 본가를 떠나 포항에서 하숙을 하신 후 당시 김옥길 전총장이 사감이시던 이화여전 기숙사에서 생활하셨다. 그러니 두 분 모두 객지 생활의 애환을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난 66년 서울의대 예과 1학년 때부터 하숙을 시작하였다. 72년은 인턴 숙소에서 일 년 간 하숙처럼 지냈고, 다시 전공의로 올라가며 일 년간을 더 하숙을 하였다. 모친이 하시는 말씀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서울에서 하숙을 하셨던 이모부는 구둘 목은 싸늘한데 아궁이는 불기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까 촛불이더라. 또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우는 것까지 보았다며 흉악한 하숙 주인들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나 역시 동기들이 살던 변두리 싼 하숙집에서 천장을 뚫어 긴 형광등을 두 방에서 하나를 사용한 것도 보았다. 하숙집의 찬거리는 시장이 파할 무렵 생선 가게에서 남은 걸 사와서 반찬을 하여 약간의 고약한 냄새는 피할 수가 없었지요.멀리는 마포 신수동과 대지극장 뒤 미아동에서도 지냈었지만 주로 대학과 병원 부근인 동숭동, 이화동, 명륜동과 삼선교에서 살았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하숙집을 들어보자면 이화동 적산가옥 하숙집은 얼마 전 건너편 연동교회 결혼식에 갔을 때 보니 없어지고 다른 근사한 건물로 바뀌었다. 어느 가을날 등산 후 학교 부근 중국집 진아춘에서 인사불성으로 마시고 다음 날 새벽에 과년한 주인 딸이 있는 안방을 지나 화장실을 가기도 뭣하고, 요강대용으로 넣어 준 깡통에 소변을 보기도 싫었다. 걸어서 가까운 서울의대 본관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수위한테 덜미를 잡히기도 하였다. 의예과 2학년 금요일 첫 시간이 수학이나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늘 늦잠을 자는 의예과 동기 땜에 수업을 거의 놓쳤다. 나중 편미분과 편적분까지 독학으로 학점을 따고 간신히 진급을 하였으나 내 동기는 그만 수학에 낙제를 하고 말았다. 계단이 수없이 많았던 삼선교 하숙집. 전라도 동기와 내기에서 이겨 감을 사러 보냈더니 내가 즐겨먹는 홍시가 아니라 깎아 먹는 감. 바꾸려고 여러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오기는 너무 귀찮은 일이라 떫은 감을 먹고 나서 심한 변비로 무지하게 고생하였던 일. 수업 시작종을 듣고 뛰어가도 늦지 않는 서울 법대 건너 골목길의 방 두 개짜리 판잣집은 겨울이면 창에 성에가 끼어 바깥도 볼 수 없었지. 서울 문리대 캠퍼스 뒤 하숙집부근에는 청춘 영화의 단골 로케장인 일제 때 지은 이층 양옥 ‘낙산장’이 있어 밤새 조명을 밝히고 촬영하는 배우들도 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있었던 그 방의 전 주인은 유명한 시조시인 이영도이었다.
동숭동 산비탈의 하숙집은 서울 둘레길 낙산공원에 갔을 때 내려오다 보니 재개발로 없어졌다. 이때 같이 하숙한 친구가 불같이 일어났다가 망한 Y 그룹의 신 회장이다. 이 집에서는 심심하면 나이롱 뻥같은 노름을 많이도 하였었다. 겨우 십 원 내기였는데, 돈이 떨어지면 성냥개비로, 이도 떨어지면 마빡 때리기로 했다. 돈이야 잃었다 다시 따면 그만이지만 맞아 아픈 이마는 내가 남을 때린다고 낫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면 이마빡이 얼 얼하곤 했다. 먹다 남은 소주를 남은 새우깡에 적셔 개에게 먹이고 나서 술 취한 개가 행방불명되어 된통 욕 얻어먹고 나중에 보니까 마루 깊숙이 들어가 있는 걸 찾아낸 적도 있다.
그 중 내가 대장 노릇을 하였던 명륜동 안 모 씨 댁은 잊을 수가 없다. 인턴 숙소로 들어가며 하숙을 끝내었다가 다시 전공의 1년을 하숙한 집. 주인이 동대문서 강력반장이라 종종 집에 들르고, 별칭이 명륜 카지노였다. 이때는 주로 하는 게임이 트럼프 카드로 하는 마이티이었고, 여기서 얻은 나의 별명이 마이티 유. 물론 마이티를 잘하고 돈도 많이 딴다고. 돈을 따면 한 갑에 20원씩 하는 백조를 두 어 볼을 사다 두었다가 담배 떨어진 하숙생, 주로 서울의대 후배들이지만 “형, 담배 한 갑 주세요.” 하면 나누어주곤 하였다. 어떨 때는 “형, 요즈음 반찬이 너무 부실해요.” 이를 주인아줌마에게 말하면 한 번씩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유 선생, 오늘 집에서 저녁을 잡수세요.” 하면 별식이다.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재어두었다가 먹고 싶은 만큼 구워준다. 이 집에서는 신혼 한 달 만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걸로 끝이 났다.
열세 번 하숙을 옮겨 다니며 짐이 간편하게 되어 그저 이불 보따리와 책 보따리 각각 하나 씩. 어릴 적부터 까다로웠던 식성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다. 난 아직도 그렇게 많이 먹었던 콩나물과 두부는 좋아한다. 심지어는 나의 생일이 3월 1일이라 그때는 개학을 앞두고 있어 항상 우리 집에서 차려주는 생일 팥밥과 미역국은 못 얻어먹고, 어쩌다 보면 친구 하숙집에서 생일을 맞기도 하였다.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인 셈.
하숙 생활도 끝나고 74년 2월 결혼하여 신혼 두 달 만에 전남 광산군 본양면 보건지소에 무의촌 파견 근무를 나갔다. 외식이라야 시외버스를 타고 한 달에 한두 번 광주까지 나가야 할 수 있었던 나는 하루 세 끼씩 처가 해준 더운밥을 먹었더니 파견 전 56킬로이던 체중이 6개월 만에 무려 16킬로나 불어 결혼 때 맞춘 옷들을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신혼의 처는 살던 삼선교 집에서 장만한 저녁식사를 심지어 병원 당직일 때도 가져다주곤 하였었다. 77년 일 년 간 경기 포천군 일동면의 103 야전병원 BOQ(장교 숙소)에서 객지 밥을 먹은 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9년간이나 하숙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된 연유이다.
첫댓글 외과 박길수 교수님도 일본의대 출신이시던데, 부친과 동창이신가 봅니다.
선친은 예과 3년만 마치시고 귀국하여 서울의대 5회로 김도진, 김영균, 심보성선생님과 동기로 졸업을 하셨지요. 대구고보 동기로는 먼저 졸업하신 한문식교수와 앞 뒤자리로 앉아 공부를 하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