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 영 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 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 산비알 : 산비탈의 충청도 방언
- 시선집〈유리병 편지〉나라말 -
〈고영민 시인〉
△ 2002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 '봄의 정치'가 있음. '박재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 수상.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 예스24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으리라는 믿음으로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사이버문학광장 ‘문장’의 세 번째 시 배달,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www.yes24.com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 나라말 | 2013
꽃 무 릇
잎은 잎으로 살다 가는 것 꽃은 꽃으로 살다 가는 것 아비 없이 나는 아비가 되고 어미 없이 너는 어미가 되어 꽃인 듯 잎인 듯 잎인 듯 꽃인 듯 꽃마냥, 아니 잎마냥, 잎새는 꽃 없이 돋았다 지고 꽃은 잎 없이도 혼자 피었다 지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제 안에 키운 꽃이여 제 안에 키운 잎이여
- 시집〈공손한 손〉창비 -
공손한 손 - 예스24
따뜻한 추억을 불러내 사라져가는 풍경을 쉽고 편안한 언어와 웅숭깊은 사유를 통해 펼쳐 보이는 고영민 시인의 두번째 시집. 독보적이고 능청스러운 해학과 유머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창비 / 2009
앵 두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쉥, 하고 가로질러 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간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부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여름비 한단
마루에 앉아 여름비를 본다 발밑이 하얀 뿌리끝이 하얀 대파 같은 여름비 빗속에 들어 초록의 빗줄기를 씻어 묶는다 대파 한단 열무 한단 부추, 시금치 한단 같은 그리움 한단 그저 어림잡아 묶어놓은 내 손 한묶음의 크기
- 시집〈봄의 정치〉창비 -
봄의 정치 - 예스24
세상을 바라보는 온유한 시선과 유쾌한 발상이 돋보이는 순박한 시편들로 개성적인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고영민 시인의 신작 시집 『봄의 정치』가 출간되었다.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으
고영민 시집 〈봄의 정치〉 창비 / 2019
부의 봉투
두루미 날아간다 지인의 모친상에 조의금 오만 원 담아 두루미 날아간다 늦가을 슬픈 표정은 상가에 다 모이고 발인은 내일모레 장지는 하늘공원 목깃이 새까매진 다저녁 산마루 위 울면서 조문을 가는 희고 빈 봉투 하나
-〈가히〉2023. 가을호 -
사랑의 불가능
나무는 잎을 다 지웠다 이제 새를 모을 방법이란 무엇일까 시효가 있는 걸까 사람 사이에도 불이 붙지 않는 재와 같이 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같이 일생을 다하고 폭발하는 별과 같이 울지 않는 새와 같이 새가 없는 하늘같이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 헤어짐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만남의 시기가 끝난 것이다
* 욥기 7장 6절에서 가져옴
적 막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 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